해조곡海鳥曲 1937 이난영, 이노홍(李扶風) 작사, 양상포(孫牧人) 작곡
해조곡海鳥曲 1937 이난영,
이노홍(李扶風) 작사, 양상포(孫牧人) 작곡
李蘭影の「海鳥曲」
이노홍詞 /양상포曲
海の鴎よ 鳴かないで
木綿のチョコリが 涙に濡れる
遠く水平線に浮かぶ 白い帆の船ひとつ
今日も去りにし君は帰らぬ
https://www.youtube.com/watch?v=BDGXj6d1gQI
갈매기 바다위에 울지말아요
물항라 저고리에 눈물짓는데
저 멀리 수평선에 흰 돛대 하나
오늘도 아 가신님은 아니 오시네
쌍고동 목메이게 울지말아요
굽도리 선창가에 안개젖는데
저 멀리 가물가물 등대불하나
오늘도 아 동백꽃만 물에떠가네
바람아 갈바람아 불지 말아요
얼룩진 낭자마음 애만 타는데
저멀리 사공님의 뱃노래 소리
오늘도 아 우리님은 안오시려나
이난영 (李蘭影) 의 가족은 남편인 작곡가 김해송, 자녀인 김시스터즈와 김보이스, 오빠인 작곡가 이봉룡 등 음악가족으로 유명하다.
이난영은 '목포의 눈물' '해조곡' '다방의 푸른 꿈' '목포는 항구다' 등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고 김해송은 '청춘계급' '연락선은 떠난다' '오빠는 풍각쟁이' '선창' 등 주옥같은 곡을 만들었다.
또 이봉룡은 '낙화유수'(남인수) '아주까리 등불'(최병호) '고향 설'(백년설) 등 명곡을 남겼고, 김시스터즈는 한국 가수로는 처음으로 팝의 본고장 미국으로 진출했다.
이난영은 1916년 전라남도 목포시 출신, 본명은 이옥례(李玉禮)이나 호적에는이옥순(李玉順)으로 기록되어 있다.
1923년 목포공립여자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졸업을 하지 못하는 등 어려운 가정 형편에서 자랐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오빠인 이봉룡과 함께 갖은 고생을 하며 자랐다.
16세 때에 제주도에서 삼천가극단의 순회 공연 중 막간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다가 노래실력을 인정받아 순회극단을 따라다니게 됐다.
삼천가극단이 일본에서 순회 공연을 할 때 작사가인 강사랑이 이난영의 재능을 알아보고는 오케레코드사의 사장인 이철에게 추천해서,
1932년에 문호월의 곡 <고적>을 처음으로 취입했다.
1934년 <목포의 눈물>을 불러 크게 히트를 쳐서 가요계의 스타로 갑작스럽게 등장했다.
한국 전쟁때 김해송이 납북된 이후 KPK악단을 직접 운영했다.
이 시절, 동료가수였던 남인수와 사랑에 빠진다.
자신을 챙겨주고 아껴주는 남인수의 모습에 반해서 사실혼관계로 지낼 정도였지만, 남인수가 폐결핵으로 갑자기 죽게된다.
(1962년 5월 남인수가 45세를 일기로 폐결핵으로 사망할 때까지 이난영이 간호해 주었다.
남인수와 전처 김은하의 이혼 사유가 이난영과의 불륜 때문이었다는데,
김은하는 이난영의 남편이었던 김해송의 불륜 상대였기도 했다.)
이후, 이난영은 자식들을 따라 미국에서 생활하다가 귀국하여,
1965년 알코올과 아편 중독의 후유증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했다(향년49세).
이난영의 자식들은 미국에서 김시스터스, 김보이스 라는 이름으로 연예활동을 했고 1963년에는 내한공연도 했다.
큰아들은 남인수의 딸과 미국에서 장모 김은하를 모시고 잘 살고 있다는...
인생이 참 기구하고 불행해보인다(...)
남인수(南仁樹)ㆍ이난영(李蘭影) 1950년대말
1935년 목포가요제에 참가한 남인수는 연상의 여인 가수 이난영과 눈이 맞았다.
이들의 사랑은 K.K.P. 악단장 김해송이 끼어들며 삼각관계가 됐다.
1936년 '이난영'이 '김해송'과 결혼한 후 3년 뒤, 「남인수」도 홧김에 1939년 동료가수 '김은하'와 결혼해 2남 2녀를 두었다.
6.25사변으로 김해송이 월북하고, 남인수는 3남 4녀를 기르면서 K.K.P. 악단을 운영하던 이난영을 도왔다.
1958년 말께 '김은하'와 이혼하고, 혼자 남은, 첫사랑 '이난영'과 다시 만나 사랑을 꽃피웠다.
남인수(南仁樹)는
경상남도 진주 출생으로, 원래 이름은 최창수(崔昌洙)였으나 개가한 어머니를 따라 진주 강씨 문중에 들어가면서 강문수(姜文秀)로 바뀌었다.
남인수는 가수로 데뷔하면서 작사가 강사랑이 지어준 예명이다.
남인수의 형이었던 최창도의 딸, 그러니까 남인수에게는 조카가 되는 최삼숙은 북한의 인민배우로, 무대 공연 2600회를 한 인기 가수라고 한다.
2016년 5월, 최삼숙의 딸이 탈북하였다고 보도 되었다.
학력 사항에 대한 내용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가수 데뷔 전 경력 역시 일본에서 노동자로 일했다는 설과 중국어를 배우다가 경성부로 올라왔다는 설 등 여러 설이 분분하다.
다소 불우한 유년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는 정도로 알려져 있다.
남인수와 이난영과의 로맨스가 유명하다.
이난영은 원래 작곡가 김해송의 부인이었으나 한국 전쟁 때 남편이 실종되면서 남인수의 도움으로 김해송이 운영하던 악단을 운영했다.
1962년 5월 남인수가 45세를 일기로 폐결핵으로 사망할 때까지도 이난영이 간호해 주었다.
남인수와 전처 김은하의 이혼 사유가 이난영 과의 불륜 때문이었는데,
김은하는 이난영의 남편이었던 김해송의 불륜 상대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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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을 잃고 외로워하던 이난영과
당대 최고의 남자 가수인 남인수.
사이엔 사연이 많습니다.
이난영의 남편인 김해송에게 여자가 생겼었는데, 후배 연예인인 '김은하'라는 여자였습니다.
반대로 이난영이 남편을 잃고 나중에 남인수와 가깝게 지냈는데,
남인수의 원래 부인이 바로 자신 남편의 여자였던 '김은하'라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 악연을 갖게 되었는데,
남인수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는 이난영을 멀리하고
원 부인인 김은하라는 여인을 다시 찾았다고 합니다.
두 집안의 악연은 자녀들에 의해서 끊겼는데,
자녀들이 결혼을 해서 미국으로 건너가 살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난영이 원수처럼 생각하던 여자를
자신의 아들이 장모로 모시고 살게 된 셈이었습니다.
이난영은 어느 남자하고도 완전한 사랑을 이루지 못한 불행하고 사연이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목포의 눈물이라는 자신의 노래말처럼 매우 설움이 많은 생을 살았던 것 같습니다
이난영의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산 107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묘는 '무연고'로 관리자가 없는 것으로 공동묘지 관리사무소에 등록되어 있습니다
남인수와 김은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