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K. 인구 6천5백만의 섬나라 영국.
영국의 침략을 받지 않은 나라 (하얀색으로 표시된 곳)
인구 6천5백만의 섬나라 영국.
대륙에서 한 발자국 떨어진 섬나라 영국은 바다라는 자연의 혜택을 입어 외적의 침입에 그다지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고 섬으로 건너오는 적을 막아줄 해군만 있으면, 육지에서 외적과 싸울 육군이 필요 없는 이점. 하지만 강한 군대가 없었던 영국의 국왕은 막대한 재산과 개인의 군대를 거느린 신하들과 지방 귀족들을 굴복시킬 힘을 가질 수 없었다. 약한 국왕에게 귀족들은 더욱 많은 권리를 요구하게 되어 영국에서 민주주의가 크게 발달한 것도 '섬나라'라는 데서 오는 특징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대륙의 나라들이 모든 힘을 군대 키우는 데 쏟은 것에 비해 영국은 강한 해군을 바탕으로 대륙의 한 나라가 커지면 그 반대편 나라 편을 들어 어느 한 나라가 유럽에서 두드러지게 강대해지는 것을 막음으로써 힘들이지 않고 유럽 대륙을 한 나라가 지배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고 또한 영국이 침략당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유럽 대륙 나라들이 세력 다툼을 벌이는 동안 전쟁과 침략의 두려움에서 벗어난 영국은 세계로 눈을 돌려 (강한 해군으로 세계에 진출하려는 다른 나라를 누르고) 세계 방방곡곡에 그 세력을 뻗어 자기 땅보다 몇십 배에 이르는 엄청난 식민지를 차지하여 세계 최강이 대영 제국을 이룰 수 있었던 것도 영국이 섬나라라는 데서 오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기술이 발달되어 비행기가 발명된 뒤부터는 바다를 통하지 않고도 대륙에서 직접 영국으로 이어지게 되어 해군의 역할이 크게 줄자, 영국이 대륙과 떨어져 있다는 자연적 혜택이 전혀 의미가 없어져버리면서 사실상 대륙이 한 나라나 다름없게 되었고, 차츰 그 세력도 기울기 시작하여 황혼길에 접어들었다.
섬나라라 끊임없이 외적의 침입을 받아, 로마의 정복, 북도이칠란트 작센 지방에서 건너온 앵글로색슨족의 침입, 스칸디나비아의 바이킹족, 덴마크 지방의 데인족, 북프랑스 노르망디의 노르만족의 침략 등을 거치는 동안, 영국 땅에는 켈트인, 로마인, 앵글로색슨, 데인, 노르만 등 여러 민족이 뒤섞여 복잡한 인종 구성을 이루게 되었으며, 여러 민족의 문화와 성격이 한데 뒤섞여 아주 복잡한 영국인의 성격과 문화를 이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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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브리튼 왕국 U.K., The United Kingdom of The Great Brttain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네 개의 지방으로 나뉘어 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때 통일 왕국을 이루었으나, 지방간에 대단히 큰 차이 보이고 있다.
잉글랜드는 영국교회, 웨일스,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는 가톨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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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첫 원주민은 이베리아인, 하지만 이들은 이렇다 할 문명을 갖지 못했다.
영국 문명의 첫 출발은 지금으로부터 약 2400년 전 건너온 켈트족으로 시작, 이베리아인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정착.
켈트족은 여러 개의 부족 국가로 여기저기 흩어져 살고 있었다.
BC55년 카이사르의 정복으로 로마 문화기 깊이 뿌리박게 됨.
이후 300년 동안 로마의 태평 성대, 로마 문화의 완전한 정착.
4세기 초부터 시작된 북방 게르만족의 대이동, 로마가 위기에 처하자 영국이 로마 군대가 떠남.
영국은 스스로를 지킬 힘도 없이 외적의 침입에 문을 활짝 연 꼴이 됨.
북쪽에 도망가 살던 켈트족 일파인 스코트 족이 침략, 작센 지방 색슨족에게 도움을 요청.
색슨족은 켈트족을 죽이고 영국땅을 차지, 앵글로족의 침략,
켈트족은 산악시재인 웨일스,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로 도망.
지금도 평야지대인 잉글랜드 지방에는 앵글로색슨족(잉글랜드 이름의 기원)이 살고
웨일스,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지방은 켈트족이 대부분,
700년경 앵글로색슨족,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등도 크리스트교로 믿음을 바꿈.
783년부터 바이킹족들의 침략에 시달림, 앵글로색슨족의 단결, 단결된 영국의 지도자 앨프레드 대왕.
이로써 영국 역사에서 처음으로 나라다운 나라, 즉 영국 왕국이 태어나게 되었다. 이것이 앵글로색슨족의 첫 통일 국가.
1014년 덴마크 크누드의 침략, 영국 왕 항복, 덴마크 왕이 탄생.
크누드는 영국, 스코틀랜드, 덴마크, 노르웨이를 한 손아귀에 쥐어 스칸디나비아 제국을 건설(1030)
이렇게 영국 역사에 끼친 덴마크의 영향은 대단히 크다.(덴마크 왕자 햄릿)
크누드 사망 후 다시 영국, 스코틀랜드, 덴마크, 노르웨이로 분열됨.
바이킹족이 프랑스 왕에게 신하가 될 것을 맹세하고 노르망디에 자리잡은 것이 911년,
그 후 100년, 노르망디 왕위에 오른 노르망디 공 윌리엄, 1066년 영국 정복, 윌리엄 1세(프랑스 왕의 신하)로 왕위에 오름.
노르만족의 영국 정복은 프랑스가 영국을 정복한 것과 같았다.
헨리 2세 : 프랑스 땅에 프랑스 왕보다 더 큰 영토를 차지, 스코틀랜드와 웨일스 지방을 평정, 영국 역사상 처음으로 통일된 영국을 이룩하여 단단한 영국이 기반을 다짐.
위대했던 왕, 아버지 헨리 2세를 배반하여 내쫓고 영국의 왕관을 차지한 아들, 이가 바로 사자왕 리처드 1세.
리처드 1세 후 존 왕, 프랑스가 프랑스 안 영국땅을 침략, 1206년 남부 프랑스 영국 땅 거의 모두를 빼앗음.
크로틀랜드의 반란까지 겹치자, 영국왕 존은 프랑스와 전쟁을 선언하지만
영국 역사상 처음으로 신하들이 왕에게 거역하는 일이 발생.
존 왕이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지고 돌아오자, 귀족들은 존 왕에게 무기를 들고 대헌장을 제시,
1215년 7월 15일 존 왕은 이 헌장에 서명했고, 이 헌장은 바로 영국 최초의 헌법이며,
오늘날 민주주의의 주춧돌이 된 대헌장, 마그나 카르타.
'대표 없는 곳에 세금은 없다'
마그나 카르타로 사실상의 권력이 세금 내는 대표자회의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로써 영국에는 이른바 영국 의회(1295년)의 씨앗이 뿌려지게 되었다.
마그나 카르타 이후 영국왕은 프랑스 왕처럼 큰 권력을 휘두르지 못하고
귀족, 대신, 세금 내는 사람 대표들의 결정에 따라야 하는 '도장 찍는 왕' 처지가 되어
군림하나 지배하지 않는다, 라는 말이 생기게 된다.
못난 왕 존 왕은 1516년 사망, 9살짜리 헨리 3세 즉위.
교황의 세력을 등에 업은 헨리 3세는 대헌장을 무시,
시몽 드 몽포르 백작이 앞장서 반란, 1265년 각 주, 지방 대표들이 모인 의회가 열림.
그 후 1341년 영국 의회는 상원(귀족 승려 등), 하원(농장주, 돈 많은 상인, 학식 있는 평민 등)로 갈라짐.
1272년 에드워드 1세,
백년전쟁(1337~1453) : 플랑드르 지방 장사꾼들의 농간에 오래 묵은 두 나라 사이의 감정이 터져 벌어짐.
석궁의 출현으로 중세식 기사 돌격 작전이 통하지 않게 됨. 100년 동안 영국군의 승리,
프랑스 멸망의 위기 때 잔 다르크 등장, 뒤 게클랭 장군, 프랑스의 승리,
섬나라 영국으로 영토 줄어들고, 영국 프랑스는 이제 완전히 따로 나뉨.
장미 전쟁(1455~1485) : 대귀족 요크가[하얀 장미]와 에드워드 가[붉은 장미]를 중심으로 두 패로 갈라져 전쟁.
장미 전쟁으로 영국 귀족의 수는 전쟁 전에 비해 절반 이하로 줄어 그만큼 왕의 세력이 커짐.
장미 전쟁을 끝내고 왕우에 오른 헨리 튜더는 헨리 7세로 왕위에 올라 강력한 왕권을 휘두름.
헨리 7세(1485년) 뒤를 이어 헨리 8세, 에드워드 6세, 메리 여왕, 엘리자베스1세 여왕(1603), 절대 왕권 시대가 118년간 이어짐.
줄어든 귀족, 그 아래로 젠틀맨. 그 아래 요먼, 그 아래 평민.
평민도 노력만 하면 젠틀맨, 요먼이 되어 출세할 길이 열려 있었다.
반면 프랑스는 부르주아 계급의 출세의 길이 막혀 결국 1789년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난 것.
즉 프랑스에서는 왕이 너무 강력하여 귀족들은 왕에게 충성을 바치고 부귀영화를 누리다 혁명을 겪게 된 것이고
영국에서는 왕이 약한 까닭에 귀족을 누르기 위해 젠틀맨, 요먼을 키워 계급 사이에 반목이 생기지 않아 혁명을 겪지 않은 것.
1509년 헨리 8세 즉위.
첫 아내는 죽은 형의 아내, 당시 가장 힘센 나라 에스파냐 왕의 딸 캐서린 공주. 캐서린과 사이에 딸, 피의 메리를 얻음.
헨리 8세는 까만 눈동자의 아름다운 시녀 앤 불린을 사랑하여, 로마 교황에게 캐서린과의 이혼을 신청, 거부당하지만
스스로 캐서린과 이혼을 선언하고 1533년 교황 몰래 앤 불린과 결혼함. 교황은 파문을 선언.
앤 불린과 비밀 결혼 하기 전까지만 해도 헨리 8세는 독실한 가톨릭 교도였지만, 파문 후 1534년 영국 국교인 성공회를 세움.
성공회는 가톨릭에 루터파의 이론을 약간 덧붙인 것으로 가톨릭과 큰 차이 없음.
군대를 풀어 성공회로 믿음을 바꾸지 않은 교회와 수도원을 파괴, 수많은 사람을 처형함.
154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10여년 동안 가톨릭 교도를 처형하는 화형장에 불이 꺼지지 않았다고.
앤 불린이 딸을 낳고, 두 번째 아기가 아들이었지만 죽어서 태어나자 앤은 왕비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죄로 목이 잘림.
앤 불린의 딸이 엘리자베스 공주로, 후에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된다.
헨리 8세는 세 번째 왕비 제인 시모어와 결혼, 에드워드 왕자를 얻지만, 제인 왕비는 출산후 며칠 만에 사망.
네 번째 왕비로 도이칠란트 루터파 왕족인 앤 공주와 결혼, 이혼.
다섯 번째 왕비 캐서린 하워드. 품행이 단정치 못하다는 죄로 사형에 처해짐.
여섯 번째 캐서린 파와 결혼, 캐서린 파는 헨리 8세보다 더 오래 살았고, 헨리 8세 사후 세 번 결혼.
헨리 8세는 6명의 왕비에게서 2명의 딸(메리공주, 엘리자베스공주)과 아들 하나(에드워드 왕자)를 둠.
1547년 헨리 3세 사망 후 에드워드 8세가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나 6년만에 병으로 사망,
1553년 당시 서른이 훨씬 넘은 노처녀였던, 헨리8세의 첫 왕비 캐서린이 낳은 맏딸 메리에게 왕관이 돌아감.
메리의 엄마 캐서린은 철저한 가톨릭 신자였던 에스퍄냐 왕의 딸이었고,
메리는 가톨릭에 완전히 젖어 자라난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다.
거기다 억울하게 이혼당한 캐서린의 운명을 옆에서 함께 겪었고
공주였지만, 헨리 8세의 무관심으로 유모의 손에서 자라났다.
메리 여왕의 명령으로 성공회가 금지되고 가톨릭으로 되돌아가자 영국은 큰 혼란에 빠짐.
메리 여왕은 에스파냐 왕자 필리페의 초상화를 보고 첫눈에 반해 결혼.
에스파냐 왕자와의 결혼을 반대하는 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
필리페 왕자는 메리와 영국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고,
나라 안에서는 메리 여왕에 대한 반대 여론이 높아지자 메리 여왕은 심한 신경질,
1555~1558년까지 3년 동안 성공회, 청교도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으로
수만 명의 신교도가 화형을 당하였고, 이로 인해 메리 여왕은 오늘날까지 '피의 메리'라고 불리고 있다.
메리 여왕은 정신병 환자 같은 상태에서 아무도 돌보지 않는 외로운 침대에서 1558년 병으로 사망.
메리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사람이 바로 헨리 8세의 두 번째 부인 앤 불린의 딸, 엘리자베스1세 여왕.
헨리 8세가 국교를 가톨릭에서 성공회로 바꾼 이유가 앤 불린과 결혼하기 위해서였던 만큼
딸 에리자베스는 당연히 독실한 성공회 교도였다.(메리 여왕 시절엔 가톨릭을 믿는 척함)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성공회로 돌아가, 가톨릭과 청교도(퓨리턴)을 금지하는 법을 만듬. 1559년 '종교 통일령'
엘리자베스 1세 시절에도 무시무시한 처형 장면이 끝없이 이어졌고, 사형장에서 사라진 사람이 메리 여왕 때 못지않게 많았다.
아메리카에서 배에 실려 에스파냐로 들어오는 황금, 인도 등 동양에서 포르투갈로 실려오는 비단, 향료 등을 욕심낸
영국은 정식으로 전쟁을 벌이지는 못하고, 해적질을 시작, 차츰 영국 해적은 유럽에 악명을 떨침.
영국 해적 가운데 가장 용맹을 떨친 사나이는 프랜시스 드레이크(1540~1596), 귀족 작위를 받음.
에스파냐 무적함대와의 전쟁,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영국 해군 사령관에 임명.
카디스에 집결한 에스파냐 대함대를 기습 공격,
1588년 에스파냐 150척 함대에 3만 명의 군대, 영국은 네덜란드 해군과 동맹하여 결전.
비거리가 넓은 최신 대포 갖고 있던 영국 함대에게 에스파냐 대함대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프랑스 칼레로 도주.
드레이크는 화공책으로 칼레항에 머무르던 에스파냐 군함을 불사름.
이 패배로 에스파냐는 바다의 왕자 자리에서 밀려나고 만다.
엘리자베스 1세는 영국이 해외 진출의 첫발을 디딘 셈.
1600년 동인도 회사, 무역 뿐 아니라 무력과 기술을 동원, 그 지역을 개발하여 철저히 착취하는 식민지주의의 앞잡이.
한 마디로 군대를 등에 업은 무역회사.
1585년 영국은 아메리카 버지지아 지방을 첫 식민지로 삼게 됨. 당시 106명이 이주하였으나 전원 사망.
1620년 청교도 102명이 메이 플라워 호를 타고 건나가면서 미국 이민의 역사가 시작.
아메리카 대륙에 손을 댄 에스파냐, 포루투갈 → 영국 → 네덜란드, 프랑스 등이 끼어듬.
아메리카 대륙에서 들어온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때까지 유럽에 없었던 담배, 감자.
엘리자베스 1세 여왕 당시 나라 안가 밖으로 번영이 계속되고 나라 살림이 윤택해지면서 영국의 문화는 크게 꽃을 피운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같은 작가가 태어난 것도 바로 이 시대.
1603년 1월 70세의 나이로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사망,
여왕은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를 후계자로 정함.
제임스 6세는 엘리자베스 1세와 5촌간인 메리 스튜어트 스코틀랜드 여왕의 아들.
메리 스튜어트의 외할머니가 헨리7세의 딸이자 헨리 8세의 누이인 마가렛.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 젖먹이로 스코틀랜드 여왕이 됨.
어머니가 프랑스 공주라 프랑스에서 프랑스인으로 자람. 프랑스 황태자와 결혼하여
스코틀랜드 여왕 + 프랑스 왕비가 되었으나 남편 프랑소아 2세가 결혼하자마자 사망,
프랑스 왕비 자리에서 밀려나 스코틀랜드로 돌아가게 됨.
스코틀랜드에서 귀족 단리 경과 결혼하였으나 이탈리아 음악가 리치오와 사랑에 빠짐.
단리와 대신들은 메리 여왕의 눈앞에서 리치오를 찔러 죽임.
메리 여왕은 미남 귀족 보스웰 백작과 싸고 남편 단리를 죽인 다음 석 달 뒤 보스웰 백작과 결혼.
이에 친구, 주변 사람들이 메리에게 등을 돌리게 되고, 반란군에 잡혀 감옥에 갇힘.
극적으로 스코틀랜드를 탈출, 영국으로 도주. 엘리자베스 여왕 보호 밑에서 편안한 생활 가능해짐.
가톨릭 교도들은 메리 스튜어트를 꾀어 엘리자베스를 처치하고 가톨릭 세력을 펼치려 함.
음모가 발각되고 19년 동안 창살 없는 감옥에서 보내게 됨.
에스파냐와의 전쟁의 먹구름이 끼던 1587년 영국의 몇몇 대신의 음모, 가짜 편지, 도끼의 이슬로 사라짐.
제임스 6세 = 영국 제임스 1세, 튜더 왕가에 이어 스튜어트 왕가의 시대 시작.
제임스 1세는 왕관을 쓰자마자 성공회, 가톨릭, 청교도 세 교파의 아우성이 시달리게 됨, 융화 계획 실패.
제임스 1세의 청교도 탄압이 계속되자 일부 청교도들이 1620년 메이 플아워 호로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건너감.
1618년 30년 전쟁, 의회 해산, 의회와의 계속되는 갈등.
1625년 스코틀랜드에서 온 제임스 1세 사망,
찰스 왕자가 찰스 1세로 왕위에 오름, 왕과 의회의 싸움,
1628년 권리 청원, 버킹엄 공작(삼총사에 나오는 영국이 세력가) 암살당함.
8년간에 걸친 왕당파와 의회파 사이 내란, 당시 영국의 의회 의원 대부분이 청교도들이었기 때문에
이 사건을 청교도 혁명이라고 한다. 이때 의회의 군대를 이끈 훌륭한 지휘자가 올리버 크롬웰(1599~1658)
크롬웰은 2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런던에 진격, 의회 세력을 무력으로 누르고 권력을 장악.
찰스 1세는 포로로 잡혀 있던 왕궁을 탈출, 왕당파 잔존세력과 스코틀랜드의 지원 아래 군사를 일으킴.
올리버 크롬웰은 의회와 손잡고 왕의 군대를 격파, 의회에서 사형 선고, 1649년 영국 역사상 처음으로 왕의 사형 집행.
1215년 마그나 카르타, 1485~1603 튜더 왕가의 절대 왕권 시대, 1649년 찰스 1세 사형.
찰스 1세 죽음으로 영국은 왕을 모시지 않는 역국 역사 처음이자 마지막인 자유공화국 시대 열림,
사실상 권력을 쥔 올리버 크롬웰의 독재 정치 시작.
1658년 크롬웰 사망 후 왕을 모시는 나라로 돌아감.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 독재정치, 크롬웰 시체의 목을 잘라, 사형장 교수대 밑에 묻어버림.
찰스 2세의 후계자 제임스 2세를 지지하는 왕당파와 반대하는 자유파로 갈라져 다투게 됨(영국에 정당이 생긴 내력.)
왕당파 → 토리당, 보수당, Vs 자유파 → 휘그당, 자유당
1차대전후 자유당은 자취를 감추고 노동당이 그 세력을 키워 보수당과 함께 영국 2대 정당으로 활약.
1685년 찰스 2세 사망, 제임스 2세 왕위에 오름, 외로운 독재자.
그의 딸 메리는 테덜란드 총독 윌리엄 공과 결혼, 윌리엄 공은 가톨릭편이 되는 영국에 반대,
영국 의회는 윌리엄 공과 메리에게 영국의 왕이 되줄 것을 권하여
1688년 윌리엄 공은 네덜란드 군대를 이끌고 영국에 상륙, 런던을 향해 진격, 제임스 2세는 프랑스로 도주.
이 사건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권력자가 바뀌었다고 해서 '명예 혁명'이라고 함.
의회는 1688년 윌리엄 3세에게 권리 청원 제출, 1689년 정식으로 영국의 법으로 선포,
이를 권리 장전이라고 하며, 이를 통해 입헌 군주국의 바탕을 완전히 굳히게 됨.
윌리엄 3세의 뜻으로 1701년 왕위 계승 순서를 정하는 법이 생김.
윌리엄 3세의 뒤를 이은 앤 여왕은 1702~1714년 12년 동안 왕위, 영국과 스코틀랜드가 합쳐 정식으로 대브리튼 왕국이 탄생.
유니언 잭, 국기도 스코틀랜드와 영국 국기가 합쳐진 그림.
훌륭한 수상, 대륙과의 전쟁에서 영국을 구한 윌리엄 피트(대 피트) 수상,
나폴레옹의 침략으로부터 영국을 지킨 젊은 피트(소 피트),
영국을 세계 제일의 대제국으로 끌어올린 디즈레일리, 글래드스턴 수상,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지도자로 승리한 윈스턴 처칠 수상
영국인들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뿌리 깊은 전통을 지키고, 갑자기 모든 것을 한꺼번에 뒤엎는 혁명을 반기지 않는 국민성을 갖고 있어, 역국 역사에는 프랑스 대혁명과 같은 엄청난 대변화와 진통이 없고 전쟁은 있었지만 침착하고 조용한 가운데 낡은 것을 조금씩 조금씩 고쳐왔던 것.
빅토리아 영왕(재위 1837~1901년) 열강들의 식민지 따먹기 경주가 가장 심했던 때.
차지한 식민지 크기가 본토의 거의 100배가 될 정도 세계 최강의 대영 제국 건설.
제2차 세계 대전 후 대영 제국도 서서히 기울기 시작.
하지만 브리티시 커먼웰스, 영국 연방이라는 기구는 영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53개국의 모임, 옛 영국의 영토였거나 식민지였던 나라들이 독립한 다음에도 서로간의 친목과 이익을 도모하는 모임, 53개 회원국에 세계 인구 1/4인 10억 인구가 이에 속하니, 그 지도 국가인 영국을 무시하기 어렵다. 형식적이긴 하지만 영국 연방 53개 나라들이 영국 여왕에게 충성, ㅡ 가운데 13나라는 영국 여황을 국가 원수로 모시고 있다.
트라팔가 해전에서 나폴레옹 함대를 격파한 넬슨 제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