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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배상태의 ‘돌아가는 삼각지’

jimie. 2025. 4. 2. 08:54

 

[차상우의 가요문화 산책] 작곡가 배상태의 ‘돌아가는 삼각지’ 上

 

통일신문 | 기사입력 2008/05/27 [09:30

 

비오는 날 쓸쓸한 삼각지 … 가수는 가고 노래만 남아
 
 
작곡가 배상태 씨를 말할 때 가수 배호를 빼고 말 할 수 없다. 따라서 가수 배호를 말할 때도 당연히 작곡가 배상태 씨를 빼고는 절대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절창의 가수 배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벌써 고인이 된지 35년이 지났지만 그는 영원한 국민가수로 우리 가요사에 큰 족적을 남긴 채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다. 어떻게 가수생활 7년 만에 그 수많은 불후의 명곡을 남겼을까.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작곡가 배상태 씨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작곡가 배상태 씨의 작품세계와 배호의 명곡 ‘돌아가는 삼각지’의 노래사연을 소개한다. 작곡가 배씨는 예인의 고장 경북 성주에서 태어났다. 성주를 예인의 고장이라 부르는 데는 배씨를 비롯해 ‘나그네 설움’을 부른 백년설, ‘해운대 엘레지’를 부른 손인호, 작사가 박대림, 작곡가 이병주, 가수 도성아 씨 등 가요계 내노라하는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고장이기 때문이다.
 
그는 1956년 대구 KBS에서 전속가수로 연예계 첫발을 내딛은 실력파 가수 출신이다. 서라벌예대 1기로 작곡에 대한 수업을 체계적으로 쌓았고 59년 해병대 고적대 1기로 입대하여 군복무중 틈틈이 작곡한 작품들을 장교가 아닌 일반 사병의 신분으로 1962년 9월 가수 송춘희 씨를 통해 ‘송죽부인’ 등을 발표하여 세간의 화제를 낳기도 했다.
 
그 후 군복무를 마치고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준비할 즈음 우연히 버스 안에서 배호가 부른 ‘두메산골’을 듣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가 오선지에 그려놓은 작품세계가 바로 배호 같은 목소리와 호소력을 지닌 가수를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배씨는 곧바로 ‘두메산골’의 작품자를 수소문하여 배호를 찾아간 곳이 당시 종로에 있던 궁전카바레였다.
여기에서 당시 배호는 드럼 연주자로 일하고 있었다. 생계수단으로 그의 작은 외삼촌인 작곡가 김광빈 씨에게 노래를 부탁했고, 김광민 씨는 작사자 반야월 씨에게 가사를 부탁해 취입을 하게 되었던 것이 두메산골이었던 것.그 사실을 알게 된 작곡가 배상태 씨는 그런 배호를 적극적으로 돕기로 결심하고 음반 취입을 준비하게 된다.
 
작품소재에 고심을 하던 배씨는 해병대 군복무 시절 군용열차를 타기 위해 동료들과 함께 자주 만나던 장소가 있었다. 그 곳은 용산역이 가까운 삼각지 부근 어느 조그만 술집이었다. 술집이래야 겨우 김치 몇 조각이나 부침개 하나 붙여놓고 막걸리 몇 잔 마시는 정도의 대포집 수준이었지만 그 아주머니의 넉넉한 인심과 추억이 묻은 곳이라 제대 후에도 가끔씩 들리곤 했는데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어느 날도 추억을 회상하며 그 곳을 찾아가 혼자 술잔을 몇 잔 비우고는 그 술집을 빠져나왔다.
 
그날따라 그 삼각지 로터리가 그렇게 쓸쓸했을까. 그 취기에도 불구하고 악상을 떠올리며 써내려간 노래가 불후의 명가요 ‘돌아가는 삼각지’였다. 이때가 64년 10월이었고, 이듬해 2월에 취입을 하니 이때가 배호의 나이 불과 23세였다. 당시 이 노래가 빅히트 하면서 화제가 되었던 것은 정상의 가수들의 음색이 미성이었고 대개 미8군 출신 가수들이어서 리듬 또한 경쾌하고 밝은 노래였다. 이에 비해 배호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허스키 하면서 쥐어짜는 듯한 호소력을 지닌 절창의 가수였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젠 세월도 변해 가요사의 한 페이지로 장식되고 있는 이 노래는 삼각지 로터리와 함께 역사 속에 묻혔고 2000년 1월 13일에 건립된 노래비만이 현재 삼각지 전철역내에서 그날의 인기를 실감케 하고 있다.

<저작권자 ⓒ 통일신문

 

[차상우의 가요문화 산책] 작곡가 배상태의 ‘돌아가는 삼각지’中

통일신문 | 기사입력 2008/06/04 [11:58]

 

배호와 영원한 이별가가 되어버린 ‘마지막 잎새’
 
 
1966년 작곡가 배상태씨는 무명에 가까운 신인가수 배호를 통해 ‘돌아가는 삼각지’를 히트 시키고 그해 8월 성급히 또 한곡을 준비하여 히트시키니 그 곡이 불후에 명가요 ‘안개낀 장충단공원’이다. 이 곡이 발표되면서 배호는 당시 최고 인기 가수였던 최희준, 남일해, 위키 리와 같은 정상급 가수 대열에 우뚝 섰다.
 
작곡가 배상태씨 역시 히트제조기라는 애칭과 함께 당시 백영호, 박춘석씨 이상의 명성을 떨치며 인기 정상의 가수들이 그의 곡을 받기위해 앞 다투어 줄을 섰을 정도였다. 당시 그의 곡을 받았던 가수들을 살펴보면 그 시절 여자 배호라 불리던 강소희도 ‘계곡의 등불’, ‘뻐꾹새 우는 마을’로 주가를 올렸고, 만년 오빠였던 미남가수 남진씨도 ‘그 세월’, ‘그 소식’, ‘애교로 봐주세요’ 등을 불렀다. 김용만의 ‘웃고 삽시다’ 박재란의 ‘사랑의 밀어’, 위키 리의 ‘갈잎’, 이미자의 ‘새벽 정거장’, 박일남의 ‘하동 아줌마’ 등을 작곡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국민가수 현철씨도 1967년도 태현철이란 이름으로 최치수 작사, 배상태 작곡 ‘울릉도에서 맺은 사랑’을 불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 무렵에 배호는 배상태씨와 콤비로 ‘능금빛 순정’, ‘그 이름’, ‘황토 십리길’, ‘울고싶어’ 등 수많은 곡을 히트시키며 MBC를 비롯한 각 방송마다 10대 가수상을 휩쓸었고 그의 음반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그러다 보니 레코드사마다 배호 모시기 경쟁이라도 하는듯 했고 그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극장쇼가 흥행하던 그 시절 배호는 최고의 몸값을 자랑하며 서울은 물론 전국에서 출연 요청이 쇄도했지만 하루도 쉬지 않고 전국을 돌며 출연했다. 그러다보니 배호의 몸에 적신호가 찾아왔다. 작곡가 배상태씨의 말에 의하면 1965년도에 처음 배호를 만나기 위해 궁전카바레를 찾아갔을 때에도 이미 신장염을 앓고 있었다고 한다.
 
그럼 여기에서 독자들과 팬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배호의 가족관계를 잠깐 짚어보자. 배호는 본래 그의 아버지 배민국씨가 독립투사였던 관계로 중국 재남에서 4대독자로 태어났다. 초명은 배신웅이었으며, 집안에 손이 귀한 탓에 만금이라고도 불렀다. 해방 이후 중국에서 나와 6·25때에는 외가인 부산에서 오래 살았다. 고등학교 시절 가족이 서울로 이사를 해 대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의 외가에는 음악을 하는 외삼촌이 두 분 계셨는데 큰외삼촌은 전 KBS 초대 악단장을 지낸 피아니스트 김광수씨이고 둘째 외삼촌이 연주인이자 작곡가인 김광빈 씨이다. 훗날 그는 배호를 타고난 가수라고 극찬을 했지만 당시 배호는 홀어머니와 누이동생의 생계까지 책임져야 할 처지에 신장염을 앓고 있었지만 자기 몸을 제대로 돌볼 여유가 없었다. 배호가 최고의 스타로 군림하며 6년째가 되던 해 1972년 가을이 채 오기 전에 작곡가 배상태씨는 ‘마지막 잎새’란 운명적인 곡을 만들고 있었다.
 
배호의 몸은 과로로 인해 합병증까지 겹쳐 장기간 요양이 필요했지만 그는 무대에서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팬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갔다. 그러자 ‘마지막 잎새’를 녹음할 때도 그는 가누지 못할 몸을 안고 찢어지는 듯한 절규로 녹음을 마쳐 그를 지켜보던 녹음 관계자들까지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그해 가을, 마침내 이 노래가 막 방송을 시작할 쯤 배상태씨의 집에 전화가 한통 걸려왔다. 배호의 건강이 악화되어 더 이상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의사의 진단에 따라 병원 측으로부터 퇴원절차를 요구받았다는 배호 가족의 청천벽력 같은 전화였다.
 
배씨가 황급히 택시를 타고 달려 간곳은 연대 세브란스병원이었으며 병원에 도착 했을 때 그의 작은 외삼촌인 작곡가 김광빈씨가 와있었으며 퇴원절차는 거의 끝낸 상태였다. 배 씨와 그의 작은외삼촌인 광빈씨는 좌절에 빠진 그의 어머니를 위로하기에 급급했고 잿불처럼 꺼져가는 그의 몸을 실은 앰뷸런스는 11월의 찬바람을 가르며 어느 듯 그의 자택이 있는 미아리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앰뷸런스가 미아삼거리에 도착했을 때 그는 작은 외마디 비명을 남긴 채 숨을 거두었다 가수생활 7년 동안 350여곡을 남겨놓고 그는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간 것 이였다.
 
그때가 1972년 11월 9일 밤 9시였다. 이튿날 각 신문방송마다 그의 죽음을 알리는 충격적인 뉴스가 그를 사랑하는 팬들의 마음을 슬프게 했고 ‘마직막 잎새’는 우수에 젖은 듯한 그의 목소리로 마치 추모가처럼 울려 퍼졌다. 가수협회장으로 장례를 치른 영구차는 애도의 물결을 뒤로하고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신세계 공원묘지로 향했다.
 
그로부터 35년이 지났지만 그의 인기는 식을 줄 모르고 ‘배호 추모가요제’, ‘배호가요제’, ‘배호 트로트가요제’ 등으로 그의 가요혼에 불을 지피고 있다. MBC TV 여론조사에서 좋아하는 가수 1위를 차지했고 조선일보가 건국 이후 음악전문가 여론조사 에서 가수50명 중 6위로 선정되었으며 ‘돌아가는 삼각지’ 이후 2002년 그의 묘지 앞에 ‘두메산골’ 노래비가 건립되었다.
 
2003년 6월22일 경주시 현곡면 소재 ‘마지막 잎새’ 노래비가 건립되었고 그해 7월 12일 강릉시 주문진에 그의 히트곡 ‘파도’가 노래비로 건립되었으며 2003년 10월20일 정부로 부터 옥관문화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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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상우의 가요문화 산책] 작곡가 배상태의 ‘돌아가는 삼각지’下

통일신문 | 기사입력 2008/06/16 [09:36]

 

작곡가 배상태, 제2의 배호 찾기에 분주
 
약관의 나이에 드럼을 두드리며 예술혼을 불태웠던 배호는 작곡가 배상태 씨를 만나면서 부터 한국가요사를 다시 써야할 만큼 큰 족적을 남기고 1972년 11월 9일 밤9시에 세상을 떠났다. 올해가 벌써 36년째이다. 그러나 그의 노래를 사랑하는 팬들은 배호 추모가요제, 배호 가요제, 배호 트로트 가요제 등 그를 기리는 가요제가 하나둘이 아니다.
 
아직도 팬들은 그가 살아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현재 유명 작사·작곡·가수 등 그들의 업적을 기리는 가요제가 전국에 많이 있다. 그러나 일 년에 딱 한번 치르는 행사도 어려운데 배호 가요제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것을 보면서 그는 분명 마력을 지닌 위대한 가수임엔 틀림없다는 생각이 새삼 든다.
 
그러나 지금도 팬들이 늘어나고 있는 데는 반드시 그 가수가 노래를 잘해서 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가수가 아무리 노래를 잘 불러 많은 히트곡을 남겼다 하더라도 이미 작사 작곡자의 예술혼이 먼저 담겨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노래는 그 가수가 좋아서 부르는 게 아니라 그 노래 자체가 좋아서 애창곡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배호의 평가만큼 작곡가 배상태 씨의 작품세계를 먼저높이 평가해야 된다고 본다. 물론 배호의 노래 전곡이 배상태 씨 혼자만의 작품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수많은 불후의 명가요가 그의 작품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그의 지도아래 전설적인 배호가 탄생 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선 그의 작품엔 그가 고집하는 철학이 있다. 필자도 한때 필자의 가사에 배상태 씨가 곡을 붙여 음반으로 출시한 작품이 몇 곡 있다. 그때 그 작품을 통해서 그의 작품 세계를 잠시 엿볼 수 있는데 그의 작품은 무엇보다 스케일이 크고 많은 변화를 요구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제대로 소화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둘째로 자기작품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강해 정도가 아니면 타협이 안 되는 집념이 강한 작곡자이다. 예를 들어 어떤 가수가 연습을 할 때 음이 너무 높거나 낮아 조금만 양보하면 쉽게 할 수 있을 것도 그렇게 하는 것은 가수에게나 작품을 위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시간이 걸리더라도 완벽을 요구하는 그의 모습에서 대가의 프로정신을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 필자가 배씨의 집을 방문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무뚝뚝한 경상도 말씨와는 달리 대문 밖에까지 미리 나와 기다려 주는 자상함에 새삼 인간미를 느꼈다. 거실에서 차를 마시면서 요즘 가요계를 보는 소감을 물었더니 가요는 대중에게 가장 예민한 장르인데 너도나도 신명나는 노래만 불러 깊이 있는 노래를 들을 수 없어 아쉽다고 했다. 그러면서 가요는 장르를 막론하고 인생사를 담는 그릇 같아서 의도하는 내용을 충실히 담아 가수가 잘 소화해 냄으로써 대중이 평가하는 것인데 요즘의 가수나 작품자들은 톡톡 튀는 가사에 율동위주로 하다 보니 우리전통가요의 질이 떨어질까 염려 된다고 했다. 또 배호 얘기가 나오자 “요즘 같으면 살릴 수 있었을 텐데”하며 못내 아쉬워하고 그는 100년에 한번 나오기 힘든 가수라며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헤아려 소화해 내는 타고난 가수였다고 지난날을 잠시 회상하기도 했다.
 
이제 그를 떠나보낸 지 36년째, 세월도 많이 흘러 이젠 가요계 원로로써 후배양성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몇 해 전에는 강원민방 GTB 가요열창 프로에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프로의 질을 높였고 배호 추모가요제를 13회나 열어오면서 새로운 목소리 발굴에 정열을 쏟고 있다. 그 결과 가수 박진권씨의 ‘내가 먼저 그린 그림’, ‘영농의 사나이’를 출시했고 가수 박철 씨 에겐 ‘미움’과 ‘검은 장미’를 각각 출반해 선보일 예정에 있어 그의 개성 있는 작품에 진면목을 다시 한번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저작권자 ⓒ 통일신문 

 

 

'돌아가는 삼각지' 배상태 작곡가 별세

윤수정 기자

입력 2025.03.29. 01:35업데이트 2025.03.29. 03:48

‘돌아가는 삼각지’(1967), ‘안개 낀 장충단 공원’(1967) 등 가수 배호의 히트곡을 다수 만든 작곡가 배상태(86)씨가 지난 26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28일 가요계와 유족은 고인이 패혈증과 만성 신부전증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전했다.

 

경북 성주 출신인 고인은 1956년 대구 KBS 전속 가수로 가요계에 처음 발을 디뎠다. 1965년 노래 ‘송죽부인’(가수 송춘희)으로 작곡가로 데뷔해 가수 배호와 ‘콤비’로 재능을 꽃피우기 시작했다. 큰 인기를 끈 대표곡 ‘돌아가는 삼각지’와 ‘마지막 잎새’는 각각 가사에 등장한 서울 삼각지와 경북 경주에 노래비가 세워졌다. 고인은 이 밖에도 김상희의 ‘서울의 버스 차장’, 남진의 ‘그 세월’ 등 당대 인기 가수들의 노래 작곡을 이어갔다. 2016년 대중문화예술상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유족으로 아내와 1남 2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 강동성심병원, 발인은 30일 오전 8시.

 

윤수정 기자  문화부

대중음악에 대해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