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8. 27. 06:11ㆍWonderful World
영암산에서 본 선석산 (禪石山742m,성주 월항) 정상
태봉암
선석산 용바위, 세종대왕자 태실이 보인다
선석산 태봉바위에서 조망한 성주분지.
비닐 하우스로 뒤덮인 '성주 참외' 농업단지
멀리 성주 가야산...
선석산 태봉(태실입구)
원래는 1438년 (세종20년)에서 1442년까지 수양대군을 비롯하여 세종의 적서 18왕자와 단종등 20여기의 태실이 있었으나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이에 반대하여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죽은 금성대군과 한남군,영풍군,화의군 및 안평대군의 태와 장태비는 1457년(세조3년) 태봉아래로 파내어 쓰러뜨려졌다.
세종대왕자태실은 성주군 월항면 선석산 아래 태봉(胎峰) 정상에 있으며, 세종의 적서(嫡庶) 18왕자와 세손 단종의 태실 등 19기가 군집을 이루고 있다. 태실은 왕실에 왕자나 공주 등이 태어났을 때 그 태를 넣어두던 곳을 말한다.
전체 19기중 14기는 조성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한 다섯 왕자의 태실의 경우 방형의 연꽃잎이 새겨진 대석을 제외한 석물이 파괴되어 남아 있지 않으며, 세조 태실의 경우에는 즉위한 이후 특별히 귀부를 마련하여 가봉비(加封碑)를 태실비 앞에 세워두었다.
조선 세종 20년(1438)에서 24년(1442)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태봉은 당초 성주이씨의 중시조(中始祖) 이장경(李長庚)의 묘가 있었는데 왕실에서 이곳에 태실을 쓰면서 그의 묘를 옮기고 태를 안치하였다고 한다. 한편 1977년 태실에 대한 보수시 분청인화문대접·뚜껑, 평저호 및 지석(誌石) 등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세종대왕자태실은 조선초기 태실형태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며 우리나라에서 왕자태실이 완전하게 군집을 이룬 유일한 예라는 점, 그리고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교체와 함께 왕실 태실 조성방식의 변화 양상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성주세종대왕자태실 →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세종대왕자 태실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산8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선석산 아래의 태봉에 위치한 조선시대의 태실이다. 세종의 왕자들 중에서 문종을 제외한 18명의 왕자와 원손 단종의 태실 등 19기의 태실이 군집을 이루고 있다.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은 1975년 12월 30일에 경상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88호로 지정됐다가 2003년 3월 6일에 사적 제444호로 승격지정됐다.
1438년(세종 20년)에서 1442년(세종 24년)에 조성되었다. 19기의 태실 중 5기는 훼손되어 있는데 이는 수양대군이 왕위에 올랐을 때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반대한 안평대군, 금성대군, 한남군, 영풍군, 화의군 다섯 명의 왕자들의 태실이며 수양대군이 즉위하면서 다섯 명의 태실을 파괴하라 명했기 때문에 훼손되어 있다. 즉위 후 세조 태실에는 별도의 가봉비를 태실비 앞에 세웠다.
그리고 성주는 세종대왕자 태실 외에도 용암면에 태종태실과 가천면에 단종태실이 있어 태실의 고장이라 평가받을 정도의 명당이었다. * 단종태실은 본래 세종대왕자 태실에 같이 봉안되어 있었다가 문종 대에 가야산 뒤쪽의 법림산으로 옮겼다.
한없이 그리웁고 아름다운 별고을 소년의 추억
소년이 어릴적 아련한 옛날에
//조선 세종임금이 온나라 안에서 명당을 찾기 위하여
한양에서 연(鳶)을 날렸더니, 경상도 별고을, 星州땅에 내렸더라~// ... 전설 따라 삼천리다.
선석산 (禪石山, 742.3m) 선석사 (禪石寺)앞에는 태봉(胎峰)이 솟아 있는데
고향 성주 초전국민학교시절, '선석사.태봉'은 학교에서 가까운 명소 탓인지
봄가을에 단골 소풍장소로 원족을 가서 보물찾기 하던 아름다운 추억이 어린 자리...
사진속 태실은 반갑게도 그 옛날 그 모습 그대로...
태봉에서 조망하면 가까이는 인촌못이, 앞으로는 성주분지의 넓은 들이 펼쳐지며
멀리 가야산이 안산으로 들어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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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태실 전체가 석제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는데, 원래는 없었다(위의 사진 참조).
석제 울타리가 나에겐 어울리지도 않고 흉물스럽다. 그건 복원이 아니다.
역사적 문화유산은 원형을 그대로 유지 보존 관리하는 것이 지극히 적당한 기본일 터이다...
*원래 태실 부근에 성주이씨 중시조, 이장경의 묘가 있었으나, 조선조에 태실이 안치됨에 따라 이장하였다는...
성주이씨 11대 중시조, 이장경(李長庚)은 고려 고종 때의 인물로
슬하에 다섯 아들 이백년(李百年), 이천년(李千年), 이만년(李萬年),이억년(李億年), 이조년(李兆年) 이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명성을 떨치자 국왕은 그를 경산부원군(京山府院君)에 봉하였다. ( * 京山, 星山은 성주의 옛 이름)
* 이조년의 손자인 이인림의 육형제도 모두 과거에 급제했다.
충렬왕 이후 성주목(星州牧)의 지명을 따라 성주 이씨(星州李氏)라고 칭하게 되었다.
성주에는 세 곳의 조선왕가 태실지가 있다.
용암 태봉의 태종 태실(사진 좌하), 월항 태봉의 세종대왕자 태실(사진 상), 가천 태봉의 단종 태실(사진 우하)
*선석산(禪石山) 산골에 솟아오른 태봉(胎峰)은 육산(肉山 : 흙산, 土山 )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선석산 (禪石山, 742.3m) 선석사 (禪石寺)앞에 자리한 월항 태봉(胎峰) 정상에는
(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산8)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 원손 시절의 단종 태실을 포함해 총 19기의 태실이 조성되어 있다
비석도 갖추지 못한 채 파손된 화의군 태실 뒤로, 세조 태실의 <가봉비>가 세워져 있다
세조의 가봉 태실비,
예조에서 별도의 길지로 옮겨 태실을 조성할 것을 상소했으나
세조는 이를 물리치고, 태실비만 새로 세울 것을 지시했다고..
"세종대왕자태실 "생명문화공원
주소: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산8
조선 제4대 세종대왕의 큰아들인 문종을 제외한 18왕자의 태실과 원손인 단종의 태실 등 19기가 모셔져 있다.
* 단종이 세자로 책봉된 후 석물은 남기고 태실은 성주군 가야산 법림산(가천면 법전리)으로 이전.
*세조는 태실을 옮기지 않고 왕이 되었다는 표시로 가봉비를 세웠다.
(*세종대왕은 6명 부인과의 사이에 22명의 자식들을 두었다. )
* 태종은 즉위년에 태항아리를 함경도에서 성주 용암태봉으로 옮기고 경산부를 성주목으로 승격시킴.
세조 즉위에 반대하였던 다섯 왕자(안평대군, 금성대군, 한남군, 영풍군, 화의군)의 태실은 석물이 파괴되어 남아 있지 않다.
예로부터 태는 생명의 근원으로 소중히 다루었는데, 왕족의 경우 국운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 전국 명당에 태항아리를 안치하였다.
세종대왕자태실은 유일하게 온전히 군집을 이룬 형태로 규모나 가치면에서 으뜸이며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성주 12경 세종대왕자태실
https://www.youtube.com/watch?v=npG9xRpO3bw&t=1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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