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5. 28. 06:40ㆍThe Story from Me
The Story from Me
2020. 4. 15.
금오산(金烏山)은 고려 때 ‘남숭산(南嵩山)’이라 했는데
중국 오악 중 하나인 유명한 숭산(嵩山)과 생김새가 흡사하여 숭산(嵩山)이라 명명하게 됐다.
그래서 남쪽에 있다 해서 남숭산(南嵩山)이라 하고 황해도 해주에 북숭산(北嵩山)을 두게 되어
남북에 숭산이 하나씩 있게끔 했다.
금오산 전설(金烏山 傳說) 삼의인(三宜人)
금오산(金烏山)은 경상북도 구미시 남통동과 칠곡군 북삼읍, 김천시 남면에 걸쳐 있는 높이 977m 바위산인데, 800m 고지 산정에는 고산분지(高山盆地)가 형성되어 있어서 항상 물이 풍부하니 옛날에는 40여호 마을이 자리하고 있었던 곳이다.
이중환(李重煥;1690~1752)의 <택리지(擇里志)>에서 “조선인물의 반은 영남에서 나오고, 영남인물의 반은 선산(善山)에서 난다.” 는 기록이 있듯이. 예로부터 금오산 주위에서 인물이 많이 나왔다. 근래에도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상모)와 박근혜가 있고, 국무총리를 역임한 신성모(인동), 장택상(북삼), 신현확(약목), 이수성(칠곡) 등이 이곳 출신이다.
금오산에는 산세(山勢)에 따른 흥미로운 설화(說話)가 있다.
금오산 동북쪽 선산(善山)에서 보면 그 산세가 붓끝처럼 보여 ‘필봉(筆峰)’이라 하는데, 그래서 선산 주위에서는 문장과 학문으로 이름난 사람이 많이 났고,
남쪽 칠곡 북삼에서 보면 귀인이 정자관을 쓴 것 같아서 ‘귀봉(貴峰)’이라 하는데, 예로부터 높은 벼슬아치가 많이 나왔으며,
서북쪽 금릉 개령(김천 남면)에서 보면 도적이 짐을 지고 내려오는 형상이라 하여 ‘적봉(賊峰)’이라 하는데, 그래서 이곳에서 큰 도적과 민란이 자주 일어났다고 하고,
서쪽 금산군(김천시)에서 보면 노적까리를 쌓은 것 같이 보여 ‘적봉(積峰)’이라 하여 그래서 이곳에서 큰 부자가 많았다고 하고,
남서쪽 성주에서 보면 이 산이 음탕한 여인 모습 같다고 하여 ‘음봉(陰峰)’이라 하는데, 그래서 성주 기생이 이름났다고 한다.
이 산은 본래 대본산(大本山)이였는데, 신라불교를 전파한 고구려 승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세발금가마귀(三足金烏)가 날아드는 것을 보고 신령한 태양산이란 뜻의 금오산(金烏山)으로 그 이름을 바꿨고, 이 산의 남쪽 마을에서 앞으로 나라를 구할 3명의 의인(三宜人)이 나타날 동방의 길지(東邦吉地)다.” 라고 지칭했다는 것이다.
지금 전해오는 숭산마을 촌노들의 구전(口傳)에 의하면 “숭양산(崇陽山) 효자봉(孝子峰)" 아래 ‘금오산삼의인설화(金烏山三宜人說話)’의 첫 번째 의인은 중국 명(明)나라를 건국한 홍무제(洪武帝) 주원장(朱元璋)이고, 두 번째 의인은 한민족 5천년 가난을 해결해 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고, 마지막 세 번째 의인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는데 나타나기를 가다리고 있다.“ 라는 것이다.
▲ 효자봉 능선.
동방길지(東邦吉地)인 금오산(金烏山) 주봉 현월봉에서 동남쪽으로 뻗어 내린 도수령 맥을 이곳 사람들은
숭양산(崇陽山) 또는 수양산(首陽山)이라 한다. 숭양산의 주봉이 효자봉(孝子峰)이다.
영상 가운데 푸른 산봉우리가 숭양산(崇陽山) 효자봉(孝子峰,;528m)이다.
숭양산 효자봉 좌측(동북향)으로 뻗은 산줄기 아래가 구미시 상모리(上毛里)로 박정희 탄생지이고, 숭양산 효자봉 우측(동남향)으로 뻗은 산줄기 아래가 고려 대각국사 은거지 선봉사가 있었던 칠곡군 북삼읍 숭산리(崇山里)로 주원장 탄생지이다.
'금오산 삼의인 설화(金烏山三宜人說話) '의 세 번째 의인(宜人)은 이 산줄기 어디메 마을에서 나타날까?
▲ 오른쪽이 칠곡군 북삼읍인데 산 아래동네는 북삼 숭산(崇山)마을이다.
첫째 의인(宜人) 숭산(崇山) 출신 주원장(朱元璋)
예부터 경상도 금오산 숭산(崇山)마을에서 내려오는 전설적인 설화(說話)가 있다. 금오산 삼의인(金烏山 三宜人) 첫째 의인은 금오산 줄기 숭양산 효자봉 아래 고려 선봉사(僊鳳寺)가 있던 숭산(崇山)마을 의 가난한 농부 집에서 태어나 스님이 되어 전국을 탁발하고 다니다가 노예상인에게 중국 원나라로 잡혀가 반원봉기(反元蜂起)의 홍건적이 되고 두목이 되어 마침내 명(明)나라를 건국한 명(明)태조 주원장(朱元璋;제위 1368-1398)의 이야기다.
명(明) 태조 홍무제(洪武帝) 주원장(朱元璋) 초상화.
// “주원장은 금오산 줄기 숭양산 남쪽 골짜기의 가난한 주씨(朱氏) 부부의 아들로 태어나 5살에 스님을 따라 청송(靑松) 주왕산 어느 절로 가서 탁발승이 되었다. 어려서 부터 민첩하고 영특한 주원장은 15살에 속세로 나왔고 전국을 탁발하다가 17세에 전라도 나주(羅州) 근처에서 중국 원(元)나라 노예상인들에게 잡혀 중국으로 팔려갔다.
원나라에 팔려간 주원장은 홍건적(紅巾賊)의 졸개가 되었고, 함께 노예로 끌려간 추유(秋濡전라도 남원출신)등 고려 사람들과 죽을 힘을 다하여 용맹하게 싸웠다. 주원장은 어떤 강적을 만나더라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앞장서서 돌진했다.
주원장이 어려서부터 절에서 글을 배워 읽고 쓸 줄도 알고, 싸움에도 몸을 사리지 않아 홍건적 소 두목 곽자흥(郭子興;미상-1355년)의 눈에 들었다. 곽자흥은 원(元)나라 말기 농민반란 홍건적의 강회지구(江淮地區)의 두목이었다.
그가 싸울 때는 언제나 용감한 주원장을 자기 곁에 두었다. 얼마 후 주원장은 반란군의 중요한 장수가 되었고, 전공이 많아지자 중용되었다. 곽자흥이 남하하던 원군(元軍)을 격퇴시킨 후 부터 그의 군세가 커졌다. 그는 후에 주원장(朱元璋)을 휘하 총사령관으로 삼고, 곽자흥은 양녀 마수영(馬秀英)을 주원장에게 시집보내 사위로 삼았다.
서기1355년 3월 곽자흥이 병으로 죽자, 그의 세력 대부분이 주원장에게 계승되었다. 서기1370년 주원장은 반원군(反元軍) 최고지도자가 되었고, 곽자흥을 저양왕(滁陽王)으로 추봉했다. 주원장은 늙은 유생 주승(朱升)이 일러준대로 “담을 쌓고 식량을 비축하고 기다리면 서서히 왕으로 불리게 될 것이다.” 라는 뜻을 받아 지구전을 펴, 끝내 원(元)나라를 북방으로 몰아내고 명(明)나라를 건국해 명태조(明太祖) 홍무제(洪武帝)가 되었다."//
경상도 금오산 숭산(崇山)마을 노인들이 들려준 주원장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와 비슷한 내용으로 조선 후기의 야담집 『조선기문(朝鮮記文)』에서도 주원장 이아기가 나온다. "주원장은 경상도 웅천의 주씨 노부부의 아들로 5살이 되던 해, 고승을 따라 절에 들어갔다가 15세에 하산했으며 총명하고 민첩했다.“라고 적혀있다. 또 『조선민간전설집(朝鮮民間傳說集)』에서도 “주원장이 중국으로 건너가 나라를 세웠다.” 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로 미루어 명(明)태조 주원장(朱元璋)은 고려인으로 추정된다.
또한 그의 황후(皇后) 역시 ‘고려인 한영정(韓永矴, 韓確의 父)의 딸’로 기록되어 있고, 황후(皇后) 한씨(韓氏)는 명 제3대 황제 영락제(永樂帝;1360-1424)의 어머니가 된다. 또한 한황후의 동생 한계란(韓桂蘭; 恭愼夫人 韓氏;1410-1483) 역시 명 제5대 황제 선덕제(宣德帝;1399-1435)의 황후가 되었다고 하니, 고려 한영정(韓永矴)은 두 딸을 명나라 황후로 보낸 샘이 된다.
[주원장(朱元璋) 고려인설(高麗人說)]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는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실체를 놓고 한국과 중국의 학자간의 대립을 다뤘다. 1368년 명나라를 세운 초대황제 '주원장의 출생'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상당수의 한-중학자들에 의해 "주원장이 고려인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또한 주원장이 명태조가 된 그 후까지 그의 주변에는 유독 고려인이 많았다. 주원장의 여인들은 물론 황궁의 환관들과 궁녀들 주위 사람들은 모두 고려인으로 채워졌다.그의 심복이고, 명나라 건국공신,호부상서 추유(秋濡;1345∼1404)까지도 전라도 남원출신 고려인으로서 주원장은 그를 각별히 신임했다. 주원장의 고려인 우대 행정을 시샘한 한족(漢族) 대신들에게 미움을 사게 되니, 주원장은 한족(漢族) 대신들을 거의 다 죽이고 모든 분야를 친정했다. 그래서 중국 역사상 가장 포학한 황제로 주원장을 꼽는다.
명나라 제3대 황제 영락제의 친모가 고려인 한황후(韓皇后)였다는 사실이 ‘주원장 고려인’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명나라 제3대 영락제는 후에 티베트, 베트남, 만주 등을 평정하여 명나라 최대의 영토를 넓혔으나 조선은 오히려 우대하였던 그 속뜻을 지금의 우리가 어찌 알 수 있을까?
▲ 여염집같은 선봉사(僊鳳寺).
경북 칠곡군 북삼읍 숭오(崇烏)리 마을에서 장산저수지를 넘어 금오산 남쪽 기슭 깊숙하게 숭오리 산 1번지에 자리하고 있는 선봉사는 고려시대에는 오히려 지금보다 더 훨씬 깊은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선봉사는 과거 영산의 기운이 감도는 남숭산(금오산)에 대각국사와 그의 제자들의 수도장이었을 만큼 명당이었다고 한다.
‘봉황(鳳)이 훨훨 춤춘다(僊)'는 뜻의 선봉사는 곧 '도인(道人)이 해탈했다'는 뜻이니 사명에서 도인들의 수행처임을 짐작할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 사찰이 완전 소실되고 폐사되어 버려 역사에서 사라질 뻔한 선봉사가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온 것도 역시 땅 속에 묻혀 있던 대각국사비가 300여년이 지난 1922년경에 발견되어 세상의 빛을 다시 보게 됨으로 인해서였다.
대각국사大覺國師(1055~1101) 비(보물 251)는 고려 인종 10년(1132)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임존林存이 짓고 승려 린麟이 썼다
▲ 칠곡 선봉사 대각국사비(漆谷僊鳳寺大覺國師碑). 보물 제251호.
대각국사비는 천태종 개조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 1055∼1101)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다.
대각국사(의천)는 고려 11대왕 문종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의천(義天), 시호는 대각(大覺), 이름은 후(王煦)다.
11살때 왕사인 경덕국사 밑에서 승려가 되어 구족계를 받고 영통사에서 배웠다.
1085년 송나라에 가서 계성사의 유성법사에게 화엄, 천태, 양종의 뜻을 배운뒤 여러절을 다니며 공부하였다.
1086년 귀국하여 개경 흥왕사 주지로 있으면서 교장도감을 두고 송나라, 요나라, 일본 등지에서 수집한 불경유서들을 4,700여권 간행하였다.
고려의 불교가 교종과 선종으로 갈라져 대립하던 때에 교선(敎禪) 일치를 주장하고 천태종을 개창하여 고려불교가융합하도록 만든 업적이 크다.
* 1천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어도 비문과 문양이 뚜렷하게 남아 보존상태가 양호한데, 비석의 재료가 백령도 부근에서 나는 바다 돌이기 때문이다. 바다 돌은 육지 돌과는 달리 철분이 적어 갈라짐과 부서짐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대각국사비에는 6·25전쟁 때 총에 맞아 부서진 자국을 제외하고는 말끔하다.
둘째 의인(宜人) 상모(上毛) 출생 박정희(朴正熙)
‘금오산 삼의인(金烏山 三宜人)’에서 둘째 의인은 금오산 줄기 숭양산 효자봉 왼쪽 아래 구미시 상모리(上毛里) 가난한 농부의 집에서 태어난 박정희(朴正熙; 대한민국 제5~9대 대통령)이다.
그의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그는 1917년 11월 14일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 117번지(현 경상북도 구미시 상모동 171)에서 부(父) 박성빈(朴成彬;1871~1938)과 모(母) 백남의(白南義;1872~1949) 사이에 5남 2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박정희의 초혼은 김호남(金好南;1920-1991)으로 장녀 박재옥(朴在玉;1937- , 韓丙起 부인)을 낳고 만주로 갔다. 1949년 이혼하고 김호남은 승려가 되었다. 그 후 육영수(陸英修;1925~1974)와 재혼하여 슬하에 박근혜(朴槿惠;18대 대한민국 대통령), 박근영(朴槿令), 박지만(朴志晩) 3남매를 두었다.
대한민국 제5~9대 대통령 박정희(朴正熙)
박정희는 1932년 3월 25일 구미공립보통학교(현 구미초등학교), 1937년 3월 25일 대구사범학교(현 대구교육대학교), 1942년 3월 25일 만주국육군군관학교, 1944년 4월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김호남과 결혼하고 3년여 동안 문경공립보통학교(현 문경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했다. 첫딸 박재옥과 부인 김호남을 두고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에 진학하고 다시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옮겨 졸업하고 육군소위로 임관되었다. 이듬해인 1945년 7월에는 중위로 승진했으나, 8월 15일 해방되기 며칠 전 중국으로 탈출하여 광복군에 배속되어 1945년 8월 29일 광복군 제3지대 소속으로 귀국하였다.
귀국 후 1946년 9월 24일 조선경비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하고 그해 12월 국방경비대 소위로 임관되었다. 그러나 1948년 11월 남로당 관련 혐의로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받았으나 주위 군 선,후배들의 노력으로 감형되고 다시 형 집행 정지로 풀려나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국방군 소령으로 복귀했다. 한국전쟁이 휴전상태로 돌입한 후 1958년 3월 1일 소장으로 진급하였다. 1960년 1월 21일 군수기지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부산으로 갔다.
자유당 말기 혼란한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그는 쿠데타를 모의했다고 한다. 그는 동래 온천장 별관 등에서 김동하, 이주일, 홍종철, 전두열 등의 군인들과 모의를 거듭하고,『부산일보』주필 황용주(黃龍珠)와 자주 만나 의논하기도 했다. 부산을 방문한 장도영(張都暎;1923~2012) 2군사령관에게 쿠데타 계획을 설명하고 협조를 요청하기도 했는데, 이때 장도영은 원칙적으로는 찬동하면서도 시기와 방법은 더 연구하자고 하였다. 그 후 박정희는 송요찬(宋堯讚;1918~1980) 육군참모총장이 미국으로 가는 1960년 5월 8일을 거사일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박정희의 쿠데타 계획은 3·15 부정선거 촉발로 학생, 시민들의 4·19혁명이 폭발하면서 무산되고 말았다. 4·19혁명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부는 전국 주요 도시에 비상계엄을 선포하니, 박정희는 부산지구 계엄사무소장을 맡게 되었다.
4월 26일 이승만의 하야 성명이 나오자 부산 전역이 데모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분노한 군중들은 몽둥이와 사이다 병으로 경찰서, 파출소, 자유당 의원 집, 자유당 사무실, 구청, 소방서, 반공 청년단 사무실 등을 모조리 파괴하였다. 일부 학생들이 시민에게 자제를 요청했으나 민중의 분노를 막을 수 없었다.
이에 박정희는 도청 앞으로 나와 “군(軍)은 데모를 보호하기 위해 나왔다.”, “이성을 잃지 말고 폭행과 파괴를 말자.”고 외쳤으나 시위는 더욱 강하게 번졌다. 시위가 격화되면서 군중들은 원정시위대를 조직하여 경상남도의 농촌지역과 마산지역까지 휩쓸었다.
제2 공화국 장면(張勉;1899~1966) 내각이 출범했지만 나라는 계속 기아와 혼란에 빠져 있었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는 5·16 군사정변을 감행하여 성공하였다.
1961년 7월 3일 박정희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취임하였다.
1963년 12월 17일 박정희는 제5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으며, 1967년 7월 1일 제6대 대통령, 1971년 7월 1일 제7대 대통령, 1972년 10월 17일 유신헌법(維新憲法)에 의하여 제8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한국의 ‘박정희유신(朴正熙維新)’은 5,000년 동안 지속된 지독한 굶주림과 외세의 침탈에 시달리던 한 민족을 혁신적 공업입국 산업사회로 발전시켜 세계10위의 경제대국을 만들었고 한류(韓流)와 G20국가로의 발전에 초석을 만들었다. 5'16군사혁명에 성공한 박정희는 1972년10월17일 유신헌법을 선포하고, 낙후된 조국을 구제하겠다는 조국근대화의 원대한 이상을 가지고, 10월유신(十月維新)을 실시하여 부국강병 새 시대의 문을 열어, 국가재건사업 ‘새마을운동’을 의욕적으로 추진해 [공업입국으로 조국근대화]를 이루게 되었다.
‘박정희유신’은 국민들의 정신개혁과 경제개발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해 괄목할 만한 발전을 보고 있었지만, 1979년 10월26일 김재규의 궁정동 대통령시해사건으로 박정희가 서거하자 유신과 박정희 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 후 한국은 박정희가 닦은 경제적 바탕에서 민주화에도 성공하였고, 공업입국으로 세계10위권의 경제국으로 성공했고, [G20국가] 일원으로 [한류문화국가]로도 성장하였다.
그러나 박정희는 1979년 10월 26일과 27일 당시 궁정동 안가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金載圭;1926~1980)의 10·26 대통령 시해사건으로 서거하였다. 국민들의 애도 속에 국장이 치러졌고, 국립서울현충원 국가원수묘역에 안장되었다.
.1999년 7월 26일에는 김대중 대통령 시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고, 기념관 설립을 비롯한 여러 기념사업이 추진되었다.
기다리는 셋째 의인(宜人)?
숭산(崇山)마을 노인들은 앞으로 나타날 세번째 의인을 기다리고 있다.
금오산 주위에서 역사적 인물이 수없이 많지만, 여기서는 금오산 남동쪽 산 아래 30리 내에서 출생한 인물들 몇 분만 소개한다.
문희공(文僖公) 선암 유창(劉敞;1352~1421) 선생(북삼 숭산 출생). 조선개국공신 이등으로 대사성(大司成),
충절(忠節)공 야은 길재 (吉再;1353~1419) 선생(구미 해평 출생).
여헌 장현광(張顯光;1554~1637) 선생(북삼 오태 출생) ;조선시대 중기의 학자, 문신, 정치인, 철학자, 작가, 시인
신유(申瀏;1619∼1680) 장군(북삼 강진 출생) ;청(靑)나라 요청을 받아 영장(領將)으로서 조총군(鳥銃軍) 200여 명을 인솔하고 나선정벌(羅禪征伐)에 참여.
만송 유병헌(劉秉憲;1842∼1918) 선생(북삼 강진 출생).
유병헌(劉秉憲)의사는 <은수변파록(恩讐辨破錄)>을 1911년 당시 대한제국의 고관대작, 관료, 유림들이 왜국의 은사금과 재물, 작위에 유혹되어 국권(國權)을 일본 오랑케에게 넘기는 사례에 대하여 애절 통탄하여 통열(痛裂)히 비판하는 글을 일본내각, 총독, 미국, 청국, 러시아, 영국, 불란서 대사관과 각처 관공서, 향교유림에 통문(通文) 하였고 황제에게 상소.
1918년 대구옥에서 "왜놈이 주는 음식은 먹지 않겠다." 하며 단식자진(斷食自盡).
허위(許蔿;1855~1908) 선생(구미 출생).; 서기1895년 조선 고종32년에 을미사변과 단발령(斷髮令)을 계기로 의병활동,
13도의병연합부대(十三道義兵聯合部隊) 군사장(軍師長), 일본군 헌병에게 붙잡혀 서대문 감옥에서 51세로 순국.
장지연(張志淵,1864∼1921)선생(북삼 율리 출신);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乙巳條約)이 강제로 체결되자 『황성신문』 1905년 11월 20일자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게재해 전국에 배포하였다. 이 논설은 일본의 국권침탈과 을사5적(乙巳五賊)을 규탄해 국민총궐기를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언론인. 1921년 10월 2일 병사.
선산 고아에서 태어난 고려 말 삼은(三隱) 중 하나인 야은(冶隱) 금오산인(金烏山人) 문하주서(門下注書) 길재(吉再,1353~1419)는 이색(李穡,1328~1396), 정몽주(鄭夢周,1337~1392) 등의 문하에서 유창(劉敞,1352~1421;강릉 劉씨 도시조), 권근(權近,1352~1409;안동 權씨 도시조) 등과 동문수학하였다. 그들의 후학에는 김숙자(金叔滋,1389~1456), 김종직(金宗直,1431~1492), 김굉필(金宏弼,1454~1504), 정여창(鄭汝昌,1450~1504), 조광조(趙光祖,1482(성종13)∼1519(중종14) 등이 영남학통의 맥을 이어가 조선 성리학의 꽃을 피웠다.
금오산 금릉 하로리(賀老里)는 판서(判書) 최선문(崔善門)의 고향이다. 최선문은 노산군을 위하여 절의를 지켰다.
또한 사육신의 한 사람인 단계(丹溪) 하위지(河緯地,1412~1456)는 선산 영봉(이문리)에서 태어났고,
조선 중종 때 서릿발 같은 반정공신 성희안(成希顔,1461~1513)이 청송의 이름난 잣과 꿀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받은 청송 고을원으로 봉직하던 정붕(鄭鵬,1467~1512)은 “잣은 높은 산 나무위에 있고 꿀은 민가의 벌통 속에 있으니 내가 어떻게 구하리오.” 라는 유명한 답장을 보내 금오산 선비들의 꼿꼿한 기품을 알렸다. 그 후 정붕은 선산 고향에서 제자들을 길러냈다.
노수신(盧守愼,1515~1590)의 고향 역시 선산인데
17세기 영남학파를 대표하는 유학자로 칭송이 높았던 장현광(張顯光,1554~1637) 역시 고향이 인동(仁同)으로서
이어 한말 독립순국의사 만송(晩松) 유병헌 선생도 이곳 숭오(崇烏)에서 태어나, 충절의 고향 금오산의 면면을 보여주고 있다.
근대에 와서 박정희 대통령이 금오산 밑 상모에서 태어났고, 그의 딸 박근혜 대통령도 고향이 금오산인 샘이다.
그 외 금오산 줄기에서는 국무총리를 역임한 장택상(북삼 오태), 신현확(약목) 등, 많은 인물들이 근세에도 배출되었다.
금오산아 - 이자연 노래
https://www.youtube.com/watch?v=uOmxJGoGfe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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