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 "박경리 선생처럼 똑똑한 작가는 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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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박경리 선생처럼 똑똑한 작가는 처음"

2013. 5. 31. 03:05

 

[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38>박경리 1

[동아일보]

 

 

김지하 시인을 처음 만났을 당시 1970년대 초반의 박경리 선생. 단아한 모습의 전형적인 한국형 미인이다. 박 선생은 당시 암 투병 중에도 토지 1부를 써내 문단으로부터 존경받는 문인이었지만 은둔하다시피 살고 있었다. 동아일보DB

 

주로 원주에 머물던 김지하는 서울에 올라오면 문단의 지인들과 어울렸다. 1971년 가을 그날은 '현대문학' 편집장 김국태 형(2007년 작고·소설가·김근태의 형)과 소설가 유현종(73·전 한국문학예술진흥회장·전 중앙대 국문과 교수)과 함께였다. 일행은 1차를 마치고 더 마시고 싶었지만 주머니에 돈이 없었다. 인근에 있는 가까운 작가들 집에 쳐들어가기로 마음먹고 먼저 성북동에 살고 있던 소설가 김동리 집으로 갔다. 선생은 마침(?) 출타 중이었다.

 

김 편집장이 "가까운 곳(정릉)에 박경리 선생 집이 있으니 그리로 가자"고 제안했다. 박 선생은 69년부터 현대문학에 토지 1부를 발표한 상황이어서 두 사람은 잘 아는 사이였다. 김지하 역시 토지를 읽었던 상태였고 이미 당대 최고 작가 반열에 올라 있던 박 선생에 대해 그 역시 존경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박 선생은 다행히(?) 집에 있었다. "맥주 한잔 얻어먹으러 왔다"고 하는 일행을 흔쾌히 안으로 들였다. 선생 옆에는 딸 김영주(현 토지문화관 이사장)가 서 있었다. 김영주는 당시 연세대 사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한 뒤 문화재관리국 연구실에서 일하고 있었다.

 

선생과 일행들 간에 이야기꽃이 피기 시작했다. 김지하의 회고다.

"말로만 듣던 박 선생을 그날 처음 뵈었다. 얼굴이 굉장히 미인이셨다. 말씀도 잘 들어주시고 대답도 잘 해주셨지만 쉽게 속내를 알 수는 없었다. …역사(歷史) 이야기가 나오자 식견이 보통 탁월한 것이 아니었다. 주로 내가 여쭙고 박 선생이 답을 했는데 경상도 전라도 지리산 등등 민감한 지역 문제들에 대해서도 막힘이 없었다. 화엄불교, 동학에도 해박했고 동서양 역사는 물론 한국 현대사까지 줄줄이 꿰고 있었다. 혹시 공산주의자인가 싶어 은근슬쩍 물었더니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아주 비판적이었다. 나는 작가들 중에서 그렇게 똑똑한 사람을 태어나서 그때 처음 보았다."

 

일행은 맥주를 잔뜩 얻어먹고 나왔다. 박 선생은 일행을 배웅하며 "또 놀러 오라"고 말했다. 평소 낯가림이 심하기로 유명했던 선생으로서는 이례적인 말이었다. 일행은 "박 선생이 저런 말씀을 하시다니 아마 지하가 마음에 드셨나 보다" 하는 반응들이었다.

 

김지하도 그날 만남이 오래 잊히지 않았다.

며칠 뒤에는 한밤중에 홀로 자신의 일본어판 첫 시집 '긴 어둠의 저편에'를 박 선생 집 신문 넣는 구멍을 통해 집어넣고 왔을 정도였다. 그리고 또 며칠 뒤엔 혼자 놀러 가기도 했다. 김지하는 "박 선생이 따뜻하게 대해 주어 고마웠다. 그 뒤로도 가끔 놀러 갔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그는 '광복 이후 한국 문학이 거둔 최대의 수확'이라는 평가를 받는 '토지'의 작가 그리고 그의 딸과 훗날 장모와 아내라는 운명적 인연을 맺게 되리라는 것을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박경리 선생은 김지하와의 첫 만남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박 선생(2008년 작고)은 생전에 인터뷰를 극도로 사양했다. 어렵게 이뤄진 인터뷰에서도 가족 이야기는 별로 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1994년 작가세계 가을호에서 서울대 송호근 교수(사회학과)와 장시간 인터뷰를 하면서 김지하와의 첫 만남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내 나이 마흔여섯이었을 거예요. '토지'를 집필하자 곧 (유방)암 수술을 받았지요. 나는 소풍가는 기분이었어요. 의사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실지로 그랬지요. 그늘, 태어나고부터 줄곧 나를 억누르던 그늘에서 이제야 해방된다는 홀가분한 심정이었어요. (내가 쓴 소설) '시장과 전장'은 실화예요. 서대문 형무소에서 남편이 죽고 (곧이어 소설) '불신시대'를 쓰기 전에는 아들이 죽었지요. …(어느 날) '현대문학' 김국태 씨가 지하와 함께 왔어요. '오적'을 읽고 싶었는데 구하질 못해 읽어보지는 못했던 때였죠. (글을 쓰는 내가) 글 잘 쓰는 젊은이에게 호감을 갖는 것은 당연하잖아요?"

 

71년 가을 그날, 김지하가 박 선생을 처음 만났을 때 선생은 69년 집필을 시작한 토지를 위해 거의 은둔하다시피 살고 있었다. 그해 암으로 오른쪽 가슴을 절제하는 수술을 받고도 수술 뒤 보름 만에 퇴원해서는 수술 부위를 붕대로 싸맨 채 토지를 썼던 그였다(토지 2부를 쓸 때는 사위 김지하가 구속되면서 또 다른 고초를 겪는다).

 

선생을 평생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본 딸 김영주 토지문화관 이사장은 당시 어머니의 모습을 이렇게 기억한다.

"마음속으로 온갖 고통을 꾹꾹 누르고 있다가 마지막 해를 넘기는 날 같은 때에는 한 번씩 창자가 끊어지듯 우셨어요…지금도 잊히지 않는데 어느 연말 어수선한 밤, 방에서 울려나오던 통곡소리가, 마음 바닥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마치 가슴이 터져버릴 듯 통곡하시던… 그 밤이 잊히지 않습니다. 그 무렵 어머니는 작가로서 별처럼 반짝이며 떠오르고 있었고, 그것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질시의 표적이 되었던 것 같은데 그날은 아마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험한 말을 들으셨나 봐요. 어머니는 마치 온몸을 부숴 버릴 듯 통곡을 하시고 난 다음엔 언제 그랬느냐는 듯 단정하게 앉아, 그야말로 모질게 원고지 앞에 앉아 펜을 드시곤 했습니다."

 

김 이사장은 "어머니가 김 시인을 처음 만난 날 호감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라며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는 암 투병 후 내 결혼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당신이 언제 죽을지 모르니 하나 남은 딸자식에게 꼭 인연을 만들어주고 죽어야겠다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실제로 김 시인을 만나기 전에 어머니가 주선해 선도 한 번 본 적이 있어요. 그런데 김 시인을 우연히 만나보고는 마음에 드셨던 거지요. '오적'을 낸 시인이니 앞으로 고난은 좀 있겠지만 똑똑한 젊은이니까 처자식 밥은 굶기지 않겠구나 생각하신 거죠. 하지만 보기 좋게 틀린 생각이 되었습니다(웃음)."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동아일보 & donga.com,

 

 

김지하, 박경리 딸 김영주와 결혼.. 주례 김수환 추기경

2013. 6. 19. 03:12

 

[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50>청혼

[동아일보]

 

1973년 4월 7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오른쪽)의 주례로 결혼하는 김지하와 김영주. 김지하 제공

1973년 1월 어느 날 김지하가 몸을 피해 머물고 있던 원주 집으로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박경리 선생과 딸 김영주였다.

모녀는 72년 10월 17일 유신이 선포된 날 "숨겨 달라"던 김지하를 그냥 떠나보낸 게 못내 마음에 걸려 일부러 내려왔다고 했다. 너무 미안하고 고마웠다. 모녀를 돌려보내고 김지하는 원주에 머물렀다.

그런데 건강이 날로 악화되고 있었다. 몇 발짝에 한 번씩 기침이 터졌다. 김지하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다시 마산병원으로 갔다. X선 검사를 했더니 기흉(가슴막 안에 공기가 찬 상태)이었다.

 

당시 기흉과 각혈 환자는 어느 곳 어느 병원에서든 즉각 입원시켜 치료해줘야 했다. 김지하는 바로 입원했고 오른쪽 가슴에 구멍을 뚫어 호스를 박고 공기를 뽑아내는 수술을 했다.

수술을 마치자 중앙정보부 마산분실장이 달려왔다. 김지하는 2층 병실로 옮겨졌다. 다시 병원생활이 시작됐다. 병원에서 73년 봄을 넘기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겉으로 보기에 절대권력은 공고해 보였다. 구속적부심제도와 법원의 위헌심사권도 없어졌고 법관의 임명보직권도 대통령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국정감사권까지도 없어져 버렸다.

하지만 균열은 내부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1973년 4월에 '윤필용 사건'이 터진 것이다. 육사 8기의 선두주자로 수도경비사령관이었던 윤필용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등 실세들과 함께한 술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노쇠했으니 물러나시게 하고 후계자는 이후락 형님이 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 발단이 되어 쿠데타를 모의한 죄로 구속된 사건이다.

이 일은 실제로는 군 내부 사조직인 '하나회'를 지원하는 윤필용과 반대세력 간의 권력투쟁이었고, 이때 거세된 윤필용은 후일 전두환 대통령의 등장으로 부활하게 된다.

당시 군법회의는 윤 사령관과 그를 따르던 장교들에게 모반죄가 아닌 횡령 및 뇌물수수죄를 적용해 징역 1∼15년을 선고했고, 대법원은 이 판결을 확정했다. 윤 사령관은 1975년 형 집행정지로 석방된 데 이어 1980년 특별 사면됐다. 석방된 뒤에는 한국도로공사 사장과 한국전매공사 이사장, 한국담배인삼공사 사장 등을 역임하다 2010년 작고했다.

 

윤 사령관의 아들은 2010년 8월 고등군사법원에 재심 청구를 했다. 2012년 2월 22일 서울고법은 부대 운영비를 횡령하고 청탁과 함께 금품을 받은 혐의(업무상 횡령 등)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윤 사령관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73년 2월 김지하는 서울 인사동 2층 찻집 어둑한 귀퉁이에서 서투른 몇 마디로 청혼을 하고 곧 약혼한다. 그는 약혼식을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내 마음속 칼을 내리며 술을 많이많이 목구멍에 털어 넣었다. 지금도 그때 찍은 사진을 보면 흰 윗도리며 푸른 조끼 위에 얼굴이 새빨간 한 못난이가 술에 취해 눈을 반쯤 감고 있는 모습이 별로 깍듯해 보이질 않는다."

그리고 73년 4월 7일 명동성당 반지하 묘역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주례로 결혼한다. 추기경은 강론에서 부부간의 예절과 함께 김지하 시인의 고난에 찬 앞길을 예감했는지 비상한 결심과 각오를 강조했다. 두 사람은 청평호반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매일 새벽 눈을 떴을 때 곁에 아내가 있다는 사실이 내게 기이할 정도로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첫째 안정감이었고, 둘째 겸손해야 한다는 생각이었고, 셋째 깊은 자기긍정이었다."

김지하는 결혼 후 원주교구에서 재해대책위원회와 기획실에서 일했다. 행복했고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아내는 이내 첫 아기를 가졌다.

 

김지하는 당시 두 가지 일을 했다. 광범위한 민중교육과 조직운동, 다른 하나는 농어민과 영세민의 계몽을 위한 선전 드라마를 쓰고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종교를 통한 반정부 운동을 생각했다.

가톨릭은 세계적으로 긴밀히 조직되고 체계화된 준(準)국가조직이므로 정권이 가톨릭을 건드리는 것은 장기적으로는 자살을 뜻하게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국내적으로도 가톨릭이 움직이면 개신교가 움직이고, 개신교가 움직이면 자유민주주의 단체나 개인들이 움직일 것이며, 그렇게 될 경우 불교도 움직이고, 이어서 지식인들까지 움직이게 될 것이라는 다각적인 판단이 섰다.

그 무렵 지학순 주교는 자주 출국하여 해외의 여러 사람과도 접촉했다. 그러던 중 한청동(재일한국청년동맹·4·19혁명을 계기로 조국의 민주적 발전과 통일 실현을 목표로 삼은 재일 한국 청년운동체) 대표 20여 명이 입국해 원주교구청을 방문했다.

김지하는 그들에게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장점을 다 함께 포용하고 동서양의 사상을 통합하는 새 차원의 민중민족철학을 목표로 공부하고 또 실천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청동은 이듬해 봄 김지하가 구속된 뒤 일본 내에서의 구명운동과 반(反)유신운동의 주역이 된다.

김지하는 이 무렵 외신과 인터뷰도 많이 했다.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등은 물론이고 일본 독일 스웨덴 프랑스의 언론과도 인터뷰를 하면서 전통사상과 예술, 당시 우리의 처지와 희망을 알렸다.

오랜만에 찾아온 마음의 평화였다. 그러나 이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신혼 4개월로 접어든 8월, 한국 사회가 발칵 뒤집어지는 정치적 사건이 터지니 김지하의 삶도 점점 격동의 소용돌이 한가운데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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