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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굼증다이어리
퀸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2020. 12. 13. 11:51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은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래 재임한 군주다. 2021년 2월이면 왕위에 오른 지 69년을 맞는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누구인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1952년 2월 6일 여왕이 되었고, 1953년 6월 2일 왕위에 올랐다. 그녀는 왕위 계승자인 찰스 왕세자의 어머니일 뿐만 아니라 윌리엄 왕자와 해리 왕자의 할머니이기도 하다.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래 군림한 군주로서, 그녀는 왕관과 관련된 전통을 유지하면서 변화하는 대중에게 더욱 현대적이고 민감한 통치체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다.
얼리 라이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1926년 4월 21일 런던에서 앨버트 왕자, 요크 공작(조지 6세)과 엘리자베스 보우즈-라이언 사이에서 엘리자베스 알렉산드라 메리 공주로 태어났다.
그녀가 태어났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엘리자베스가 언젠가 영국의 여왕이 될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녀 또한 릴리벳이라는 별명을 가진 엘리자베스는 후계자라는 압박감 없이 왕족으로서의 모든 특권을 누리며 생애 초반을 즐겼을 것이다.
엘리자베스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런던의 한 집과 윈저 대공원 구내에 있는 가족의 집인 로열 로지 사이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왔다. 엘리자베스와 그녀의 여동생 마가렛은 가정교사들에게 교육을 받았으며. 학과는 프랑스어, 수학, 역사, 춤, 노래, 미술 수업 등이 함께 포함되었다.
하지만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엘리자베스와 그녀의 여동생은 윈저 성으로 이전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런던에서 머무르며 그곳에서 그녀는 1940년에 그녀의 유명한 라디오 방송을 처음으로 만들었는데, 이 특별한 연설은 그들의 집과 가족들로부터 대피한 영국의 아이들을 안심시켰다. 14세의 공주는 침착하고 확고한 성격을 보여주며 "결국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살펴 주시고 승리와 평화를 주실 것이다."라고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곧 왕실 일원으로서 또다른 공적인 일을 떠맡기 시작하였는데. 그녀는 아버지로부터 그르나디에 근위대 대령으로 임명되었다 엘리자베스는 1942년 처음으로 군대를 사찰하는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그녀는 또한 영국 내 공식 방문 시 부모님을 동반하기 시작했다.
1945년에 엘리자베스는 대영재국을위해 전쟁에 참여하였으며. 그녀는 숙련된 운전사와 정비사가 되기 위해 다른 영국 여성들과 나란히 훈련했다. 그녀의 봉사활동은 몇 달밖에 지속되지 않았지만, 그것은 엘리자베스에게 왕족 외에의 다른 세계를 엿볼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녀는 마거릿과 함께 유럽의 날에 시민들 사이에서 신분을 숨기고 어울릴 수 있도록 허락되었을 때 군주제 밖에서 또 다른 생생한 경험을 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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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센션 Ascension 투 더 크라운
1936년 엘리자베스의 할아버지 조지 5세가 사망하자 그의 장남(엘리자베스의 삼촌)은 에드워드 8세가 되었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미국의 이혼녀 월리스 심슨과 사랑에 빠져 왕이라는 직책과 그녀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했고 결국 에드워드는 심슨을 선택하여 왕관을 포기했다.
그 사건은 그녀의 삶의 방향을 바꾸어 그녀를 영국 왕위 계승자로 추정하게 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1937년 조지 6세로 즉위하여 조지라는 이름을 이어받아 아버지와의 연속성을 강조하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되었다 1952년 조지 왕이 죽자, 그녀는 마더 여왕이 되었고 그녀의 딸은 엘리자베스 2세가 되었다.
퀸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그리고 로얄패밀리
2020. 12. 13. 13:28

대관식
엘리자베스는 1953년 6월 2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27세의 나이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 즉위했다.
엘리자베스는 1952년 2월 6일, 그녀의 아버지 조지 6세가 죽었을 때, 지배 군주의 책임을 떠맡았었다. 사상 처음으로 대관식이 텔레비전을 통해 방송되어 전 세계 사람들이 이 행사의 화려함과 장관을 목격할 수 있게 되었다.

남편 필립공
엘리자베스는 1947년 11월 20일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먼 사촌 필립 마운트배튼(어머니 쪽에서 입양한 성)과 결혼했다.
엘리자베스는 겨우 13살 때 그리스의 앤드루 왕자의 아들인 필립을 처음 만났다. 그녀는 처음부터 그에게 반했다. 두 사람은 세월이 흘러도 계속 연락을 주고받다가 결국 사랑에 빠졌다. 엘리자베스는 조용하고 내성적인 반면 필립은 떠들썩하고 거리낌이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인 조지 6세는 필립공이 덴마크와 그리스 왕족과 유대관계를 맺고 있는동안 몇몇 사람들에게 거친 성격을 지녔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결혼에 대해 망설였다고 전해진다.

그들의 결혼식 당시 영국은 2차 세계대전의 폐허에서 여전히 회복되는 중이었고, 엘리자베스는 가운 원단을 얻기 위해 의류 쿠폰을 수집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엘리자베스와 필립은 지체 없이 후계자를 낳았다 아들 찰스는 그들의 결혼 다음 해인 1948년에 태어났고, 딸 앤은 1950년에 생겼다. 엘리자베스는 1960년과 1964년에 각각 앤드류와 에드워드라는 두 아이를 더 낳았다.
1969년 그녀는 찰스 왕세자를 왕자로 추대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찰스 왕세자를 후계자로 삼았다. 수억 명의 사람들이 텔레비전에서 그 의식을 보기 위해 채널을 맞추었다.
1981년 32세의 찰스는 19세의 다이애나 스펜서(최우수 다이애나 왕세자비)와 결혼했고, 이후 가족들로부터 결혼에 압력을 받았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 결혼식은 런던의 거리에서 엄청난 군중을 끌어 모았고 수백만 명이 텔레비전으로 그 과정을 지켜보았다. 당시 군주제에 대한 여론은 특히 강했다.
손자와 증손자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는 결혼과 함께 , 1982년 왕위 계승 서열 2위 윌리엄이, 1984년 해리 왕자가 탄생했다. 엘리자베스는 윌리엄과 해리에게 헌신적인 할머니로 떠올랐다. 윌리엄 왕자는 그와 케이트 미들턴이 2011년 결혼식을 계획했을 때 귀중한 지원과 지도를 제공했다고 말했다.
2013년 7월 22일, 엘리자베스의 손자 윌리엄과 케임브리지 공작부인 캐서린은 공식적으로 "케임브리지의 왕자 조지"로 알려진 왕위 계승자인 그들의 첫 번째 아이 조지 알렉산더 루이스를 맞이했다.
2015년 5월 2일, 윌리엄과 케이트는 두 번째 아이인 여왕의 다섯 번째 증손녀 샬롯 엘리자베스 다이애나를,, 2018년 4월 23일, 그들은 셋째 아이인 루이 아서 찰스 왕세자를 맞았다.
2019년 5월 6일, 서섹스 공작 해리 왕자와 그의 아내 메건 마클은 아치 해리슨 마운트배튼 윈저의 탄생으로 여왕에게 또 다른 증손자를 주었다.
윌리엄 왕자와 해리 왕자 외에도, 여왕의 다른 손자들은 요크의 베아트리체 공주인 피터 필립스, 요크의 외제니, 자라 틴달, 레이디 루이스 윈저, 그리고 제임스 세번이다.
패밀리 트리
엘리자베스 2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요크 공작부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인 요크 공작 알버트 왕자는 메리 여왕과 조지 5세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엘리자베스 보우즈-라이온 부인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유럽의 대부분의 군주들과 유대를 맺고 있다. 그녀의 영국 조상은 빅토리아 여왕 (재위 1837년 ~ 1901년)과 조지 3세 (재위 1760년 ~ 1820년)이다.
군림하다
엘리자베스의 길고 주로 평화로운 통치는 그녀의 백성들의 생활, 조국의 권력, 영국을 해외에서 어떻게 보는가, 그리고 군주제를 어떻게 보고 묘사하는가에 있어서 엄청난 변화로 특징지어져 왔다. 입헌 군주로서 엘리자베스는 정치적 문제에 관여하지 않으며, 정치적 견해를 밝히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정기적으로 수상들과 상의한다.
엘리자베스가 여왕이 되었을 때, 전후 영국은 여전히 실질적인 제국과 지배권, 의존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이러한 소유물들 중 많은 것들이 독립을 이루었고 대영제국은 영연방 국가들로 진화했다. 엘리자베스 2세는 이에 따라 영연방 수장이자 영국 대표로서 1965년 독일로 획기적인 여행을 떠나는 등 다른 나라를 방문했다. 그녀는 50여 년 만에 그곳을 국빈 방문한 최초의 영국 군주가 되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동안 엘리자베스는 광범위한 여행을 계속했다. 1973년에는 캐나다 오타와에서 열린 영연방회의에 참석했고, 1976년에는 영국으로부터 미국의 독립 200주년 기념행사를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일주일 이상 지난 후 그녀는 하계 올림픽을 열기 위해 캐나다 몬트리올에 있었다. 1979년 쿠웨이트, 바레인,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아랍에미리트, 오만 등을 여행하며 국제적인 관심과 폭넓은 존경을 받았다.
1982년 엘리자베스는 포클랜드 전쟁 당시 영국 왕실 해군에서 헬기 조종사로 근무했던 둘째 아들 앤드루 왕자를 걱정했다. 영국은 몇 주 동안 계속된 충돌인 포클랜드 제도에 대해 아르헨티나와 전쟁을 벌였다. 250명 이상의 영국 군인들이 이 분쟁으로 사망했지만, 앤드루 왕자는 어머니의 안도를 위해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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