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3. 29. 07:56ㆍKorean Arts
<'트로트'의 한(恨)과 흥(興)>
윤심덕
'광막한 황야를 달리는 인생아 / 너의 가는 곳 그 어데냐
쓸쓸한 세상 홈악한 고해에 /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
1926년 일본 동경에서 취입한 우리나라 최초의 '트로트'라 할 수 있는 <사(死)의 찬미>중 첫 소절이다.
평양 출신의 아름다운 소프라노 성악가였던 윤심덕(尹心悳)이 <다뉴브강의 물결>이란 서양곡에 자신이 직접 가사를 붙여
만든 곡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곡의 가사는 윤심덕의 연인이었던 목포 출신 부호 청년이었던 극작가 김우진(金祐鎭)의 솜씨였다.
'죽음에 대한 예찬...."
두 사람은 이룰 수 없는 사랑에 절망을 해서였던지 이곡을 취입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26년 8월 3일 늦은 밤....'윤 수선'과 '김 수산'이라는 가명으로 승선한 시모노세끼발 부산행 관부 연락선이 대마도를 지날 즈음 무섭도록 꽉 끌어안은 채 검푸른 현해탄에 뛰어들었다. 죽음을 향해서....
이들이 남긴 두 통의 유서 중 한 통은 개인적인 내용이라 일경에 의해 곧바로 내용이 알려졌지만 다른 한 통은 영원히 밝혀지지 않았다.

순종의 장례식
추측건대... 이들이 죽음을 택한 그날은 순종이 죽은 지 정확히 100일 되는 날로 전 국민들이 숨소리를 죽인 채 이불 속에서 통곡하던 바로 그날이었다.
나라 잃은 고통이 코로나의 쓰나미처럼 전국을 뒤덮고 있던 그날....
인텔리 극작가와 인텔리 성악가가 찾아가는 나라에 어떤 희망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겠는가?
나라 잃은 통곡이든 이룰 수없는 사랑에 대한 한이던....
우리 최초의 트로트에는 잃어버린 것에 대한 짙은 한이 배었다.
그로부터 6년이 흐른 1932년 어느 날...
한 초등학생이 노래를 웅얼거리며 길을 가다가 일본경찰에게 불려 세워졌다.
그 노래를 누구에게서 배웠냐고 다구치자 겁에 질린 애가 학교 선생님에게서 배웠다고 했다. 결국 학교 선생부터 교장까지 줄줄이 끌려가 고문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그곳이 바로 <황성 옛 터> 다.

이애리수
우리나라 최초의 트로트 작곡가라고 할 수 있는 천재 작곡가 '전수린'이 만들고 왕평'이 가사를 붙였는데 '이애리수'가 불러 하루아침에 조선팔도를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종로 3가에 있던 단성사에서 매일 라이브로 불렀는데 매회 매진되었고 레코드판은 불티나 아예 절판되고 말았다.
이애리수를 짝사랑하는 남자들이 나타나고 이루지 못할 사랑이라고 철길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남자들이 생길 지경이었다. 단성사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열광했던지 일본 경찰이 놀라 단성사에 진입해 공연을 중단시키고 관련자들을 대거 연행하는 일이 벌어졌는데...그후
<황성 옛 터>에 사형선고를 내려졌다.
이유는......가사내용중 '이미 망해버린 옛 왕조의 성터를 찾아가 우는 이유가 뭐냐?'라는 것이었다. 어거지도 이런 어거지가 없다.
조선팔도는 다시 한번 울음을 씹어 삼켜야만 했다.
다시 그로부터... 3년 이 지난 1935년
'문일석'이라는 분이 가삿말을 하나 써서 당시 유명했던 작곡가 '손목인'씨를 찾아가 곡을 하나 만들어달라고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곡이 <목포의 눈물>이다.
이난영 씨가 불러 그후 삼천만의 트로트가 되었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삼학도(三鶴島) 파도 깊이 숨어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 젖은 옷자락/이별의 눈물이냐....

이난영과 목포의 눈물 앨범
이 곡은 나오자마자 일본의 된서리를 맞았다. 곡의 2절이 문제가 됐는데...
삼백 년(三百年)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닮흔 정조....
바로 이 부분이다.
이 구절에 나오는 노적봉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목포의 유달산 봉우리를 노적가리처럼 보이도록 하여 왜적으로 하여금 조선군이 아직도 식량이 많고 군사도 많은 것처럼 보이게 만든 일화에서 따온 것으로
한일합방까지 일본에 대한 300년의 원한을 노래한 것이었다.
일본 경찰이 문일석을 잡아다 족치자 문일석이 경찰에게 가사를 다시 내밀었다.
삼백년(三栢淵) 원안풍(願安風)은 노적봉 밑에/
'세 그루의 동백이 있는 연못에 평안한 바람이 부는 노적봉 밑에....'라는 의미로 둔갑시킨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일제의 눈을 속이고 다시 <목포의 눈물>은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문일석 자신은 이러한 방식으로 일제의 고문을 벗어난 자신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던지... 어느 날 한 마디 말도 없이 집을 나선 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김우진과 같은 길을 가기로 했던가......
해방되고 10년이 흐른 1956년.....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현직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야당 측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신익희 씨가 맞섰다.
당시 국민의 모든 열망은 신익희 씨에게 쏠렸다. 새로운 대한민국의 희망이었다.
5월 2일의 한강 백사장에서 열린 신익희 씨 선거 유세에는 30만 명이 운집하여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을 초긴장 시키게 만들었다. 당시 유권자수를 감안하면 어마무시한 숫자였던 것이다.
그런데....
선거일을 불과 10일 남긴 5월 5일 유세차 충남 서천에서 전북 익산으로 열차로 이동하던 중 뇌일혈로 사망하고 말았다.
오후 4시에 서울역에 도착한 신익희 씨의 운구를 보기 위해 달려운 시민들로 서울역은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절망한 국민들이 들고일어나는 바람에 1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잡혀간 사람도 700명에 이르렀다.
또 한 번 국민들의 희망은 물거품되었다.
그런데.....바로 이 순간에 트로트 한 곡이 방송을 타고 흘러나왔다.
<비 내리는 호남선>이었다.
목이 메인 이별가를 불러야 옳으냐/돌아서서 피눈물을 흘려야 옳으냐
사랑이란 이런가요 비 내리는 호남선에/헤어지던 그 인사가 야속도 하드란다
신익희 씨가 타고 가던 호남선... 거기다가 비까지 내리니... 이렇게 절묘하게 신익희씨의 죽음을 표현할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신익희 씨의 부인이 작사를 썼고... 직접 부르기로 했었다는 이야기도 그럴듯하게 곁들여졌다.
<비 내리는 호남선>은 당시 모든 술집에서... 넘치는 술잔과 눈물과 한탄 속에서 불렸다.
이 장송곡을 부르면서 국믽들은 다음의 희망을 꿈꾸고 있었다.
박춘석 씨가 만들고 손로원 씨가 가사를 붙인 곡 <비 내리는 호남선>은 장송곡이자 우리 민족의 희망가였다.
이렇듯 트로트는 그 시작부터 우리 민족의 한과 흥이 얽혀있다.
이제는 신나는 트로트를 부르면서도 울고.... 슬픈 트로트 곡을 떼 합창으로 부르면서도 웃는다.
온 국민들의 대표적 감정 장르로 자리 잡은 것이다.

윤치영, 신익희, 조봉암
우리 민족의 독특한 '끼문화'는 트로트의 영역과 많은 부분 겹쳐진다.
세 박자 또는 다섯 박자를 기본으로 하는 '트로트'와 '쿵작' '쿵작'을 반복하는 '뽕짝' 의 끼흐름이 K 팝으로 이어졌다.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트로트는 우리 민족에게는 마치 '청바지'나 '햄버거'같은 존재다.
남녀노소 불문 누구나 좋아하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통상 심장이 빠르게 뛰는 젊은 사람들은 빠른 템포의 노래를 좋아하고 나이 들어가면서 심장박동이 느려지면 그 속도에 맞는 장르의 음악을 좋아하기 마련인데.... 트로트는 이런 경계를 뛰어넘는 무엇이 있다.
그것을 굳이 우리만의 정서인 한(恨)의 공감대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1926년 전수린이 만들어놓은 <조용한 장안>이라는 곡을 전수린의 선린상고 친구였던 일본인 '고가 마사오'가 동경으로 가져가 자신의 이름으로 레코딩을 했다.
<사케와 나미타카 타메이키카>라는 일본 최초의 엔카다.
전수린은 친구일이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몇 년 후 일본의 잡지사인 <신청년>이 표절 의혹을 제기하면서 세상에 드러났다.
같은 뿌리인데도 일본 엔카는 전혀 힘을 받지 못하는 것을 보면 느껴지는게 많다.
민족혼의 전혀 다른 뿌리를 알게된다.
일제 36년을 견디어낸 것도 트로트의 힘이었고....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낸 그 저력도 트로트의 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恨)'을 쉽게 '흥(興)'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감정적 변이(變移) 능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국이 IMF를 그렇게 빨리 극복할 줄 예견했던 사람은 어디도 없었다.
역대 대통령을 줄줄이 감옥으로 보낼 수 있는 민족이 이 세상 어디 그리 흔한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어느 누구라도 잘못을 하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나라라는 것을 전 세계 사람들 머릿속에 각인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정치적 진화속도가 가장 빠른 국가다.
이런 나라가 조국 문제같은 것이나 울산문제같은 정의문제를 풀어내지 못할 리가 없다.
트로트와 끼문화를 알지 못하고서는 설명이 안되는 문화다.

K 팝 방탄소년단
그래서 나는 미래를 믿는다.
코로나로 전 세계가 시름과 공포로 빠져있던 그때 한국에서는 모 종편TV의 한 트로트 프로가 시청률 35%를 넘어섰다.
한반도가 열광의 도가니에 일시적으로 빠졌던 것이다. 우리는 쉽게 빠지고 쉽게 빠져나온다.
일부에서는 냄비근성이라고 비하하는 말도 있지만 굳이 그렇게 자학할 필요는 없다.
그런 열정이 우리의 미래를 끌어가는 에너지가 될테니 말이다.
우리 스스로가 미래의 답이고 우리가 지금 그 답을 써 내려가고 있는 중이다.
오늘 정치적으로 다소 좌절이 있다고해서 쉽게 주저 앉을 일도 아님을 우리는 역사속에서 이미 경험했다.
다른 나라사람들은 우리를 기적과 연관시키지만 우리는 그냥 일상일 뿐이다. ....
우리 곁에 즐거운 트로트가 있음을 알기나 할까?.....
트로트 속에서 우리는 쉽게 하나가 된다.
광화문 징검다리....
[출처] <'트로트'의 한(恨)과 흥(興)>|작성자 광화문 징검다리
酒は涙か 溜息か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
< 사케와 나미다카 타메이키카>
작사:타카하시 키쿠타로(高橋掬太郎), 작곡:고가 마사오(古賀政男)/1931년
[1]
酒は涙か 溜息か (술은 눈물인가 탄식인가)
사케와나미다카 타메이키카
心のうさの 捨てどころ (마음의 근심을 버리는 곳)
코코로노우사노 스테도코로
遠いえにしの かの人に (멀고 먼 인연의 그사람을)
토-이에니시노 카노히토니
夜毎の夢の せつなさよ 매일밤 꿈꾸는 꿈의 애달픔이여.)
요고토노유메노 세츠나사요
[2]
酒は涙か 溜息か (술은 눈물인가 탄식인가)
사케와나미다카 타메이키카
悲しい恋の 捨てどころ (슬픈 사랑을 버리는 곳)
카나시이코이노 스테도코로
忘れた筈(はず)の かの人に (잊어야 할 그 사람에 대한)
와츠레타하즈노 카노히토니
残る心を なんとしょう (남는 미련의 마음을 어찌 하리오.)
노코루 코코로오 난토쇼우
酒は涙か溜息か
https://www.youtube.com/watch?v=jEZIj5yg4WI
作曲家・古賀政男、作詞家・高橋掬太郎、歌手・藤山一郎の出世作となった大ヒット曲。
また、日本で最初にクルーナー唱法を取り入れた作品としても知られる。当時、古賀は新進作曲家として注目されはじめたばかりで、高橋は北海道で地方新聞の記者、藤山一郎は東京音楽学校(東京芸術大学音楽学部の前身)に在籍し将来を嘱望されたクラシック音楽生だった。
折からの世界恐慌による不況にも拘らず、発売直後から大ヒットし、当時の蓄音機の国内普及台数の4倍のセールスを記録したという。歌のヒットにより、のちに松竹映画『想い出多き女』、新興キネマ『酒は涙か溜息か』として映画も製作された。
[유행가 앨범] 일본에선 원망스러운 정, 고요한 장안(이애리수)
https://www.youtube.com/watch?v=F3mMNJqOk60
이애리수 - 고요한장안 kpop 韓國歌謠
1932년에 발표된 이현경(이기세), 전수린, 이애리수의 작품.
1절-인왕산 허리에 소쩍새울고 한강수 맑은물에 노 소리난다
2절-남산의 송림은 나놀던 터요 춘당대 푸른잔디 님자취로다,
3절-님 잃은 젊은이 애달파 마소 저 새가울고가면 달이 떠온다
4절-고요한 달빛에 잠들은 장안 그리운 님의품에 안겨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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