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4. 6. 06:46ㆍBeautiful People
그 노래 그 事緣
인생증언 ( 1974년 )
플레이보이 미움의 세월-'여자의 일생' 뒤돌아보니
주간여성(1974년 월호 미상) 김인건 기자
왕년의 인기가수 남인수(南仁樹 본명 강문수 )씨 부인 김은하(52)씨.
인기인의 아내는 슬프다. 30년대 대중의 우상이었던 가수 남인수, 그가 살아서 한창 화려했을 때 그의 주변엔 뭇여성들이 맴돌았다.
아내는 차라리 뒷전에서 외로움을 달래야 했다. 남인수는 한때 여가수 이난영과 살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는 타계한 지 어언 12년, 미망인 김은하여사(52)가 회고하는 이 나라 대중가수의 '아내의 엘리지'는 구슬픈 가락으로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그 분이 계시다면...
애수의 소야곡 - 남인수 / 1938
작사 : 이부풍 / 작곡 : 박시춘
https://www.youtube.com/watch?v=CJ-gZzMwH1w
'운다고 옛 사랑이 오리오마는 눈물로 달래 보는 구슬픈 이 밤...'
레코드의 전성기인 1930년대를 휩쓸었던 노래 '애수의 소야곡' 첫 구절이다. 이 노래로 데뷔와 함께 가요계의 톱스타로 군림했던 가수 남인수. 그는 대중가수로선 가장 화려한 활동을 하다가 간 사람이다. 무엇보다도 '남인수'란 이름은 우리나라 가요계에선 남성가수의 대명사처럼 불리었다.
그 찬란하고 화려한 이름의 뒤 쪽, 그늘에서 살아 온 사람, 부인 김은하(52)씨는 그러나 지금 고인에 대한 원망과 후회를 씹으며 살고 있다. 그것은 고인 남인수가 너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졌기 때문이다. 남인수는 62년 6월 26일 45살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부인 김은하씨는 그때 만 38살,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부인 김씨는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을 지난 12년 동안 눈물로 달래 온 것이다.
젊은 시절의 가수 남인수는 또 화려하고 멋들어진 플레이보이였다. 화려한 인기인을 남편으로 섬겨 온 아내에겐 말 못할 비애가 있었다. 그 비애를 참고 견딘 것은 노후의 보상을 기대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인수는 생전에 이런 기대마저 짓밟았었다. 지금은 옛 사랑이 된 여가수 이난영과 숨지기 직전까지 4년간이나 살았던 것이다.
남편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이 깊을수록 부인 김씨의 남편에 대한 원망과 슬픔도 깊어진다. 그래서 부인 김은하씨가 살고 있는 서울 연희동 연희시범아파트 자택 안방에는 고인의 영정 한 장도 걸려 있지 않다. 고인이 미워서가 아니라 부인의 토라진 심사 때문이다.
"이젠 모두 쓸데없는 일이죠. 그 분하고 살 땐 내가 너무 어리고 철이 없었지요. 지금 그 분이 계시다면 멋지게 조종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부인 김씨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한숨 쉬듯 말한다.
'운다고 옛 사랑이 오리오마는 눈물로 달래 보는 구슬픈 이 밤....'
유명 가수와 결혼
김은하씨는 마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용환씨는 마산의 갑부로 지금도 나이 든 어른들은 그 이름을 기억한다. 우국지사였던 아버지 김씨는 어느 해인가 3월 1일 서울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일본 경찰에 잡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그 후 이갑성옹과 의형제를 맺기고 했다. 아버지는 오랜 형무소 생활을 하고 있었다.
14살에 마산보통학교를 졸업한 은하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은하의 도일은 아버지가 부재중이어서 이뤄진 것이다. 아버지가 경영하던 동아일보 마산지국의 기자가 행선지 등을 주선해 주었다.
은하가 간 곳은 일본 동경에 있는 요시모도흥업이란 무용연구소였다. 보통학교 시절부터 춤을 잘 춘다고 해서 그의 도일을 알선해 준 기자가 선택해 준 곳이었다. 은하는 그 곳에서 아크로바트라는 일종의 곡예무용을 배웠다.
5년 후 빨리 귀국하라는 어머니의 편지를 받았다. 19살의 처녀가 되어 귀국한 은하는 어머니를 붙잡고 울었다. 집안은 풍비박산이 되어 있었다. 아버지가 옥고를 치르고 있는 사이에 아버지의 심복이었던 사람이 맡겨 놓은 인감으로 재산을 모두 빼돌려 아버지가 출감, 귀향했을 때는 알거지가 되어 있었다. 파산과 일제의 감시를 견디다 못한 아버지는 가족들을 이끌고 중국으로 망명 이주했다.
은하가 귀국했을 때 어머니(지난 해 80살로 세상을 떠남)는 혼자 귀국, 딸 은하를 시집보내고 다시 춮국하기로 되어 있었다. 가족을 잃은 은하는 당시 신인 인기가수였던 남인수(본명 강문수)에게 소개됐다. 시어머니 될 사람이 마산 갑부 집 딸이라고 해서 은하를 맞겠다고 열을 올리고 있었다.
남인수는 진주 사람이었다. 은하를 소개받은 남인수도 열을 올렸다.
23살의 남인수와 19살의 은하는 진주 근흥관이란 큰 요릿집에서 결혼했다. 화려한 예식이었으나 친정 식구론 어머니만 참석한 쓸쓸한 결혼식이었다.
청진 기생의 방문
신혼생활은 진주 수정동 시댁에서 시작했다. 은하의 신혼생활은 그러나 꿈같이 단 것이 아니었다. 1개월도 채 못 되어 어두운 그림자가 찾아들기 시작했다.
어느 날 진주의 신혼가정에 청진 기생이 찾아왔다. 남편은 박정하게 그를 돌려보내지 못했다.
"당신이 이해해 주구려"
남편 남인수는 간곡하게 사정하며 청진 기생을 집안으로 끌어들였다. 신부였던 은하는 펄펄 뛰며 거절을 해야 할지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청진 기생과 1개월여를 한 지붕 밑에서 동거했다.
남편은 집에 있는 날보다 밖에서 지내는 날이 많았다. 공연하러 다닌다고 했다. 남편이 쟁쟁한 가수임을 알고 결혼한 은하는 이를 이해하려 했지만 참기가 어려웠다. 갓 결혼한 신부에겐 낯선 시집에서 남편 없이 홀로 지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어느 날 평양에서 급한 기별이 왔다. 남편이 공연 중에 쓰러졌다는 것이다. 19살 새댁의 가슴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평양에 달려간 은하는 남편이 고질적인 폐결핵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쓰러진 남편을 안고 진주로 돌아온 은하는 남편 간호에 온갖 정성을 쏟았다. 이때부터 은하는 폐결핵에 관한 의학지식을 쌓기 시작했다.
신혼 초에 겪은 이 두 사건은 은하의 곡절 많은 앞날을 암시하는 무서운 사건이었다. 동시에 이 두 사건은 은하와 남편 남인수를 애정으로 묶은 사건이기도 했다.
은하는 청진 기생이 집에서 나간 후 결혼생활에 실망하고 집을 뛰쳐나갔다. 당시 안익초씨(작고한 한국계 스페인 음악가 안익태씨의 형)가 이끄는 '약초악극단'에 참여했다.
처녀시절 일본에서 배운 무용 솜씨가 밑천이었다. 가출한 아내를 백방으로 수소문한 남인수가 서울 모처에서 은하를 발견, 다시는 딴 여자를 가정에 끌어들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집으로 데리고 갔다. 불과 가출 1개월 만에 가정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러나 은하는 남편에 대한 신뢰와 애정을 품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에 평양에서의 각혈사건이 났다. 병원에 입원하기를 거부하며 아내 옆에서 치료하겠다고 남편은 어린아이처럼 우겼다. 병든 남편 남인수를 팔에 안고 있던 은하는 그 놀라움과 공포 가운데서 남편의 애정을 발견했고 애정을 쏟기 시작했다.
"이 분은 내가 옆에서 간호하지 않으면 언제 숨질지 모를 사람이다."
남편 남인수에 대한 은하의 헌신적인 애정이 시작된 것이다
(1940년대 가수들- 앞줄 오른쪽이 백난아, 가운데가 남인수. 문화콘텐츠닷컴)
애정에 눈뜬 부부
결혼 1년 7개월 만에 두 사람은 서울 현 경기고교 뒤 가회동에 집을 사고 서울로 이사했다. 애정에 눈을 뜬 두 사람은 떨어져 지내는 것이 서로 괴로웠다.
한옥이었던 가회동 집은 넓고 좋았다. 가수 남인수는 성격적으로는 지극히 꼼꼼한 가정적인 사람이었다. 집을 잘 꾸몄다. 또 주택은 넓고 좋은 것만 샀다. 서울로 이사했을 때의 남인수는 어마어마한 인기를 휩쓸고 있었다.
그가 노래를 시작한 것은 34년께부터였다.(주- 36년 데뷰가 옳음) 처음 남인수는 시에롱레코드사에 전속됐다. 첫 노래는 박시춘 작곡 '눈물의 해협'. 반응이 시원치 않았다. 동경의 동해상업학교를 졸업한(주-미확인 사항임) 남인수는 36년 OK레코드사로 옮겨 '사랑도 싫더라 돈도 싫어', '범벅 서울'을 불렀다.
박시춘씨는 '눈물의 해협'에 가사를 새로 붙여 남인수에게 다시 부르라고 했다. 작사자는 이부풍씨. 제목을 '애수의 소야곡'으로 달았다.
가사를 바꾼 이 남인수의 데뷰곡은 큰 히트를 기록했다. 뒤를 이어 '꼬집힌 풋사랑', '낙화유수', '물방아 사랑' 등 연달은 히트곡을 내놓았다.
남인수가 결혼하던 41년께 그는 가요계의 톱스타가 되어 있었다. 가회동 집엔 내객이 들끓었다. 당시 남인수의 가족이라곤 갓 낳은 첫딸까지 쳐서 3식구였으나 집안엔 항시 20여 명의 식구가 북적댔다. 가수지망생, 무작정 상경 소녀 등 군식구들이었다. 이들의 뒷바라지를 은하는 싫은 기색 없이 해 주었다.
남인수는 돈을 잘 벌었다. 번 돈은 또 꼬박꼬박 아내에게 갖다 주었다. 보통 1달에 1천원을 들여놓곤 했다. 전국으로 순회공연을 다녔고 심지어 만주까지 공연하러 다닌 남인수는 공연 스케줄만 빠지면 꼭 가정에 돌아와 안정하곤 했다. 이렇게 돌아올 적마다 몇 천 원씩 아내에게 내놓곤 했다.
레코드상에서 나오는 돈은 남인수 자신은 얼마나 되는지 모르고 지냈다. 그것은 은하의 소관업무였다. 레코드사에선 매월 2백 원이 월급으로 지급됐고 레코드 판매 기록에 따라 1더블당 몇 전이란 인세가 지불됐다.
은하는 이 돈을 차곡차곡 은행에 저금하곤 했다. 이 돈은 남편의 치료비와 세간 장만에 쓰였다.
술담배 못한 남인수
은하는 살림을 지나치리만큼 알뜰히 했다. 당시 그만한 수입이면 상류생활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은하는 극성을 부렸다. 식모도 두지 않으려 했다. 장작을 손수 패기도 했다.
당시의 연료는 장작과 조개탄, 연탄과 진흙을 사다가 물에 반죽하여 조개탄을 손수 만들어 말려 땠다.
또 장작은 당시 뚝섬에 들어오는 뗏목을 구입, 패서 썼다. 뚝섬에 들어온 원목을 트럭에 싣고 은하는 그 원목더미에 앉아 이리저리 흔들리며 가회동 집으로 갖고 온다. 마당에 끌어들인 원목을 장작 패는 품팔이꾼을 사서 모두 때기 좋게 팬 다음 뒷마당에 마르기 좋도록 쌓아서 말린 후 광에 적재해 놓고 한 겨울 동안 쓰곤 했다.
그것은 은하의 극성이었다. 아예 때기 좋게 패서 말린 장작을 사는 것보단 싸다고 해서 그 고생스러운 연료 장만을 하곤 했던 것이다.
사랑하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의 살림꾼다운 천성이 작용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실 이때 은하의 생활은 행복했다. 남편이 집을 비우는 지방공연 생활도 여전했고 기생이 졸졸 따라디는 것도 여전했다.
그러나 남편은 가정을 중심으로 생활했고 아내에게 애정을 쏟고 있었다. 지방공연 도중에 급한 기별이 오면 은하는 마치 의사가 진료가방을 들고 왕진 나가듯 약품상자를 들고 달려가곤 했다. 남편은 공연지에서 혈담이 조금만 나오면 아내에게 통지하곤 했다. 남편은 그만큼 의사보다도 아내를 신뢰하고 있었다.
은하는 남인수가 쓰러지면 조용히 쓰다듬고 요양시켜 다시 일으키곤 했다. 그랬기 때문에 남인수는 또한 아내 은하의 건강을 끔찍히 존중했다. 아내 은하가 장작을 패는 현장을 보면 펄펄 뛰곤 했다. 식모를 꼭 고용하도록 했기 때문에 은하는 남편이 있을 때는 부엌에도 들어갈 수 없었다.
남인수는 도박을 좋아했다. 도박으론 할 줄 모르는 것이 없었다. 당구 실력 3백 점이 란 것은 '짜다'는 것과 함께 잘 알려진 일.
경마, 개경주 등에도 재미를 붙이곤 했다. 경마장엔 꼭 아내를 동반했다.
카메라 촬영에도 재미를 붙여 독일제 라이카 등 고급 카메라를 수집하기도 했다.
시계는 1년에 한 번씩 새 것으로 갈아 찼다.
술은 마시지 못했다. 담배도 피우지 못했다. 담배를 배우고 싶어 냉수를 떠다 놓고 배우려 했지만 배우지 못했다.
그러나 '연애'는 잘 했다. '졸졸 따르는'여자들이 많았다. 특히 기생들에게 가수 남인수는 우상과 같은 존재였다. 인정 많은 남인수는 이들을 매정하게 뿌리치지 못해 '연애'를 해 주곤 했다. 기생들의 인기를 끌었던 것은 '꼬집힌 풋사랑' 등 기생의 탄식을 소재로 한 노래를 많이 불렀던 탓이기도 했다. 이런 남편을 위해 은하는 항상 마음을 썼다. 내복도 깨끗하게 입혔다. 외도할 때 내복이 정결해야 남편이 여자 앞에서 떳떳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외도하고 돌아오는 남편에게 싫은 기색도 하지 않고 싫은 말도 하지 않았다. 울컥하는 성미가 있는 남편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성나게 하면 오래 살지 못할까 봐 속을 누른 것이다. 이렇듯 스스로의 울화를 꾹 누르고 사는 은하는 때론 밥맛을 잃곤 했다. 식사를 제대로 못하면 젖이 잘 나오지 않아 또 고생을 해야 했다.
'가거라 삼팔선'의 감격
'아 산이 막혀 못 오시나요 아 물이 막혀 못 오시나요...'
조국 광복을 맞았다. 어느 분야에서 활약하던 사람들에게나 벅찬 감격을 안겨 주었다.
해방된 조국은 그러나 허리가 동강났다. 조국분단의 설움을 노래한 남인수의 '가거라 삼팔선'은 그래서 또 히트했다.
47년 9월 남인수는 '아시아'란 레코드회사를 설립했다. 미아리 공장을 차렸다. 레코드사 경영은 전 재산을 투입한 도박이었다. 당시 이 레코드사는 해방 직후 '신라의 달밤'을 불러 크게 히트했던 가수 현인이 시작한 럭키레코드사와 심한 경쟁을 벌이게 됐다.
경쟁은 파멸을 낳았다. 게다가 아시아는 제작기술까지 미흡했다. 낡은 레코드를 재생, 디스크를 뽑아내는 것이었는데 원형판에 재료를 녹여 부은 후 원형판의 한 쪽이 떨어지지 않곤 했다. 은하는 미아리 공장에서 공원들에게 밥지어 주는 일을 맡아 했다.
그러다가 6,25를 맞았다. 남인수는 군 연예대에 참가했다. 백인엽 장군이 제주도 모슬포의 제1훈련소장으로 부임할 때 남인수를 포함한 연예대원을 데리고 갔다. 1년 가까이 제주 생활을 했다.
제주에서 부산으로 나온 후 다시 남편의 무대생활이 시작됐다.
남인수 - 이별의 부산 정거장/1954
작사 : 호동아 / 작곡 : 박시춘
https://www.youtube.com/watch?v=gh3Z5CkS8A0
'서울 가는 십이열차에 기대 앉은 젊은 나그네...'
53년 환도가 시작되면서 나온 '이별의 부산정거장'. 남인수가 힘차게 부른 이 노래는 가족과 재산을 잃고 피난살이에 시달려 온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메아리졌다.
남인수 일가도 환도했다. 그러나 환도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또 병으로 쓰러졌다. 이번은 척추 카리에스란 병이었다. 남인수는 가족을 이끌고 고향 진주로 내려갔다.
진주로 내려갈 때 그는 척추를 움질일 수 없어 당구대 위에 반듯이 누어 트럭에 실려갔다.
고향에 온 그에게는 약값은 커녕 생계비마저 넉넉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아내 은하가 서울서 갖고 온 당구대를 펼쳐 놓고 당구장을 차렸다.
병석에 누운 남인수는 '사상의학'이란 한방서적을 구해다가 탐독했다. 그리고 약초를 사들이고 스스로 처방을 내어 탕약을 지어 먹었다. 1년을 가까히 꾸준히 탕약을 복용한 남인수는 마침내 병석에서 일어났다. 다시 상경한 그는 한때 을지로 3가에 '국제당구장'이란 당구장을 차렸다. 은하는 또 이곳에서 카운터로 일했다.
이난영 사건
59년 남인수는 대한가수협회를 결성, 초대 회장이 됐다. 그리고 선배가수 고복수시의 은퇴공연을 협회에서 주관했다.
'고복수 은퇴공연'은 은하의 운명에 치명적인 그림자를 던지는 계기가 됐다. 은퇴공연이 끝난 후 고복수, 김정구씨 등과 함께 불행한 선배가수들을 돕기로 약속했다.
첫 대상이 된 가수는 이난영(당시 47살). 6,25 때 남편 김해송씨가 납북되어 간 후 이난영은 실의에 빠져 그만 마약중독자가 돼 있었다.
남인수는 목포의 눈물 ~ 가수 이난영과의 로맨스로 유명하다.
작곡가 김해송의 부인이었으나 한국 전쟁 때 남편이 실종되면서
남인수의 도움으로 김해송이 운영하던 악단을 운영했다.
그의 집을 방문, 참담한 생활을 하고 있는 이난영을 본 남인수는 어떤 책임을 느꼈다. "내가 그를 구해 줘야지." 남편은 그 후로 이난영의 집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리고 끝내 그를 마약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었다. 그러나 그러는 사이에 남인수 자신은 이난영에게 중독되어 버렸다. 동거를 시작했다.
은하는 그만 절망해 버렸다. 결혼 20년 동안 남편의 바람기엔 체념하다시피 하며 살았지만 이런 사태 앞에선 남편에 대한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은하는 가정을 동댕이치고 친정인 마산으로 내려갔다. 마산엔 어머니 한 분이 살고 있었다. 친정에 내려가 은하는 서울과의 연락을 일체 끊고 '눈 감고 귀 막은' 생활을 했다.
4년 후인 62년 6월 큰딸이 달려왔다. 아빠가 위급하다고 했다. 남편이 쓰러지면 약광우리를 들고 달려가던 버릇대로 딸의 손목을 쥐고 상경했다. 남편은 메디칼선터에 누워 있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얼굴을 덮고 있었다.
"너무 늦었구나!"
그날로 퇴원수속을 밟고 충무로 5가 전셋집 2층으로 환자의 병상을 옮겼다. 퇴원한 지 여드레 만에 남인수는 고질적인 폐결핵으로 눈을 감았다.
장례식은 연예협회장으로 7월 1일 서울 조계사서 치뤘다. 은하는 이난영에게 함께 상복을 입어 주길 청했다. 식장에선 고인의 히트송 '낙화유수','애수의 소야곡'이 연주됐다. 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에 은하는 '산홍'이란 전주 기생으로부터 보내진 조화 다발을 보았다. 산홍은 일찍이 은하가 본 일이 있는 기생이었다. 그는 남편을 생명의 은인이라고 했었다. 남편을 따르는 여인들 중에선 밉지 않은 여자였다. 묘지는 고향 진주의 선영에 썼다.
남인수가 간 후 은하는 함께 상복을 입었던 이난영과 형제처럼 지냈다. 이난영의 나이가 위여서 오히려 은하가 그를 언니라고 불렀다. 이난영이 68년 세상을 떠났을 때 은하는 진정 슬퍼서 울었다. 이젠 믿고 의지할 사람이 없었다. 시집 쪽으론 친척이 없었다. 남인수는 3대 독자였다.
김은하씨는 딸 둘, 아들 둘을 낳았다. 위로 딸들은 모두 출가했고 아버지 남인수의 장례식 때 12살짜리 상주로 동정 어린 시선을 모았던 맏아들 강대우군은 벌써 23살로 현재 공군에 입대, 군복무 중이다. 막내둥이 대익군은 올해 19살, 대학 1학년에 재학 중이다. (끝) <김인건 기자>
*자료/남인수팬클럽 회보 제1호(2002/09)
낙화유수 1942 남인수
落花流水낙화유수 1942 남인수 南仁樹
趙鳴岩조명암 작사, 李鳳龍이봉룡 작곡
https://www.youtube.com/watch?v=80vKmgT7SQw
조명암 작사 [ 문인영(박남포)=半夜月반야월 개사 ]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봄에
새파란 젊은 꿈을 역은 맹세야 [ 새파란 잔디 얽어 지은 맹세야 ]
세월은 흘러가고 청춘도 가고 [ 세월에 꿈을 실어 마음을 실어 ]
한 많은 인생살이 꿈같이 갔네 [ 꽃다운 인생살이 고개를 넘자 ]
이 강산 흘러가는 흰 구름 속에
종달새 울어 울어 춘삼월이냐
봄 버들 하늘하늘 춤을 추노니 [ 홍도화 물에 어린 봄 나루에서 ]
꽃다운 이강산에 봄맞이 가세 [ 행복의 물새 우는 포구로 가자 ]
사랑은 낙화유수 인정은 포구
오면은 가는 것이 풍속 이러냐 [ 보내고 가는 것이 풍속 이러냐 ]
영춘화 야들야들 곱게 피건만 [ 영춘화 야들야들 피는 들창에 ]
시들은 내 청춘은 언제 또 피나 [ 이 강산 봄소식을 편지로 쓰자 ]
낙화유수 - 소리사랑
https://www.youtube.com/watch?v=HK94Hv1AGg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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