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인수 동상 제막, 유족들 39년만에 묘소 참배

2025. 4. 6. 07:04Others...

01.06.26 17:12최종 업데이트 01.06.26 21:13

 

남인수 동상 제막, 유족들 39년만에 묘소 참배

진양호 언덕에 건립, 신해성 등 원로 가수 대거 참석 축하

 

진주에 있는 '가요황제 남인수 동상'.

ⓒ윤성효2018.10.05

 

“노래는 가장 정직한 시대의 언어, 그 불멸의 노래 혼이 조국 강산에 여울진 추모의 정에 겨워 진양호 언덕에 우뚝 섰으니 그 뜨거웠던 노래 가슴으로 들을 지어다.”

 

26일 남인수 39주기를 맞아 진양호 옛 선착장 입구에 세워진 동상 비문의 일부 내용이다.

‘가요 황제’로 알려진 남인수(1918~1962)는 본명이 강문수로, 진주시 하촌동 출신이다.

대중음악가의 동상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세워졌다. 남인수 기념사업회(회장 이창식)는 “위대한 예술가의 숨결과 족적을 진동시키고자 한다”면서, 동상 제막의 의미를 이같이 말했다.

 

이날 묘소 참배와 동상제막, 추모공연에는 현재 미국러스베이거스에 거주하고 있는 미망인 김순옥(예명 김은하, 80) 씨와 장남 강대우 씨가 참석해 의미를 더했다.

동상 제막에 앞서 이날 오전 하촌동 산 중턱에 자리잡은 묘소에서 열린 제향에는 미망인과 아들, 남인수기념사업회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김순옥 여사는 눈물을 머금은 채 목이 메여 말문을 열지 못했다. 남편의 묘소 앞에서 그녀가 내뱉은 말은 길지 않았다. “여보. 미안하오. 39년만에 당신이 사랑했던 장남(강대우)과 왔소. 할 말이 없구려….”

유족들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는 물음에, “교회에 다니고 있어서 제삿날에 목사를 초청해 집에서 기도를 올렸다”고 말했다.
유족들은 남인수가 별세한 뒤 서울에서 머물다가 미국으로 떠났다. 강대우 씨는 85년 미국으로 떠나기 전 묘소를 참배하기도 했다. 미망인이 남편의 묘소를 참배한 것은 39년만의 일이었다.

남인수 동상은 부산 대남병원 오성광 이사장이 기금을 내고, 조각가인 동아대 김학제 교수가 설계해서 세워졌다.
지난 26일 오후 2시, 비가 내리는 속에 열린 동상 제막식에는 경향각처에서 500여명의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원로가수 신해성 금사향 신카나리아 은방울자매를 비롯해, 설운도 조항조 이명주 등도 동상 제막을 축하해 주었다. 서울에서 원로가수를 비롯해 100여명이 참석했다.

대남병원 허일만 행정실장이 대신 읽은 축사에서 오성광 이사장은 “남인수 선생과 살아 생전에 아무런 인연은 없다. 언젠가부터 남인수 선생의 노래를 즐겨 듣게 되었다. 노래를 들으면 들을수록 매료가 되었고, 음반이며 시디를 수집하기 까지 했다”라고 말했다.

동상 건립 기금 출연에 대해 오 이사장은 “지난해 진주에서 열린 추모공연을 보고 감명을 받았고, 사업회에서 갖가지 추모사업을 계획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동상 건립 기금 출연 의사를 밝혔다”라며, “동상이 건립되면 전국에서 남인수 선생을 흠모하는 많은 사람들이 찾게 되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청동으로 만든 동상은 높이가 3미터이고, 받침대를 포함해 6.5미터 크기로 세워진다. 그리고 동상은 미소를 잃지 않고 우아하고 섬세한 미남형의 모습을 하고 있다. 남인수 동상은 명함을 들고 노래 부르는 모습을 하고 있다. 동아대 김학제 교수는 “남인수 선생과 인연이 깊은 원로가수 신해성 씨의 조언을 받아, 다섯 종류의 사진을 놓고 고증을 거쳐 동상을 만들었다”라고 말했다. “평소 자신의 명함을 들고 노래를 불렀다는 이야기를 듣고, 남인수의 이미지를 최대한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라고 그는 말했다.

김학제 교수는 부산미술대전 심사위원을 지냈고, 97년 부산국제영화제 상징 조형물 현상공모에 작품이 당선되어 그의 작품이 부산 남포동 거리에 있는 중견 조각가다.

한편, KBS-TV ‘가요무대’는 6월 27일 경남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 촬영한 프로그램을 남인수 특집으로 오는 7월 9일 밤에 방영할 예정이다. 김동건 씨 사회로 남인수가 불렀던 ‘명곡’들을 후배 가수들이 부른다.

다음은 동상 제막을 축하해 동상 제막식에서 박노정 진주문인협회장이 낭독한 축시 전문이다.

그대 노래 아직도 끝나지 않아
- 남인수 동상건립에 부쳐

박노정(시인·진주문인협회 회장)

왔다하면 보릿고개 부황난 시절
먹성 입성 두루 다 챙길 틈 없지
달랑 불알 두쪽 차고 가출한 사람
애나애나 진주 촌놈 강문수(姜文秀) 라네

쌍놈입네 딴따라라
별의별, 입방아도 뒤따랐지만
그대 하늘이 내려주신 그 목소리 하나 챙겨
“삼천리 방방곡곡 아니간 곳 없다마는
내고향 진주만은 진정 못해라…”
불멸의 국민가수 가요계의 황제되어
그대 돌아온 어머니 품안, 진주시 하촌동 194번지

“고요히 창을 열고 별빛을 보면
그 누가 불러주나 휘파람소리…”
1937년 그대 열창, 애수의 소야곡
수천 수만의 가슴에 파고들어
이 나라 골골샅샅 울려퍼져 나갔거니

그대 저 봄 언덕
한 때의 노고지리가 아니라
달도 하나 해도 하나 조국도 하나
사무치게 그리던 그 하나, 그 노래
빛으로 생명으로 활활 타 올랐네

그대 노래 아직도 끝나지 않아
그대 부려 놓은 일천곡의노래 메들리로 엮어져
남강물에 제 곡조로 실렸네
시방도 하염없이 흘러흘러 가고있네

그대 이름 이리도 펄펄 살아 있는 날
그대 모습 동두렷이 떠오른 날

그대 새삼 한 곡조 신나게 뽑아 보시라!

<가수 남인수는 누구인가>

강문수는 1918년 진주 하촌동에서 태어난다. 1935년 5월 당시 씨에론 레코드사의 문을 두드렸던 중학생복 차림의 17세 소년이 바로 그다. 테스트를 받은 이 소년은 박시춘을 만난다. 이듬해 5월 OK레코드사에 입사하고, 당시 주목을 받지 못했던 <눈물의 해협>의 가사를 바꿔 1938년 1월 부른 <애수의 소야곡>이 ‘최고의 미성가수’로서 그 인기의 절정을 가져오게 했다.

그해 3월에 <꼬집힌 풋사랑>, 39년 <청춘야곡> <감격시대> 11월에는 <항구의 청춘시>의 인기 절정은 가늠키 힘들 정도였다. 이듬해인 1940년 정월 <울며헤진 부산항>이 발표되었고, 일제는 내선일체사상을 고취하기 위하여 일본 동보영화사의 여배우 도로로 기유끼고가 일본말로 <애수의 소야곡>을 <애수의 세레나데>라고 하여 발표하기까지 했다.

계속하여 남인수는 <서귀포 칠십리> <낙화유수> <어머니 안심하소서> 등의 힛트곡을 냈으며 당시 무대에 처음으로 가수가 등장하는 시대를 맡게 되었다.

해방 이후 부른 <가거라 38선>이 힛트했고, 조국이 둘 될 수 없다는 노래 <달도 하나 해도 하나>를 불렀다. 이후 진주 출신인 작곡가 이재호의 <산유화>, 나화랑의 <무너진 사랑탑>, 박시춘의 <청춘고백> 등 200여곡을 취입했고, 레코드와 무대에 바쁜 몸은 <겹치기 출연>이라고 하는 유행어를 처음으로 만들기도 한 장본인이었다.

4·19 이후 최초로 결성된 가수협회 초대회장으로 선출되어 단체활동에도 선생은 두각을 나타내셨고 5·16이후 한국연예협회 초대 부이사장에 피선되셨다. 이는 남인수의 말년의 인간적인 면모를 재평가하는 계기도 되어 과거 유행가수를 천시하는 사람들에게 가수의 가치관을 확립시켜 주기도 했다.

1962년 6월 26일 오후 2시 그 무더운 날 ‘가요 황제’는 지병의 한계에 도달하고, 숨을 거두고 만다. 장례는 한국 최초로 ‘연예인장’으로 열렸으며, 그를 애도하는 사람들은 조계사에서 불광동 고개까지 행렬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를 이컫는 수식어는 형언키 어려울 정도다. ‘가요계의 전설적인 인물’ ‘불멸의 가인’ ‘국민가수’ ‘가요 황제’ ‘세기에 하나 있을까 말까하는 가수’ 등.
고향 진주에 한 줌의 잿덩어리로 와서 하촌동 산 기슭에 ‘예술인 강문수’라는 빗돌 하나를 앞에 두고 잠들어 있다. 지금으로부터 39년전에 님은 가셨지만, 그의 노래는 지금도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오마이뉴스(시민기자)

 

南仁樹銅像

경상남도 진주시 판문동

 

 

 

 

위의 상복 여성은 부인 김은하씨로 추정됨

 

 

위의 소복 여성은 연인 이난영씨로 추정됨

 

남인수 장례식 1962년 연예인장, 조계사

https://www.youtube.com/watch?v=DkcTEp_8zAg

 

Oct 8, 2017

춘하추동방송 연결글 http://blog.daum.net/jc21th/17783271 http://blog.daum.net/jc21th/1778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