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류씨(瑞山柳氏) 유래1

2024. 5. 27. 07:23The Story from Me

 류지미 2022. 3. 29. 15:07

 

 

서산 류씨(瑞山 柳氏)는 충청남도 서산시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역사

시조 류공기(柳公器)는 고려조에 관직이 합문지후(閤門祗候)에 이르렀으며, 사후에 증손 류숙(柳淑)이 귀해지자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수문전대학사(修文殿大學士)·감수국사(監修國士)·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에 추증되었다.

일반적으로는 문화(文化) 류씨 9세 류순(柳淳)의 3남인 류성간(柳成澗)이 서녕부원군(瑞寧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이 때부터 서산을 본관으로 삼아 분적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믿기 어렵다. 『문화 류씨 가정보』(1565)나 『씨족원류』(17세기) 등의 공신력 있는 족보에서는 류성간의 이름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문화 류씨와 서산 류씨를 서로 연관지은 기록들은 아래와 같다.

  • 『해동잡록』(1670년) : 류방선(柳方善)을 문화 류씨 7세인 합문지후 류공권(柳公權)의 후손이라고 했는데, 합문지후가 마지막 관직이었던 인물은 류공권이 아니라 류공기이다.
  • 『류방선 행장』(1721년) : 정규양(鄭葵陽)이 지었으며, "영의정(領議政) 휘(諱) 성간(成澗)에 이르러 서녕(瑞寧)에 봉해지면서 자손이 비로소 서녕 사람이 되었다."는 기술이 등장한다.
  • 『문화 류씨 정사보』(1797년) : 류순의 아들로 류성간이 새로이 등재되었다.

본관

서산(瑞山)은 충청남도 서산시의 지명이다. 백제 때에는 기곡군(基谷郡)이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 한 후 757년(경덕왕 16)에는 부성군(富城郡)으로 이름을 바꾸어 지육현(地育縣:서산시 지곡면 일대)과 소태현(蘇泰縣:태안군)을 관할하였다. 1144년(고려 인종 22)에는 현으로 개편되었다가, 1284년(충렬왕 10) 서주군(西州郡)으로 승격하였고, 1308년(충선왕 1)에는 서주목(西州牧)으로 승격하였다. 1310년에 서녕부(瑞寧府)가 되었다가 후에 서주(瑞州)로 강등되었다. 1413년(태종 13)에 서산군(瑞山郡)으로 개칭되었다. 1895년(고종 32) 홍주부 서산군, 1896년에 충청남도 서산군이 되었다. 1914년 태안(泰安)‧해미(海美)를 서산에 통합하였다. 1917년에는 서녕면이 서산면으로 개칭되었고 1942년 서산읍으로 승격하였다. 1989년에 서산읍이 시로 승격되어 분리되고, 태안군이 복원되어 분리되었다. 1995년 서산군이 서산시에 통합되었다.

 

 

이상은 위키백과에서 인용한 것이며, 이하 서산 류씨(瑞山 柳氏) 유래 瑞山柳氏 大宗會의 입장이다.

 

서산 류씨(瑞山 柳氏) 유래 1

~瑞山柳氏 大宗會~

 

瑞山柳氏 뿌리

 

1. 瑞山柳氏 뿌리는 누구이며 文化柳氏에서 分籍한 姓氏가 맞는가?

瑞山柳氏는 高麗 王族 후예로 휘칭모성(諱稱母姓)의 귀족인 고유한 瑞山柳氏이며 文化柳氏에서 分籍한 姓氏가 아니다. 우리 瑞山柳氏 뿌리에 대하여는 2015년 譜系辨證版 瑞山柳氏族譜 乙未譜가 발행되기 전까지는 지난 4백여 년 동안 세상에 잘못 알려져 내려온 것이다. 이는 2015년 을미보 편찬과정에서 문헌학적으로 고증된 자료들을 수집 분석한 結語이다. 여기에서 문헌학적 고증이라 함은 고려ㆍ조선 양 시대에 조정에서 발간했던 각종 공문서격인 고문헌으로 규장각, 서울대 중앙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정부관련 부처 등에서 소장하고 있는 영구적인 국가기록물을 뜻한 것으로 논증 자료들은 을미보 제1권 제1편 10~34쪽 보계변증 문에 상세히 기재되어있다. 세칭 삼산이주(풍산, 서산, 선산, 전주, 진주) 류씨는 文化柳氏 始祖 柳車達의 후손이 아니라는 역사적 사실이 여러 고문헌에 의하여 명약관화하게 들어났기에 타 사류(四柳)는 1982년 이후 문화류씨시조 柳車達의 系譜에서 이적하여 제 각기 문헌학적으로 고증된 始祖를 1世로 하여 보계변증판 족보를 이미 편찬하였다. 우리 서산류씨가 뿌리를 제대로 탐구하려면 구보(舊譜)에 의한 단견에서 벗어나 先祖에 관한 역사문헌의 고증자료, 王車柳三姓古代世系, 高麗聖源譜와 文化柳氏族譜에 기재된 내용을 확인대조하여 엄정하게 판별 하는 절차가 필수이다.

 

瑞山柳氏 시조 휘成澗은 고려왕실의 천자수모법(賤者隨母法)에 따라 諱稱母姓者(母系 성씨)로 父系는 고려 11대 王 文宗의 제13子 辰韓공의 長子인 進安伯 기(沂)이고 母系는 15代 肅宗과 王妃인 明懿王后(柳洪의 딸)에서 태어난 大寧宮主 柳氏로 고려 宗姓연구회에 의하여 판명 되었다. 즉 成澗公은 고려왕족의 혈통보존을 위한 왕실 법제에서 근친 혼인으로 태어나시어 모계 성씨인 柳氏를 이어 받은 왕족이시다.(본 항은 문헌상 기록은 없으나 관련 문헌에 의하여 궁구한 추론이다 - 고려 역사 문헌 자체가 유구한 세월과 외세로 인하여 보존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고려초기부터 忠宣王(26대 1308~1313)에 이르는 동안 왕족들은 거의 근친 혼인을 했고 왕실을 떠나는 왕자왕손들은 왕씨 성을 쓰지 못하고 母의 姓 즉 外家의 성을 따르도록 법으로 정한 것이 천자수모법으로 변성을 법제화한 것이다. 바로 이 제도로 인하여 왕족 출신 류씨가 13本貫의 시조를 이루게 되었고 그 중 12本貫은 高麗史, 高麗聖源譜, 文化柳氏世譜에 근거하여 上下代를 정확이 찾아냈으나, 딱 한 계열 즉 進安伯 沂와 大寧宮主柳氏를 이은 下代 柳氏本貫을 찾지 못한 것과 아울러 瑞山柳氏만이 유독 母系柳氏 上代를 찾지 못한 단절의 일치점이 있는 것이다. 비록 정확한 기록으로는 찾지 못 했지만 高麗聖源譜 38쪽에 進安伯 沂의 配로 大寧公主柳氏肅宗女○此派后孫諱稱柳氏로 기록 되어있고 무후가 아니므로 後代가 분명히 있다는 뜻이 되며 進安伯 沂의 弟 演이 바로 晋州柳氏 시조의 上代父系임이 확인된 이상 왕족후손 12류씨 본관 이외에 進安伯 沂와 配大寧公主柳氏 후대를 이은 다른 한 류씨본관이 있어야 체계상 맞다 할 것이다. 이러한 논증과 관련 기록에 근거하여 휘成澗의 上代 父系는 進安伯 沂이고 上代 母系는 大寧公主柳氏로 추정함은, 유일하게 잃어버린 下代와 유일하게 못 찾고 있는 上代가 연결되는 합치가 되는 것이고 또한 進安伯 沂와 휘成澗의 출생년도인 서기 1100년경이 부합함으로 조끔도 그릇된 변증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삼산이주류씨와 문화류씨의 원파록(源派錄-고증되지 않은 전설적 기록)에 의하면 서산류씨와 문화류씨가 뿌리부터 다른 기원은 서기 809년, 車承穡(차승색,慶州車氏)이 신라 좌상을 지내다가 모반(謀反)에 실패하고 황해도 신천군 유주 구월산에 은거하면서 車承穡에서 柳穡으로 변성명 할 때부터이다. 류색(원명 차승색)에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장자 車恭叔이 아버지의 변성명에 따라 柳叔으로 변성명 하였고 柳叔(변성명 상태라 貫이 없음)의 5世가 柳車達이며 고려 건국 서기 918년에 대승공에 오르면서 비로소 문화류씨가 처음 생겨났고 류차달은 문화류씨 득관시조가 되었으며 이때 류차달의 장자 柳孝全을 車氏로 복귀시켜 車孝全으로 延安車氏始祖가 되었고 차자 柳孝金은 문화류씨 대를 이어 온 것으로 원파록에 기록되어있다.

 

류색의 차자 原名 車恭道는 중국 江南으로 피신하여 本姓인 王氏(王祖明 기원전 1878)로 복귀 王恭道가 되었고 이 王恭道의 4世(증손)가 바로 고려태조 王建이며 그 후예들이 왕실 법에따라 柳氏宮主들과 근친혼인하여 代를 이은 성씨가 賤者隨母法에 따른 母系 성씨의 여러 왕족 柳氏가 파생된 것이고 그 중 한 성씨가 바로 우리 서산류씨이다. 즉, 서산류씨와 문화류씨가 뿌리(柳穡)에서 갈라진 것은 문화류씨가 생기기 109년 이전 부터이다.

 

이와 같이 瑞山柳氏를 포함 여러 왕족류씨와 문화류씨는, 모든 류씨의 發源 遠祖格인 柳穡(변성명 상태라 貫이 없음)에서부터 갈라졌기 때문에 문화류씨의 現存 최초 大譜인 가정보(嘉靖譜)에 서산류씨와 선산류씨는 아예 등재조차 안 되어있고 삼산이주 중 풍산, 전주, 진주는 移封파로 분류하여 형식적으로 겨우 移封派祖의 이름만 기재되어 있을 뿐 자손은 등재되어 있지 않다. 三山二州柳氏 이외 여덟 王族 柳氏는 애당초 문화류씨에 입적하지 않고 종중의 원 뿌리를 지켜 온 것이다.

 

2. 文化柳氏世譜 嘉靖譜(가정보1565년)에 瑞山柳氏는 없다.

瑞山柳氏가 원래 文化柳氏에서 분적된 성씨라고 주장하려면 무엇보다도 文化柳氏世譜 가정보(嘉靖譜)에 기재내용을 먼저 확인하고 이해하는 절차를 거쳐야 이치에 맞다 할 것이다. 그 이유는, 현존하는 족보 중 가장 오래된 문화류씨족보가 가정보이며 嘉靖44년 朝鮮明宗20년 서기 1565년에 “文化柳氏世譜”로 명명 발행 되었고 현재 국립중앙도서관 6층에 영인본이 소장(열람 청구기호 古2518-系59-30-1)되어있으며 그 족보에는 文化柳氏始祖 柳車達大丞公을 위시 23世까지, 외손은 5세까지를 포함하여 姓名이 소상히 등재되어있다. 문화류씨 23世는 곧 우리 서산류씨 14世와 같은 代數이기 때문에 우리 서산류씨가 문화류씨에서 분적 한 것이 사실이라면 서산류씨 14세손까지는 가정보에 등재되어있어야 비로소 분적 했다는 주장이 성립 되는데 서산류씨 시조를 위시 14세손까지 아무도 가정보에 등재 되어있지 않는다. 즉 가정보에 의해서도 서산류씨는 문화류씨와 같은 종족 관계가 아님을 확증하고 있는 것이다. 가정보는 무려 24년 동안(1541~1565)을 거쳐 편집 되었고 당시 三道 觀察使(경상, 전라, 청홍=충청)를 비롯하여 守令등 대소 관원과 실무종사자 300여명이 총 동원되어 방대하고 정확한 자료를 전국에서 수집하여 발행한 족보가 바로 가정보라고 復刊辭에 기록되어 있는데 거기에 우리 서산류씨 선조는 단 한 분도 등재되어 있지 않는데도 서산류씨가 문화류씨에서 분적 되었다 함은 논증에 전혀 맞지 않는 것이다. 文化柳氏 嘉靖譜와 瑞山柳氏관계는 아래 표에 상술 되어있다.

 

3. 가정보 이후 문화류씨족보에 수록된 서산류씨 관계.

(1) 文化柳氏世譜 己巳譜 1689년 발행 - 우리 서산류씨가 최초로 문화류씨족보에 등재 된 것은 1689년 柳處厚가 저작한 文化柳氏族譜 己巳譜이다. 그 기사보에 문화류씨 9世 淳의子 중 네 번째로 “子成澗 ○封瑞山○故大譜不載”라고 간단하게 수록되어있는 것이 전부이다. 위 “○封瑞山○故大譜不載” 중 ○표는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청구기호 古2518-59-61)되어있는 기사보 영인본이어서 정확히 판독 할 수는 없으나 앞뒤 문장으로 보면 “四子成澗은 부쳐 들어온 瑞山柳哥이어서 태초족보(문화류씨가정보)에는 등재되어 있지 않다”라는 뜻이다. (原文의 封앞에字를 移字로 봐 移封 즉 부쳐 들어온 뜻으로 해석한 것은 그 후 족보들에 移封으로 명확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2) 文化柳氏世譜 甲子譜 1864년 발행 -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있는 45간 문화류씨족보 중 서산류씨관계를 가장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수록되어 있는 족보가 바로 이 甲子譜임을 확인하였다. 이 甲子譜는 1864년(1862始役)에 발행 된 것으로 우리 서산류씨 시조 成澗公의 방주(旁註=註釋)에는 “子成澗-卿相封瑞寧君仍貫瑞山後遺敎子孫 還貫文化○前譜錄公於此兄弟行而但漏其子孫矣庚譜始錄故今亦依庚譜載錄”으로 되어있다. 국역하면, “成澗公은 벼슬이 재상에 오르시어 서령군으로 작호가 봉해졌고 이로 인하여 관향이 서산이다. 후에 유교(遺敎=遺命=임금이나 부모가 임종할 때에 하는 명령)에 따라 자손이 관향을 문화로 돌려놨다. 이전 족보에는 公에 대한 기록에 형제간의 기록만 있을 뿐 그 자손은 누락되어 있다. 경신보(1740 문화류씨 경신보)에 최초로 수록되어 있으므로 이번에도 경신보에 적혀 있는 기록을 따르다”의 뜻이다.

 

(3) 文化柳氏世系 派譜 1898년 발행 - 문화류씨 4세 盧一을 派始로하여 수기로 되어있는 단권 파보이다. 여기에도 成澗公을 “卿相封瑞寧君遺敎子孫還貫文化”으로 되어있다. 국역하면, “成澗公은 벼슬이 재상에 오르시어 서령군으로 작호가 봉해졌고 후에 유교에 따라 자손이 관향을 문화로 돌려놨다”의 뜻이다.

 

위 세 족보에 따르면, 서산류씨를 문화류씨족보에 등재하면서도 명시적으로 분류해서 문화류씨 친계가 아니고 이봉(移封=부쳐 들어온 파)파이며 서산류씨 자손이 부모의 유교(遺敎)에 따라 관향을 문화류씨로 바꾸어 들어왔다고 기록되어있으며 반면에 어디에도 서산류씨는 원래 문화류씨에서 갈라져 나갔다는 기록은 전무 하다. 실체가 이러함에도 모든 문헌적 근거를 덮어버리고 우리 서산류씨는 문화류씨에서 분적한 성씨라고 주장 한다면 누가 믿겠는가? 또 그러할 이유가 왜 있는가?

 

서산류씨(瑞山柳氏) 유래2 , 계속

 

 

 

瑞山柳氏祭壇, 공소단(孔昭壇) 설단(1974년)

 

서산류씨 시조 瑞寧府院君 위시 실전된 11위의 선조 제단(祭壇)으로 충청남도 서산군 인지면 남정리 산82(공소동),

당시 미등기 상태인 서령류씨문숙공파(서산류씨 8세 계손파) 소유 임야에 서산류씨대종회 자산으로 설단하여 연례 종중 제향을 모셔 오다가 1991년 서령류씨문숙공파에서 불법으로 서산류씨선조 비문을서령류씨로 손괴 이후부터는 서산류씨후손은 아무도 참예하지 않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