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 문학가 백석

2024. 8. 10. 02:26Korean Arts

인용  < 백과사전 >

193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 문학가

백석

출생 1912년   사망 1996년  

한동한 잊혀졌던 민족 시인

 

국토 분단은 우리에게서 많은 것을 앗아간다. 한국 현대사에서 분단이야말로 한반도 사람들의 피할 수 없는 상처이며, 비극의 원체험인 것이다. 분단은 온갖 상실과 망각, 이산의 고통으로 덧나고, 다시 아물고, 덧난 상처의 자리다. 남북 분단은 대륙으로 나아가는 길을 끊어놓고, 그 결과 한반도에서의 삶을 고립 무원(孤立無援)의 협소하고 남루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부여 · 발해 · 여진과 같은 나라 이름이며, 흥안령 · 아무르 · 송화강 같은 땅과 강 이름······. 이런 것은 모두 저 ‘바깥’에 있다. 대륙과 단절된 반도는 말 그대로 밖으로 열린 길이 끊겨버린 섬이다. 그 섬에서 잊혀진 한 시인의 이름이 떠오른다. 백석(白石, 1912~1996). 이 천재 시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의 시를 본 사람은 더욱 드물다. 몇몇 문예 연구자만이 나중까지 그의 이름을 기억할 뿐이다.

함흥의 영생고보에서 영어 교사로 있을 때의 백석

 

백석은 1912년 7월 1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에서 수원 백씨 시박(時璞)과 단양 이씨 봉우(鳳宇)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난다. 그의 아버지 백시박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사진 기술이 있던 이였다. 본명이 기행(夔行)인 백석은 오산고보를 다니는데, 학과목 중에서 특히 문학과 영어에 관심과 소질을 보인다. 그는 오산고보를 나온 뒤 집안 사정으로 진학하지 못하고, 고향에서 책을 읽으며 소일한다. 그러다가 1929년 조선일보사 후원 장학생 선발 시험에 붙어 일본의 아오야마학원 전문부 영어사범학과에 들어간다.

 

1930년 그는 열아홉 나이로 『조선일보』 신춘 문예에 응모해 당선되는데, 이 등단작은 시가 아니라 「그 모(母)와 아들」이라는 단편 소설이다. 1934년 아오야마학원 졸업과 함께 교원 검정 시험에 합격한 백석은 귀국한 뒤 바로 조선일보사에 입사해 계열 잡지인 『여성』의 편집을 맡는다. 그는 같은 해 『조선일보』에 산문 「이설(耳說) 귀ㅅ소리」를 비롯해 번역 산문 「임종 체홉의 6월」 · 「죠이쓰와 애란(愛蘭) 문학」, 1935년 『조선일보』에 단편 「마을의 유화(遺話)」 등을 발표한다. 백석의 초기 단편들은 노쇠한 부부, 죽음 등 삶의 어두운 일면과 연관된 황량한 분위기로 채색되어 있는 것이 많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 부문으로 발길을 돌리면서 이런 분위기는 거의 사라진다.

 

백석이 구체성을 특징으로 하는 소설보다 감정을 웬만큼 은폐할 수 있는 시로 전향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시를 쓰게 된 것은 창작 이외의 문단 활동은 일절 꺼린 폐쇄성과, 집에 돌아와서는 병균을 염려해 늘 손과 얼굴을 씻1) 은 그의 유난스런 결벽증과 관련이 깊어 보인다는 뜻이다. 어쨌든 그는 1935년 『조광』에 시 「정주성(定州城)」 · 「산지」 · 「주막」 · 「나와 지렝이」 · 「비」 · 「여우 난 곬족(族)」 · 「흰 밤」 등을 발표한다.

 

백석이 1936년 조광인쇄주식회사를 통해 펴낸 첫 시집 『사슴』은 우리 문학사에서 독특한 시의 영역을 구축하게 된다. 『사슴』은 백석이 신문사 번역 일을 하는 틈틈이 준비한 초기작 33편을 담은 시집으로, 발간 뒤 문단으로부터 호평을 받는다.

반(反)도시 산촌 성격이 잘 드러나는 백석의 첫 시집 〈사슴〉

총 33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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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겨울, 백석은 두 해 동안 묶여 있던 신문사 교정직을 버리고,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위해 산간 마을이 많은 함경도로 간다. 그는 이 때의 전후 상황을 같은 해 9월 『조선일보』에 실린 산문 「가재미 · 나귀」라는 글을 통해 밝힌다. 여행을 즐기던 그는 이 무렵 여러 고장을 돌아다니며 고유의 민속, 명절, 향토 음식 같은 갖가지 풍물과 방언 등을 취재해 시에 담아낸다. 이런 풍물과 방언은 특히 「남행 시초(南行詩抄)」를 기점으로 이후 해마다 나오는 백석의 기행시 형식의 연작시에서 잘 표현된다.

 

이 밖에도 같은 해 백석은 『조선일보』와 『조광』과 『시와 소설』에 「통영(統營)」 · 「오리」 · 「탕약(湯藥)」 · 「연자ㅅ간」 · 「황일(黃日)」 등을, 1937년 『조광』에 「함주 시초(咸州詩抄)」 연작시를, 『여성』에 산문 「가을의 표정 ― 단풍」을 발표한다.

가난한 내가 /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 눈은 푹푹 날리고 /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탸샤와 나는 /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 눈은 푹푹 나리고 /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일부, 『여성』(1938. 3.)

 

백석은 눈 덮인 함경도 산간 지방의 고적한 여인숙에서 「함주 시초」를 비롯한 여러 시편을 쓰면서도 가슴 한구석에 구멍이 난 것처럼 자꾸 허전한 느낌이 든다. 두 해 전에 친구 허준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잠깐 본 이화여고 학생 ‘란(蘭)’, 지난 가을 영생고보 선생들과의 회식 자리에서 만난 ‘자야(子夜)’, 그리고 영생고보 학내 분규로 퇴학당한 애제자 고순덕의 얼굴이 착잡하게 스쳐 지나간다.

 

1938년 백석은 영생고보 교사직을 사임하고 서울로 와서 다시 『여성』의 편집을 맡는다. 그는 같은 해 『조광』에 「산중음(山中吟)」 연작시와 「물닭의 소리」 연작시, 『삼천리문학』에 「석양」 · 「고향」 · 「절망」, 『여성』에 「설문답」 · 「내가 생각하는 것은」 · 「가무래기의 약(藥)」 · 「멧새 소리」 등을 발표하고, 『현대 문학 전집』에 「외가집」 · 「개」와 『조선 문학 독본』에 「고성 가도(固城街道)」 · 「박각시 오는 저녁」 등을 수록한다.

 

이 무렵 백석은 동료 기자 신현중에게 이끌려 란의 집을 찾게 된다. 란을 보는 순간 백석의 심장은 터질 듯 쿵쾅거리고, 혈관은 펄떡거린다. 백석은 자신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은 통영 출신의 처녀 란에게 끝내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 못한다. 사랑 고백은 차치하고 그는 재입사한 지 열 달 만에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만주로 떠나버린다. 그는 떠나면서 소설가인 친구 허준과 화가 정현웅에게 “만주라는 넓은 벌판에서 시 1백 편을 건져오리라.”고 말한다.

조선일보사 재직 시절 함께 근무하던 화가 정현웅이 그린 백석의 프로필

1939년 6월 〈문장〉에 실린다.

 

1940년 1월 만주 신징(新京)에 도착한 백석은 먼저 시영 주택 황씨방(黃氏方)에 방을 얻는다. 곧 이어 친구들의 도움으로 만주국 경제부에 자리를 얻고 나중에 일본인들의 횡포에 못 이겨 그만둘 때까지 시작(詩作)과 직장일에 충실한다. 당시 친구와 함께 살던 황씨방은 토굴이나 마찬가지여서 주말마다 그는 근교의 러시아인 마을로 방을 얻으러 돌아다닌다. 이런 일로 북만주 오지의 원시 부족 사람들과도 얼굴을 익히게 되고, 밤이면 ‘시 1백 편’을 건지기 위해 시작에 몰입한다. 1939년 『조선일보』에 산문 「입춘」과 연작시 「서행 시초(西行詩抄)」와 시 「안동」을, 『문장』에 「함남도안(咸南道安)」 · 「동뇨부(童尿腑)」 · 「넘언집 범 같은 노큰마니」 등을 내놓은 그는 이어 1940년 『문장』에 「목구(木具)」 · 「북방에서」 · 「허준(許俊)」 등을 발표한다.

 

백석은 서른 살도 되기 전에 한반도에서 가장 뛰어난 서정 시인으로 입지를 굳힌다. 그의 시는 발표될 때마다 화제를 낳고, 그의 시가 실린 잡지는 책방에 나오기 무섭게 팔려나간다. 뒷날 백석의 명편 「남신의주(南新義州) 유동(柳洞) 박시봉방(朴時逢方)」을 실은 잡지 『학풍(學風)』은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시인들은 과연 얼마나 이 고고한 시인에 육박할 수 있으며, 또 능가할 수 있었더냐.”2) 고 백석을 극찬한다.

백석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이 실린 잡지 〈학풍〉

 

같은 해 백석은 『인문평론』에 「수박씨 호박씨」를 발표하고, 조광사에서 토머스 하디 원작의 「테스」를 번역해 발간한 뒤, 이듬해에는 생계를 위해 만주에서 측량 보조원과 측량 서기로 일한다. 1941년 그는 『문장』에 시 「국수」 · 「흰 바람벽이 있어」 · 「촌에서 온 아이」, 『인문평론』에 「사포나 이백(李白)같이」, 『조광』에 「귀농(歸農)」 등을 발표한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 정책이 강화되면서 백석은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여기저기 떠돌며 산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3) “이미 해는 늙고 달은 파리하고 바람은 미치고 보래구름만 혼자 넋없이 떠도는”4) 것이다.

 

1942년 만주 안둥(安東)의 세관으로 직장을 옮긴 그는 엔 패아코프의 원작 소설 「밀림 유정」을 번역한다. 한편, 그가 만주에 있는 동안 동료 김소운은 백석의 시 「산우(山雨)」 · 「미명계(未明界)」 등 7편의 작품을 일본어로 옮겨 『조선 시집』에 싣는다.

 

해방 뒤 귀국한 백석은 신의주에서 얼마 동안 머물다가 고향 정주로 가서 1947년 『신천지』에 「적막 강산」, 『신한민보』에 「산」을 발표하고, 1948년 『신세대』에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학풍』에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문장』에 「칠월 백중」 등을 발표한다.

 

고향 정주에서 남북 분단을 맞게 된 그는 이후 소련 시인 이사고프스키의 서정시를 번역하고 김일성 환영회에서 「장군 돌아오시다」라는 즉흥시를 낭송5) 했다는 후문이 있지만, 그 밖의 행적은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아무튼 시대의 격랑이 시인을 가만둘 리 없었을 터······. 북한의 어느 문학 단체에도 가입하지 않은 그는 연금과 집필 금지 등의 수난을 겪은 듯하다. 결국 북한 문인 인명록에서조차 이름이 삭제되고, 1963년 쉰한 살의 나이로 숨졌다는 소식이 일본에 알려질 뿐이다. 이렇게 1930년대의 한 뛰어난 서정 시인은 남녘에서는 기피되고, 북녘에서는 금지된 채로 잊혀간 것이다.

 

토속성과 모더니티

 

이 시기 ‘구인회’를 비롯한 모더니스트들의 서구적 취향과 달리 백석은 영문학을 전공한 시인이면서도 또다른 향토 시인 김소월이 무색할 정도로 작품 속에 북녘 지방의 토속 방언들을 꽉꽉 채워넣는다. 마가리, 개니빠디, 잠풍, 몽둥발이, 벌배, 열배, 매감탕, 토방돌, 아릇간, 홍게등, 텅납새, 무이징게국, 가즈랑집, 깽제미, 물구지우림, 둥글레우림, 광살구, 모랭이, 노나리꾼, 청밀, 냅일눈, 곱새담, 앙궁, 고뿔, 갑피기, 게사니, 울파주, 나주볕, 땃불, 밭최뚝, 마ㅌ, 양지귀······. 고조곤히, 지중지중, 쇠리쇠리하야, 씨굴씨굴, 째듯하니, 자즈러붙어, 벅작궁, 고아내고, 너들씨는데, 오구작작, 살틀하던, 임내내는, 이즈막하야, 깨웃듬이, 홰즛하니······. 이처럼 이제는 거의 들을 수 없는, 들어도 무슨 말인지 가늠하기 힘든 북방 언어들. 백석의 현저한 토속어 지향의 시 세계는 한국인의 얼과 넋을 황홀할 정도로 빼어나게 담아낸다.

 

백석은 이미 표준어가 정착한 시기에 창작 활동을 한 문학인이다. 신문사의 편집 일을 맡기도 한 그는 표준어와 방언의 차이를 잘 알았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굳이 방언을 고집한 것은 작품 세계의 심화를 위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가 구사한 방언은 용례가 매우 구체적이고 세밀해서 한국어의 질량을 한껏 느끼게 해준다.

 

아울러 백석 시의 방언 구사는 아이의 시각과 목소리로 이루어지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명절날 나는 엄매 아베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 //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루에 베 한필을 짠다는 벌하나 건너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리(新里)고모 고모의 딸 이녀(李女) 작은 이녀(李女) / 열여섯에 사십(四十)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며 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土山)고모 고모의 딸 승녀(承女) 아들 승(承)동이 / 육십리(六十里)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산(山)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옷이 정하던 말 끝에 섧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곬고모 고모의 딸 홍녀(洪女) 아들 홍(洪)동이 작은 홍(洪)동이 / 배나무접을 잘 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 섬에 반디젓 담으러 가기를 좋아하는 삼촌 삼촌엄매 사촌누이 사촌동생들 // 이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옷의 내음새가 나고 /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뽁운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것들이다. //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외양간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 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 밤이 깊어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래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돋구고 홍게닭이 몇 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랫목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침 시누이 동서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틈으로 장지문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백석, 「여우 난 곬족」 전문, 『조광』(1935. 12.) ― 시집 『사슴』(1936)에 재수록

〈사슴〉에 실린 시 가운데 〈여우 난 곬족〉

 

 

이 시의 화자는 명절날 어머니 아버지를 따라 할머니집에 가서 지낸 경험 세계를 그리고 있다. 또래의 아이들과 놀다가 잠이 드는 광경, 명절날의 분위기와 풍속 등에서 유년의 태도와 시각과 목소리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방언은 고향의 언어이고 유년 시절에 습득한 언어다. 따라서 방언으로 표출되는 고향 마을의 풍물과 정취는 생생함을 불러일으키며, 유년의 목소리에 실린 방언은 한결 자연스럽고 친근감을 준다.

 

백석의 시 속에 나오는 평안도 방언을 비롯한 여러 가지 언어는 분명히 우리 나라의 어느 한구석에서 쓰이던 토속어가 틀림없다. 그럼에도 꿈결인 듯 이와 같은 소리를 읊조리는 시인의 노래는 때로 영어나 불어 또는 이 세상 어떤 언어보다 귀에 익지 않고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한편, 그는 몇 작품을 제외한 많은 작품에서 자신의 주관적 감정을 철저히 억누르는 극도의 절제를 발휘한다. 바로 이런 것이 백석을 모더니즘적 시인으로 불리게 하는, 그러면서도 다른 모더니즘 시인들과 구별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반도시(反都市) 산촌(山村) 성격은 백석의 시를 더욱 독특하게 보이도록 한다. 시집 『사슴』에는 총 33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중에서 도시 문명 또는 도시 감각에 바탕을 둔 시는 한 편도 없다. 흔히 백석의 시에 나오는 시골은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공간이 아니라 안온하고 풍요로운 전원으로 비친다. 이로 말미암아 그의 시는 현실과 동떨어진 것으로 비판되기도 한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면에는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슬픔과 그리움을 삭이려는 시인의 힘겨운 얼굴이 숨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즉, 백석 시의 시적 공간은 현실에서 유년 시절 시골의 농가나 토방으로, 그리고 할머니와 무당의 옛날 이야기에 실려 동화나 전설, 때로는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주술적 공간으로 다양하게 변화한다. 그런데 과거에 대한 동경이나 몽상 또는 신비 세계에 대한 집착은 현실에 강한 거부감을 느낄 때 일어나곤 하는 현상이다. 백석의 시 또한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되지만, 현실의 고통과 번민을 초월하려는 시인 나름의 진지한 모색이라는 점에서 생명력을 지닌다.

 

이처럼 절제된 감정으로 토속성과 개성 있는 모더니티를 추구한 백석은 1940년 만주에 있을 때 이역에서 사는 비겁함과 부끄러움 그리고 고독감이 너무도 절실해 감정을 더 감출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따라서 이 무렵에 씌어진 백석의 시에서 우리는 바로 얼마 전까지 토방에 앉아 신화를 꿈꾸던 아이 대신 갑작스레 늙어버린 시인과 마주치게 된다.

아득한 옛날에 나는 떠났다 / 부여를 숙신(肅愼)을 발해를 여진을 요(遙)를 금(金)을, / 흥안령(興安嶺)을 음산(陰山)을 아무우르를 숭가리를. /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 / 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다. / ······ // 나는 그때 / 아무 이기지 못할 슬픔도 시름도 없이 / 다만 게을리 먼 앞대로 떠나 나왔다. / 그리하여 따사한 햇귀에서 하이얀 옷을 입고 매끄러운 밥을 먹고 단샘을 마시고 낮잠을 잤다 // 밤에는 먼 개소리에 놀라나고 / 아침에는 지나가는 사람마다에게 절을 하면서도 / 나는 나의 부끄러움을 알지 못했다. // 그동안 돌비는 깨어지고 많은 은금 보화는 땅에 묻히고 가마귀도 긴 족보를 이루었는데 / 이리하여 또 한 아득한 새 옛날이 비롯하는 때 / 이제는 참으로 이기지 못할 슬픔과 시름에 쫓겨 / 나는 나의 옛 한울로 땅으로―나의 태반(胎盤)으로 돌아왔으나 // 이미 해는 늙고 달은 파리하고 바람은 미치고 보래구름만 혼자 넋없이 떠도는데 // 아, 나의 조상은 형제는 일가 친척은 정다운 이웃은 그리운 것은 사랑하는 것은 우러르는 것은 나의 자랑은 나의 힘은 없다 바람과 물과 세월과 같이 지나가고 없다.

백석, 「북방에서」 일부, 『문장』(1940. 7.)

 

이처럼 ‘북방에서’ 나라를 버린 수치심과 고독에 떨던 시인은 모든 절망스럽고 슬픈 현실을 거부하기보다 차츰 하늘이 정한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껴안는 자기 긍정에 도달하게 된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 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 가난하고 외롭게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도연명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일부, 『문장』(1940. 4.)

1977년 실천문학사에서 나온 〈백석 전집〉

 

남신의주(南新義州) 유동(柳洞) 박시봉방(朴時逢方)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 바로 날도 저물어서 /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 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 또 문밖에 나가디두 않구 자리에 누어서, 머리에 손깍지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 내 가슴이 꽉 메어올 적이며, /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텬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 어늬 먼 산 뒷옆에 바우 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 어두어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 『학풍』(1948. 10.)

남녘과 북녘의 문학사에서 다 같이 배척되어 20세기 한국 문학사에서 그 이름이 지워질 뻔한 백석을 망각의 강에서 건져낸 이들은 남녘의 몇몇 문학 연구자들이다. 물론 같은 시대의 시인 오장환은 “풍경의 묘사와 조그만 환상을 코닥크에 올려놓은 스타일만 찾는 모더니스트”라고 백석의 문학을 깎아내리기도 했지만[오장환, 「백석론(白石論)」, 『풍림(風林)』 통권 5호(1937)], 그 뒤 연구자들은 백석의 시에 대해 평북 방언과 토속 정서의 치밀하고 섬세한 재현으로 한국인의 원형적 삶의 풍경을 되살려낸 문학으로 높이 평가한다.

1948년 10월 『학풍』에 발표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은 백석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다. 이 작품은 1999년 『한국일보』에서 기획한 「21세기에 남을 한국의 고전」 가운데 21세기에 남을 한국의 시 10편 중의 1편으로 선정된다. 후학 시인 김명인은 이 시가 “삶을 달관하고 현실의 갈등을 고요하게 수렴”하는 “수용력과 자기 성찰의 자세”가 돋보이는 작품이라고 평가한다[김명인, 「백석 시고(白石詩考)」, 고형진 편, 『백석』, 새미 작가론 총서 4권 1996].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은 백석이 남녘에서 발표한 마지막 작품에 해당한다.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는 거칠고 험한 삶의 정황에도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이를 딛고 나아가려는 시인 자신의 굳건한 삶의 의지가 투영된 이미지일 것이다. 어느 한 곳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 고달프게 떠돌아야 하는 삶의 질곡으로 말미암아 터져 나오는 식민지 지식인의 절규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시의 부름켜 아래 고요히 녹아 있다. 이 시에 나타난 체념과 달관의 언어들이 실어 나르는 것은 자연―인간의 합일 정신, 삶을 있는 그대로 껴안으려는 수용 자세, 그리고 “굳고 정한 갈매나무”처럼 흔들리지 않는 시인의 확고한 의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