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서까지 이용 당했다"…김구 첫사랑 내보낸 김일성

2024. 8. 20. 04:15Others...

"죽어서까지 이용 당했다"…김구 첫사랑 내보낸 김일성

신복룡2024. 8. 18. 05:00

 

■ 신복룡의 해방정국 산책

「 타협 없이 대립으로 치닫는 오늘날의 정치 상황은 좌우로 나뉘어 극한 대결을 하던 해방정국 풍경과 닮았습니다. 오늘의 '추천! 더중플'은 '신복룡의 해방정국 산책'(https://www.joongang.co.kr/plus/series/225)입니다.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가 인물 중심으로 해방 직후 한국 현대사를 인물 중심으로 들여다봅니다. 제 4부 '남북협상'편 제 1화를 무료로 공개합니다.

'The JoongAng Plus(더중앙플러스)'는 지혜롭고 지적인 독자들을 위해 중앙일보의 역량을 모아 마련한 지식 구독 서비스입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더중앙플러스 구독 후 보실 수 있습니다.

 

제79주년 광복절을 맞아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의 연재글을 중앙북스에서 단행본으로 엮었습니다. 서점과 인터넷에서도『해방정국의 풍경-인물로 돌아보는 대한민국 현대사』(중앙books)를 만나보시죠.

 

■ 제 4부

「 〈제 4부〉남북협상이라는 신기루
① 평양서 김구 맞이한 첫사랑…김일성에 철저히 이용당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4116

② 아버지는 자결, 조부는 친일…北 택한 홍명희 ‘기구한 3대’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5569

③ 홍명희는 아들과 맞담배했다, 부자간 치열했던 ‘이념 논쟁’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7215

④ 北이 꾸민 가장 기만적 모임…‘남북협상’ 비극으로 끝났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8833

「 〈제4부〉 남북협상이라는 신기루 」

「 ①김구와 김일성의 다른 계산 」

김구와 김규식이 주도한 남북협상

 

1948년, 해방된 지 3년이 지난 후였으니 한국인은 희망에 부풀어 있을 법도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유엔은 1948년 8월 15일에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한다는 일정에 따라 5월 10일을 총선거 실시일로 준비하고 있었다. 이제 남북한에 각기 다른 정부의 수립, 곧 분단을 확인하는 절차만이 남아 있었다. 더욱이 남한에서는 제주 4·3 사건이 최악의 사태로 치닫고 있어 좌우익 사이에는 적의가 팽배해 있었다.

1948년 4월 남북협상 회의장에 입장하는 김일성과 김구. 김일성이 앞장서고 김구가 뒤따라가는 구도가 북한의 의중을 절묘하게 보여준다. 중앙포토

 

1948년 연초가 되자 남북협상 문제가 해방정국의 새로운 이슈로 대두했다. 이 문제의 주도권을 잡은 사람은 김규식(金奎植)이었다. 그리고 김구(金九)가 가세했다. 이 일련의 움직임은 단정파의 승리가 가져온 충격에 대한 반사작용이었다. 1948년 2월 23~26일, 입법의원에서 단독 선거를 40대 0으로 가결했다.

 

단정과 분단이 현실로 다가옴으로써 김규식은 새로운 정치적 돌파구를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분단이 가시화되는 시점에서 남북협상은 명분을 세우기에 좋은 계기가 됐다. 그 무렵 김구도 이승만에 대해 열패감을 느끼기는 마찬가지였다. 김구가 애초에 민족통일을 염원했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도 없지만, 그는 이승만의 정치적 적수가 되지 못하고 끝내 이승만의 단정론에 말려들어 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기된 김규식의 남북협상론은 김구의 정치적 입지를 만회하는 데 유리한 계기가 됐다.

 

2월 8일에 김구와 김규식이 유엔한국위원단의 메논(K. P. S. Menon) 의장을 만나 남북 요인 회담을 제청했다는 사실이 정가에 퍼지기 시작했다. 그런 과정에서 두 사람은 서울 주재 소련 대표부를 경유해 북한의 김일성(金日成)·김두봉(金枓奉)에게 남북협상을 제의하는 편지를 발송했다. 희망의 불씨인지, 체념인지 국민의 반응은 착잡했다. 당시 김구가 더 적극적이었다. 그는 남조선 단독정부의 수립을 반대하는 ‘3천만 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라는 성명서를 통해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서울신문 1948년 2월 11~13일)고 선언했다.

김일성의 또 다른 계산

김구와 김규식의 편지를 받았을 때 상황은 복잡했지만, 김일성의 계산과 결심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1948년의 상황이 되면 남한의 우익 및 미군정이 단정의 수순을 밟고 있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북한은 이미 인민위원회 조직을 완성했고, 나름대로 단정 수립의 수순을 밟고 있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자신이 먼저 단정을 추진했다는 역사의 비난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터에 받은 김구와 김규식의 제안이 그에게는 밑지는 거래가 아니었다.

 

김일성으로서는 남쪽이 먼저 주도권을 잡고 일을 추진함으로써 자신이 마치 끌려가는 듯한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는 남한의 제안을 못 들은 것으로 하고, 자신이 전혀 새롭게 남북 협상을 제의하는 형식을 취했다. 곧 김일성은 3월 15일에 6개 정당·사회 단체 명의로 남조선의 단정 반대 17개 정당·사회 단체가 4월 초 평양을 방문해 정치협상을 열자고 제안했다. 남한 대표로 김구·조소앙·김규식·홍명희·이극로(李克魯)·박헌영(朴憲永)·허헌(許憲)·김원봉(金元鳳)·백남운(白南雲)·허성택(許成澤, 남로당 중앙위원) 등 15명을 초청했다.

 

그렇다면 김일성은 김구를 어떻게 인식했을까? 1948년 초까지도 북한은 김구의 노선을 제국주의의 주구(走狗)로 격렬하게 비판하면서 김구를 ‘김구(金狗)’라고 불렀다. 그런데도 애초부터 김구를 주목한 것은 그의 정치적 비중뿐 아니라 그의 입을 통해 이승만의 단정 의지를 규탄함으로써 자신들의 단정 추진을 합리화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회의의 일정을 늦추는 한이 있더라도 김구가 도착하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방침이었다.

 

만약 김구와 그의 일행이 회의를 파탄시키고 퇴장하면 그때는 그들을 미국 간첩으로 몬다는 계획까지 수립했다.(『레베데프 비망록』, 1948년 4월 19일) “귀국 후 별별 짓을 다 하던 김구가… 이전에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던 것이 이제는 미 제국주의자들의 입에 먹히게 되니까 당황하여 평양에 오려 한다”(『조선노동당대회자료집』(1), 1980, 262쪽)는 것이 당시 북한 지도자들의 눈에 비친 김구의 모습이었다. 따라서 “김구를 희생양으로 삼을 수도 있다”(『슈티코프 일기』, 1947년 1월 21일)는 것이 애초부터의 전략이었다.

옛 연인 안신호와 재회한 김구

김구가 북행하던 4월 19일 오전 5시 반쯤부터 경교장(京橋莊)에는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 등 청년 학생 140여 명이 김구의 북행을 만류했으나, 김구는 “이번에 가서 성과가 없다면 차라리 3·8선에서 배를 가르리라”는 말을 남기고 평양으로 향했다. 김구는 아마도 자신이 분단이라는 제단의 순교자임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김구는 손수건 하나 챙기지 못하고 경교장 뒷문으로 빠져나갔다.(도진순 교수, 창원대) 건강이 나빠 북행할 수 없을 것 같던 김규식은 4월 21일에 병간호할 부인과 함께 승용차 편으로 북행에 올랐다.

평양 대보산 영천암에서 헤어진 지 50년 만에 다시 만난 김구(가운데)와 안신호(왼쪽 둘째).

 

김구가 평양에 도착했을 때 환영객 가운데 곱게 차린 한 할머니가 있었다. 낯이 익었다. 그 여인은 김구가 50년 전에 헤어진 첫사랑 안신호(安信浩)였다. 안창호(安昌浩)의 여동생이었는데 두 남녀는 결혼까지 마음먹고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무슨 생각(?)이었는지 안창호는 동생을 양주삼(梁柱三, 뒷날 감리교 감독이 됨)에게 시집 보낼 계획을 하고 있던 터라 두 사람의 결혼은 깨져버렸다. 안창호는 왜 김구를 매부로 삼으려 하지 않았을까? 『백범일지』(도진순 주해, 1997, 187~189쪽)에는 그 여인과 헤어짐으로 말미암은 김구의 아픔이 아리게 묘사돼 있다.

 

안신호는 대단한 미인이었다고 한다. 김구는 상처를 입었고, 안신호도 상처를 보듬으며 두 남자가 아닌 제3의 남자에게 시집을 갔다. 남자는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법인데, 50년 전에 헤어진 여인을 만난 김구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북한이 그 여인을 환영객으로 내보낸 것은 김구의 연정(戀情)을 자극하려 했음이 분명했다. 김구가 아무리 심지 굳은 사람이었고 이미 칠순 노인이었다 하더라도, 회의 내내 심란했을 것이다.

 

4월 19일 저녁 6시, 평양시 모란봉 극장에서 연석회의의 막이 올랐다. 회의에는 북측에서 북로당 60명, 민주당 40명 등 15개 정당·단체 대표 300명이 참석했고, 남쪽에서는 남로당 39명, 사회민주당 7명 등 31개 정당·단체 대표 245명이 참석했다. 전체 참가자는 695명이었다. 통일을 논의하기에는 너무 많은 인원이었다. 김규식은 몸이 아파 오전 회의에는 나가지 못했다가 이튿날부터 참석했다. 김규식의 북행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허약한 몸으로 아내의 부축을 받으며 북행한 그는 자리를 채워준 것에 지나지 않았다.

 

회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회의를 하다가도 “김일성 (장군) 만세”를 불렀다.[독립운동가 장건상(張建相)의 회고담] 참가자들이 일제 시대에 옥살이한 햇수를 모두 합치면 746년9개월이라는 점을 보고함으로써 민족주의적 성향을 부각했다. 남한 대표의 자격으로 등단한 김구는 “조국이 없으면 민족이 없고 민족이 없다. 그러므로 현 단계에서 우리 전 민족의 유일 최대의 과업은 통일 독립의 쟁취”(조선일보 1948년 4월 24일)라고 호소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이용당한 김구”

4월 25일에는 김일성광장에서 환영 군중 집회를 열었는데 동원된 인원은 30만 명 정도였다. 김구와 김규식은 요인 회담을 요청했다. 김구·김규식, 김일성·김두봉의 ‘4김 회담’은 4월 29일과 30일 두 차례 열렸다. 김구·김규식은 이 자리에서 김일성·김두봉에게 남한에 대한 전력 공급과 송신 재개, 남한의 연백(延白)평야에 대한 농업용수 송수, 조만식(曺晩植)의 월남 허용, 중국 여순(旅順)에 있는 안중근(安重根)의 유해 이장 등을 요구했다. 조만식의 월남은 되지도 않을 요구였다.

평양에서 열린 남북협상에서 강연하는 김구. 그때까지 북한은 태극기를 국기로 사용했다. 중앙포토

 

김구는 다시 김일성과의 단독 회담을 요구했다. 김구의 요청에 따라서 5월 3일 김일성과 두 사람의 회담이 성사됐다. 이 회담은 5시간 동안 계속됐는데 분위기는 좋았다. 김구는 북한에 억류된 한독당원들의 석방 문제, 조만식과의 면담 허용, 전력 문제 등을 요구했다. 김일성은 김구의 독립당원들을 검거 투옥한 것이 아니라 테러분자를 체포·투옥했다고 대답했다. 이 자리에서 통일을 걱정하는 구체적 논의가 없었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그런데 북한은 평양 회담 당시에 김구가 김일성에게 정치적 망명을 타진했다고 선전했다. 곧 김구는 미국인들이 자신을 탄압한다면 이북에서 정치적 피난처를 구할 수 있는가를 물었고 김일성은 긍정적으로 대답했다는 것이다.[1985년 8월 일본 월간지 세카이(世界) 보도] 그리고 김구는 “지난날의 죄과를 털어놓으면서 여생을 편안히 보낼 수 있도록 과수원을 차려 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김일성은 “김 선생(김구)이 남조선에 나가서 투쟁하다가 어려우면 다시 북조선에 들어오시라 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어 김구가 김일성에게 임시 정부 주석의 직인(職印)을 내놓으면서 “앞으로는 장군님이 국가의 지도자이시니 이를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은 “우리에게는 그저 인민 대중의 두터운 신임이 있으면 됩니다”라고 거절했다는 주장이다(『김일성 저작집』(4), 1979, 303~304쪽).

 

이 대목은 매우 미묘해 주의가 필요하다. 김구가 평양에 갈 때 직인을 가져갔으나 그것은 남북한의 합의가 이뤄지면 권위 있게 날인하기 위한 것이었지 김일성에게 ‘헌상(獻上)’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과수원 문제는 망명한다거나 구걸의 뜻이 아니라 김구가 자기 고향도 이북(해주)인데 노후에는 통일된 고향에 돌아가 과수원이나 운영하면서 여생을 마치고 싶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그런데 김정일은 영화 ‘위대한 품’(1986)에서 이 일화를 과장해 극화했다. 이완범(한국학중앙연구원)은 이 대목을 거론하면서 “김구는 김일성·김정일에게 살아서도 이용당하더니 죽어서도 이용당했다”고 평가했다. 정치인에게는 가야 할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이 있다. 이제 돌아보면 김구의 북행은 가지 말았어야 할 길이었다.

 

 

■ 📝 '신복룡의 해방정국 산책' 목차

「 〈제 1부〉 이승만과 김구의 만남과 헤어짐
① 여인과의 만남은 박복했다…출신 다른 이승만·김구 공통점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36303

② 레닌 금괴가 임정 갈랐다…이승만-김구 ‘결별’ 세 장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37987

③ 좌우 대립의 ‘불편한 진실’…右는 우익, 左는 좌익 죽였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39731

④ 가슴 따른 자, 머리 못 이긴다…김구와 이승만 ‘정해진 운명’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42924

〈제 2부〉 여운형과 김규식의 만남과 헤어짐
① 임정과 밀정, 그리고 여운형…김구 측근은 권총 빼들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44524

② “대물 여운형” 점찍은 美군정, 병약남 김규식에 눈 돌렸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46200

③ 미국은 양다리를 못 참았다, 중도파 고집한 여운형 최후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47586

④ ‘좌우합작’ 허구의 희생자들…중도파, 비극적 해프닝 맞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48952

〈제 3부〉 송진우와 장덕수, 중도파의 비극적 운명
① 송진우의 ‘찬탁론’ 와전됐다, 기어이 총을 쏜 광기의 시대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0770

② 누가 장덕수를 암살했나…이승만·김구 그때 갈라섰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2422

〈제 4부〉남북협상이라는 신기루
① 평양서 김구 맞이한 첫사랑…김일성에 철저히 이용당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4116

② 아버지는 자결, 조부는 친일…北 택한 홍명희 ‘기구한 3대’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5569

③ 홍명희는 아들과 맞담배했다, 부자간 치열했던 ‘이념 논쟁’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7215

④ 北이 꾸민 가장 기만적 모임…‘남북협상’ 비극으로 끝났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8833

〈제 5부〉박헌영, 한 공산주의자의 사랑과 야망
① 박헌영, 이 가혹한 호적등본…생모는 첩, 직업 주막업 기재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60650

② 남편 동지의 아이 가졌다…박헌영 아내의 ‘접촉사고’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62281

③ 스탈린은 박헌영 의심했다…모스크바 면접장서 생긴 일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63860

④ '운명의 여인’ 현앨리스 재회…박헌영 죽음의 빌미 됐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65466

〈제 6부〉해방정국의 3대 비극
①항쟁이냐 공산폭동이냐…1946년 '대구 사건'의 진실(상)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67163

②혁명도 빨갱이 폭동도 아니다, 좌우가 왜곡한 대구사건 진실(하)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68831

[참고문헌]
김일성, 『민족 대단결을 위하여』(평양:로동당출판사,1996)
『김일성 저작집(4)』 (평양:조선노동당출판사,1979)
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장건상편』(민음사,1988)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돌베개,1997)
『레베데프 비망록』 1948. 4. 19.
서울신문, 1948.2.11~13.
『슈티코프일기』 mimeo.
이완범, ‘김구, 남북협상, 대한민국 수립’, 한국정치외교사학회 심포지움(2015.4.23)
『조선노동당대회자료집(1)』(국토통일원,1980)
조선일보.1948.4.24.;194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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