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8. 22. 08:15ㆍLessons
청산가(靑山歌)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네".
무학대사의 스승, 나옹선사의 시
▼나옹선사(懶翁禪師, 1320~1376) 개요
나옹의 성은 아(牙)씨, 속명은 원혜(元惠), 휘는 혜근(慧勤)이다. 나옹과 강월헌(江月軒)은 호이고, 시호는 선각(先覺)이다. 1340년(충혜왕 1) 출가한 뒤 회암사에서 수도하며 깨달음을 얻고, 1346년(충목왕 3)부터 원의 법원사(法源寺)에서 지공에게 수학했다. 이후 15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고려로 돌아와 주요 사찰의 주지를 역임하고 회암사의 주지가 되어 중창 불사를 단행했다. 나옹은 전통적인 간화선(看話禪)을 바탕으로 임제종(臨濟宗)의 선풍(禪風)을 도입해 고려 말 침체된 불교계를 일신시키려고 노력했다.
▼문경 대승사 묘적암 (1803년) 나옹화상 영정
▼지공선사 부도에서 올라가는 계단
▼나옹선사 부도 및 석등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0호.
ⓑ승탑 높이 3.5m
ⓒ천보산 기슭 동쪽의 지공선사승탑(指空禪師僧塔) 바로 위쪽에 있다.
ⓓ이 승탑은 공민왕 때 왕사(王師)로 서역 인도의 지공선사를 따라 국법의 정맥(正脈)을 받아왔으며, 1376년 우왕의 명을 받들어 밀양 영원사(瑩原寺)로 가던 도중 여주 신륵사(神勒寺)에서 입적했던 나옹선사의 묘탑(墓塔)이다.
ⓔ승탑의 구조는 8각을 기본으로 하는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으로, 상·하대의 기단부(基壇部)와 탑신부(塔身部), 상륜부(相輪部)로 이루어져 있다.
ⓕ8각의 하대에 상대(上臺)는 배가 불러있는 고복형(鼓腹形)의 중석(中石)과 역시 8각을 이루고 있는 앙련(仰蓮)형태의 갑석(甲石)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탑신부는 공모양[球形]의 몸체에 8각 지붕을 하고 있다.
ⓖ비교적 단순한 형태의 옥개석은 각 모서리에 도드라진 융기선이 있을 뿐 별도의 장식은 보이지 않으며, 낙수면(落水面)의 경사는 완만한 편이다. 옥개석 위의 상륜은 거의 완벽한 형태로 두터운 상륜 받침에 복발(覆鉢) 없이 3개의 보륜(寶輪)과 보주(寶珠)를 함께 만들었다.
ⓗ전형적인 통일신라 팔각원당형 승탑 양식을 따르고는 있지만, 다소 경직되고 평면적인 면을 보여 주고 있어 고려 시대 말기의 승탑 양식을 가늠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승탑 앞에 나란히 세워져 있는 석등 역시 승탑과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4각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4각형 지대석(地臺石) 위에 4각의 하대석(下臺石)과 단조로운 4각 간석(竿石), 그리고 역시 4각형을 한 상대석(上臺石)으로 이루어진 기단에 2개의 화창(火窓)을 낸 화사석(火舍石: 석등의 점등하는 부분) 또한 4각형을 기초로 하고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화사석이 하나의 돌로 되어 있지 않고 두 개의 직육면체로서 옥개석(屋蓋石)을 받들게 하고 있는 점이다. 4각 옥개석 위의 상륜은 석등과는 달리 단순하게 처리하였으나 맨 꼭대기에는 석등과 동일한 모양의 보주(寶珠)로 장식하였다.
ⓛ전반적으로 네모반듯하게 만들어 경직된 가운데 지붕의 추녀와 낙수면에 완만한 곡선을 두어, 직선과 곡선이 이루어 내고 있는 조화를 보여준다.
▶선각 왕사비(禪覺王師碑)
①1377년(우왕 3) 고려 말 승려인 나옹(懶翁. 1320∼1376) 화상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②보물 제387호.
③높이 3.06m, 너비 1.6m.
④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비의 형식은 당비(唐碑)의 형식을 닮은 복고풍의 것으로 개석이 없다.
⑤그런데 1997년 보호각이 불에 타면서 비신이 파손되어 보존 처리가 이루어졌고, 경기도 박물관을 거쳐 현재 불교중앙박물관에서 비신을 보관하고 있다.
⑥비가 있었던 원래의 자리에는 비 받침돌인 귀부가 남아 있으며, 원형을 본떠서 만든 비가 세워져 있다.
⑦이수(螭首)를 별도로 만들지 않고 비신 상부에 쌍룡을 깊게 조각하고 그 중앙에 제액을 만들어 ‘禪覺王師之碑(선각왕사지비)’ 6자를 새겼다. 자경은 2∼2.4㎝, 전액의 자경은 11.2㎝이다. 비문은 이색(李穡)이 짓고, 권중화(權仲和)가 예서로 쓰고 전액도 하였다.
비문에 따르면 왕사의 휘는 혜근(惠勤), 호는 나옹, 초명은 원혜(元惠)이고, 영해부(寧海府) 사람이며, 선각은 시호이다. 1320년(충숙왕 7)에 태어나 1344년에 회암사에 입문하였다. 1348년에는 원나라에 가서 지공(指空)에게 법의·불자(拂子: 번뇌를 물리치는 표지물)·범서를 받았다. 또 원나라의 순제(順帝)가 대사를 연도(燕都)의 광제사(廣濟寺)에 주거하게 하고, 금란가사와 폐백을 하사하였다.
나옹이 1358년(공민왕 7)에 귀국하자 왕이 그에게 가사와 불자를 하사하고 신광사(神光寺)에 주거할 것을 청하였으나 굳이 사양하고 구월산·금강산 등에서 은거하였다. 그러다가 회암사에 들어와 절을 크게 중수하고 1377년 신륵사에서 57세로 입적할 때까지 불법을 행하였다. 후미에는 대사의 업적을 기리는 명문을 새겼다.
이 비의 글씨는 예서인데, 예서는 고구려의 광개토왕릉비와 중원고구려비 이후 고려 말에 이 비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당시 중국에서도 예서가 쓰이지 않을 때였으므로 우리나라의 예서 연구가 어느 정도였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동국금석평(東國金石評)』에서 나옹비는 “팔분서(八分書: 예서 이분쯤과 전서 팔분쯤을 섞어 만든 한자의 글씨체)인데 태정(太整)하나 신채(神彩: 훌륭한 풍채)가 없다.”고 평하였다. 그러나 결구도 엄정하고 필력도 주경하며 예법을 깊이 터득한 것으로서, 중국의 「희평석경(熹平石經)」을 방불하게 하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해석문]
선각왕사지비禪覺王師之碑
고려국高麗國 왕사王師 대조계종사大曹溪宗師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 근수본지勤脩本智 중흥조풍重興祖風 복국우세福國祐世 보제존자普濟尊者 시諡 선각탑명禪覺塔銘
전조열대부前朝列大夫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 좌우사낭중左右司郞中 문충보절동덕찬화공신文忠保節同德贊化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한산군韓山君 영예문領藝文 춘추관春秋館 겸兼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 지서연사知書筵事 신臣 이색李穡이 왕명王命을 받들어 비문을 짓고, 수충찬화공신輸忠贊化功臣 광정대부匡靖大夫 정당문학政堂文學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 상호군上護軍 제점提點 서운관사書雲觀事 신臣 권중화權仲和는 교지敎旨에 따라 단사丹砂로 전액篆額과 글씨를 쓰다.
공민왕[玄陵]께서 재위在位한 지 20년 만인 경술년(1370) 9월 10일 왕사를 개경開京으로 영입迎入하여, 16일에 왕사가 주석하는 광명사廣明寺에서 양종兩宗 오교五敎에 속한 제산諸山의 납자衲子들이 스스로 얻은 바를 시험하는 공부선功夫選 고시장을 열었는데 왕사도 나아갔으며, 공민왕께서도 친히 행차幸次하여 지켜 보았다. 왕사는 염향拈香을 마친 다음 법상法床에 올라 앉아 말씀하기를 “금고古今의 과구窠臼를 타파하고, 범성凡聖의 종유蹤由를 모두 쓸어버렸다. 납자의 명근命根을 베어버리고, 중생의 의망疑網을 함께 떨쳐 버렸다. 조종操縱하는 힘은 스승의 손아귀에 있고, 변통變通하는 수행은 중생의 근기根機에 있다. 삼세三世의 부처님과 역대歷代의 조사祖師가 교화 방법은 동일한 것이니, 이 고시장에 모인 모든 승려들은 바라건대 사실대로 질문에 대답하시오”라 하였다. 이에 모두 차례로 들어가 대답하되 긴장된 모습으로 몸을 구부려 떨면서 진땀을 흘렸다. 그러나 모든 응시자의 대답은 맞지 아니하였다. 혹자는 리理에는 통하였으나 사事에는 걸리고, 어떤 이는 중언부언 횡설수설하다가 일구一句의 질문에 문득 물러가기도 하였다. 이 광경을 지켜본 공민왕의 얼굴 빛이 언짢은 듯이 보였다. 환암혼수선사幻庵混脩禪師가 최후에 와서 삼구三句와 삼관三關에 대하여 낱낱이 문답하였다. 공부선功夫禪 고시考試가 끝나고 왕사는 회암사檜嵒寺로 돌아갔다.
신해년(공민왕 20, 1371) 8월 26일 공부상서工部尙書인 장자온張子溫을 파견하여 친서親書와 직인과 법복과 발우鉢盂 등을 보내어 “왕사王師 대조계종사大曹溪宗師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 근수본지勤脩本智 중흥조풍重興祖風 복국우세福國祐世 보제존자普濟尊者”라는 법칭法稱과 함께 왕사로 책봉하였다. 이어 송광사松廣寺는 동방東方 제일의 도량이므로 이에 거주토록 명하였다.
임자년(공민왕 21, 1372) 가을에는 지공指空대사가 지시한 “삼산양수지간三山兩水之間”에서 주석하라는 기별記莂이 우연히 생각나서 곧 회암사로 이석移錫하려 하였는데, 때마침 왕의 부름을 받아 회암사 법회法會에 나아갔다가 여기에 주거住居해 달라는 청을 받았다. 왕사가 이르기를 “선사先師인 지공선사께서 일찍이 이 절을 중창하려고 계획하였는데 병화兵火로 불타버렸으니 그 뜻을 계승하지 않겠는가?” 하고, 이에 대중 승려들과 협의하여 전당殿堂을 확장하여 공사工事가 모두 끝나고 병진년(우왕 2, 1376) 4월에 크게 낙성법회落成法會를 열어 회향하였다.
이 때 대평臺評이 유생儒生의 입장에서 불교의 왕성旺盛함을 시기하여 말하기를 “회암사는 서울과 매우 가까운 거리이므로 청신사淸信士와 청신녀淸信女들의 오고 감이 계속 이어져 밤낮으로 왕래가 끊이지 않아 혹은 지나게 맹신盲信하여 생업生業을 폐하는 지경에 이르니 금지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 하였다. 이에 교지敎旨를 내려 왕사를 서울과 멀고 벽지僻地인 형원사瑩原寺로 이주移住토록 하였다. 그리하여 출발을 재촉하여 가던 도중에 왕사가 병세가 있어 가마를 타고 삼문三門을 나와 못 가에 이르러 스스로 가마꾼을 인도하여 열반문涅槃門을 통과할 때 모든 대중大衆이 무슨 이유인지를 의심하면서 실성 통곡하므로, 왕사가 그들을 돌아보시고 말하기를 “노력하고 또 거듭 노력하여 나로 인하여 슬픔에 잠겨 중도에 그만두는 일이 없도록 하라. 나는 가다가 마땅히 여흥驪興에서 그칠 뿐이다”라고 하였다. 한강漢江에 이르러 호송관護送官인 탁첨卓詹에게 이르기를 “내 병세가 심하니 뱃길로 가자” 하여 배로 바꾸어 타고 7일간 소류遡流하여 여흥에 이르렀다. 이 때 또 탁첨에게 부탁하기를 “몇 일만 머물러 병을 조리하고 떠나자”고 하니 탁첨이 그 뜻을 받아들였다. 신륵사神勒寺에서 머물고 있는데 5월 15일에 탁첨이 또 출발하기를 독촉하므로 왕사가 이르기를 “그것은 어렵지 않다. 나는 곧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라 하고, 이 날 진시辰時에 조용히 입적入寂하였다. 군민郡民들이 바라보니 오색五色 구름이 산정山頂에 덮여 있었다.
화장火葬이 끝나고 타다 남은 유골을 씻으려는 순간, 구름 한 점 없는 청천靑天에서 사방 수백보數百步의 이내에만 비가 내렸다. 사리舍利가 155과가 나왔다. 기도하니 558과로 분신分身하였다. 뿐만 아니라 대중들이 재 속에서 얻어 개인이 감춘 것도 부지기수였으며,3일 간 신광神光이 비추었다. 석달여釋達如 승려가 꿈에 화장장 소대燒
臺 밑에 서려 있는 용을 보았는데, 그 모양이 마치 말[馬]과도 같았다.
상주喪主를 태운 배가 회암사檜嵒寺로 돌아오는데, 비가 내리지 않았는데도 갑자기 물이 불어났으니, 이 모두가 여룡驪龍 의 도움이라 했다. 8월 15일에 부도浮圖를 회암사 북쪽 언덕에 세우고, 정골사리頂骨舍利는 신륵사에 조장厝藏하였으니, 열반한 곳임을 기념하기 위해서이다. 이와 같이 사리를 밑에 모시고 그 위에 석종石鐘으로서 덮었으
니, 감히 누구도 손을 대지 못하게 함이다. 대사가 입적한 사실을 조정朝廷에 보고하니 시호를 선각禪覺이라 추증하고, 신臣 색穡에게는 비문碑文을 짓고 신 중화仲和로 하여금 단사丹砂로 비문과 전액篆額을 쓰게 하였다.
신이 삼가 대사의 행적을 살펴보니, 휘는 혜근惠勤이고 호는 나옹懶翁이며 처음 이름은 원혜元惠였다. 세수는 57년을 살았고 법랍은 38세였다. 고향은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寧海이며, 속성은 아씨牙氏이다. 아버지의 휘는 서구瑞俱이니 벼슬은 선관령膳官令을 지냈다. 어머니는 정씨鄭氏로 영산군靈山郡 사람이다. 어머니 정씨가 꿈에 금색金色 새가 날아와 그의 머리를 쪼다가 오색五色이 찬란한 알을 떨어뜨려 가슴으로 들어오는 태몽胎夢을 꾸고, 임신하여 연우延祐 경신년(충숙왕 7, 1320) 1월 15일에 탄생하였다.
나이 겨우 20살 때 이웃에 사는 친한 벗이 사망하므로, 슬픔에 잠겨 부로父老들에게 묻기를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하니, 모두 말하되 “어느 곳으로 가는지 알 수 없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듣고 가슴이 답답하여 슬픔만 더하였다. 그리하여 그 길로 공덕산功德山 대승사大乘寺 묘적암妙寂庵으로 달려가 요연선사了然禪師에게 삭발하고
사미계를 받았다. 요연선사가 이르되 “너는 무슨 목적으로 출가出家하였는가”라 하니, 대답하기를 “삼계三界를 초월하여 생사生死를 해탈解脫하고, 중생을 이익利益하게 하고자 함입니다”라 하고 또 선사의 지도를 청하였다. 선사가 말하기를 “네가 여기에 온 정체가 무슨 물건인가”라 하니, 대답하기를 “능히 말하고 능히 듣고 능히 여기까지 찾아온 바로 그 놈입니다. 다만 닦아 나아갈 방법을 알지 못하나이다”라 하였다. 요연了然선사가 말씀하되 “나도 너와 같아서 아직 알지 못하니, 다른 명안종사明眼宗師를 찾아가서 묻고 배우라”고 하였다.
지정至正 갑신년(충혜왕 5, 1344)에 회암사로 가서 주야로 홀로 앉아 정진하다가 홀연히 깨달음을 얻었다. 이로 말미암아 중국에 가서 선지식을 참방參訪하고 유학할 뜻을 굳히고, 출국하여 무자년(충목왕 4, 1348) 3월 연도燕都에 도착하여 지공대사를 참방하고 법法을 물었는데 서로 간의 문답이 계합契合하였다. 지정至正 10년(충정왕 2,1350) 경인庚寅 정월正月에 지공대사가 대중을 모아놓고 법어法語를 내리니 아무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으나, 혜근惠勤이 대중 앞에 나와서 몇 마디의 소견所見을 토출吐出한 다음, 삼배三拜하고 물러 나왔다.
지공은 서천西天의 백팔대百八代 조사祖師이다. 그 해 봄에는 남쪽으로 강절江浙 지방을 두루 순례하고 8월에는 평산平山대사를 친견하였더니, 평산이 묻기를 “나에게 오기 전에 누구를 친견하였는가”라 하니, 대답하되 “서천의 지공대사를 만나 뵈었는데 일용천검日用千劒하라 하더이다”라 하였다. 평산대사가 이르기를 “지공천검指空千劒
은 그만두고 너의 일검一劒을 한 번 보여 보아라”고 하였다. 혜근이 좌구坐具로 평산을 덮여 씌워 끌어 당겼다. 평산은 선상禪床에 거꾸러져서 “도적이 나를 죽인다”라고 고함을 질렀다. 혜근이 이르되 “나의 이 칼은 능히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또한 능히 사람을 살리기도 합니다”라고 하면서 평산을 붙들어 일으켰다. 이 때 평산은 설암雪嵒이 전수傳授한 급암종신及庵宗信의 법의法衣와 불자拂子를 신물信物로 주었다.
신묘년(충정왕 3, 1351) 봄에는 보타낙가산寶陁洛迦山에 이르러 관세음보살상에 예배하고, 임진년壬辰年에는 복룡산伏龍山에 이르러 천암千嵒대사를 친견하였다. 천암은 그 때 마침 일천여 명의 납자衲子를 모아 놓고 입실入室 자격고시資格考試를 열고 있었다. 이 때 천암이 혜근에게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었다. 혜근이 대답하니, 천암이 이르기를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기 전에는 어느 곳에서 왔는가?” 하니, 혜근이 이르되 “오늘은 4월 2일입니다”라 하니, 천암이 인정하였다. 그리고 그 해에 북방北方으로 돌아가서 연도燕都 법원사法源寺에 있는 지공대사를 두 번째로 친견하였다. 이 때 지공은 법의와 불자와 범서梵書를 신물로 전해 주었다. 이에 다시 연대燕代의 산천山川을 두루 돌아보았으니, 소연蕭然한 한 한가로운 도인道人으로써 그 이름이 원조元朝의 궁내宮內에까지 들렸다.
을미년(공민왕4, 1355) 가을에는 원元나라 순제順帝의 명을 받들어 대도大都의 광제사廣濟寺에 머물게 되었다. 그리고 병신년(공민왕 5, 1356) 10월 15일 지공으로부터 수법受法한 기념법회紀念法會를 가졌는데, 순제는 원사院使를 보내어 축하하였고, 야선첩목아也先帖木兒는 금란가사金襴袈裟와 폐백幣帛을 하사하였으며, 황태자皇太子도 금란가사와 상아불자象牙拂子를 가지고 와서 선사하였다.
왕사가 가사 등의 선물을 받고 대중에게 묻기를 “담연공적湛然空寂하여 본래부터 일물一物도 없는 것이다. 이 가사의 휘황하고 찬란함이여! 이것이 어디로부터 나왔는가”하니, 이에 대하여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왕사께서 천천히 말씀하시기를 “구중궁九重宮 금구중金口中에서 나왔느니라” 하고, 곧 가사를 입고 염향拈香하고 성복聖福을 축원한 다음 법상法床에 올라 앉아 주장자柱杖子를 가로 잡고 몇 말씀 하고 곧 내려왔다.
무술년(공민왕 7, 1358) 봄에는 지공대사를 하직하고 기별記莂을 받아 귀국길에 올라 동쪽으로 돌아오는 도중 머물기도 하고 계속 오기도 하면서 청중의 근기根機에 맞추어 설법해 주었다. 귀국한 후 경자년(공민왕 9, 1360)에는 강원도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가 거주하였다. 신축년(공민왕 10, 1361) 겨울에는 공민왕이 내첨사內詹事 방절方節을 보내어 왕사를 개경開京으로 영입하여 법문을 청해 듣고 만수가사滿繡袈裟와 수정불자水精拂子를 하사하였고, 공주公主는 마노불자瑪瑙拂子를 헌납하였으며, 태후太后도 직접 찾아와서 보시布施를 하였다.
공민왕이 신광사神光寺에 주지하도록 청하였으나, 왕사는 이를 사양하였다. 이 때 공민왕도 매우 섭섭하여 실망 끝에 말하기를 “이젠 불법佛法에 손을 떼겠습니다”라고 하니, 부득이 신광사로 갔다. 11월에 이르러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하여 경기京畿 지방을 유린하였으므로 거국적擧國的으로 국민들이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승려들도 공포에 휩싸여 왕사께 피난을 떠나시라 간청하였다. 왕사가 말하기를 “오직 생명은 이미 정해져 있거늘 적賊들이 어찌 침해할 수 있겠는가” 하면서 요지부동하였다.
수일 후 피난을 떠나시라고 간청함이 더욱 화급火急하였다. 이날 밤 꿈에 한 신인神人을 보았는데, 얼굴에 검은 반점이 있었다. 의관衣冠을 갖추고 왕사께 절을 올리고 고하기를 “만약 대중이 절을 비우고 떠나면 적들이 반드시 절을 없애버릴 것이오니, 원컨대 왕사의 뜻을 고수固守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다음 날 토지신장土地神將의 탱화를 보니 그 얼굴에 검은 점이 있는 것이 꿈에 만난 신인과 같았다. 신인의 말대로 홍건적들은 과연 들어오지 아니하였다.
계묘년(공민왕 12, 1363)에는 구월산九月山에 들어갔다. 공민왕께서 내시內侍인 김중손金仲孫을 파견하여 개성으로 돌아오도록 청했다. 그리하여 을사년(공민왕 14, 1365) 3월 궁궐로 나아가서 있다가 퇴산退山을 간청하여 비로소 윤허允許를 받아 용문龍門·원적元寂 등 여러 산을 순례하였다. 병오년丙午年에는 금강산金剛山에 들어갔으며, 정미년丁未年 가을부터는 청평사淸平寺에 주석하였다. 그 해 겨울에는 보암寶嵓대사가 원元나라에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는 편에 지공指空대사의 가사袈裟와 편지를 가지고 와서 왕사에게 전달하면서 말하기를 “지공대사가 유언하신 내용이다”라고 하였다.
기유년己酉年(공민왕 18, 1309)에는 다시 오대산에 들어가 머물렀으며, 경술년(공민왕 19, 1370) 봄에는 원나라 사도司徒인 달예達睿가 지공대사의 영골靈骨을 모시고 왔으므로 회암사에 조장厝藏하고 왕사는 스승의 이 영골탑靈骨塔에 예배를 올렸다. 이어 왕의 부름을 받아 광명사에서 여름 결제結制를 맺어 해제解制를 마치고 초가을에 회암사로 돌아와 9월에 공부선功夫選 고시를 베풀었다. 왕사가 살던 거실居室을 강월헌江月軒이라 하였다.
왕사는 평생에 걸쳐 세속문자世俗文字를 익히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어떤 선비이든 시詩를 음영吟詠하자고 청해오면 붓을 잡자마자 곧 시게詩偈를 읊고, 마음속으로 깊이 구상하지 않으나 시가 담고 있는 내용은 심원深遠하였다. 만년晩年에는 묵화로 산수山水 그리기를 좋아하여 수도修道에 방해가 되는 일이라고 비평하는 사람도 있었다.
오호라! 도道가 이미 통달되었으면 다방면에 능한 것이 또한 마땅하구나! 신 색穡은 삼가 머리를 조아려 예배하고 비명碑銘을 기록하고 명銘을 짓는다.
살피건대 위대偉大하신 선각선사禪覺禪師여!
기린 뿔이 하나이듯 희귀稀貴하도다.
역대 임금 지극 정성 왕사王師로 모셔
인천중人天衆의 안목眼目이며 복전福田이로다.
천만납자千萬衲子 한결같이 귀의歸依하옴이
샛강물이 바다에로 모임과 같아
나옹懶翁대사 높은 경지境地 아는 이 없어
갈고 닦은 그 도덕道德은 깊고도 넓네.
왕사께서 태어날 때 혁혁赫赫한 새 알
떨어뜨린 그 새 알이 회중懷中에 들다.
열반涅槃 때의 그 용마龍馬는 팔부八部인 천룡天龍!
입비사立碑事를 건의하여 윤허允許를 받다.
신비하신 그 사리舍利는 백오십오과百五十五粿
기도祈禱 끝에 분신分身함은 오백오십팔五百五十八
여천驪川 강물 길고 넓어 도도히 흘러
천강千江 유수流水 천강월千江月의 밝은 달이여!
분신分身이신 그 보체寶體는 공색空色을 초월超越
하늘 높이 비춘 달이 물 속에 왔네!
높고 높은 왕사의 덕德 헤일 수 없고
만고萬古토록 우뚝하게 불멸不滅하소서.
선광宣光 7년(우왕 3, 1377) 6월 일
출처: 민족문화대백과,문화유산채널,다음지도,한국의 석비
[출처] 나옹선사 부도 및 선각 왕사비|
회암사檜巖寺
경기도 양주시 천보산(天寶山)에 있는 고려후기 승려 지공이 인도의 나란타사를 본떠 건립한 사찰. 사찰터.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의 말사이다. 1328년(충숙왕 15) 인도에서 원나라를 거쳐 고려에 들어온 지공(指空)이 인도의 나란타사(羅爛陀寺)를 본떠서 266칸의 대규모 사찰로 중창하였으며, 1378년(우왕 4) 나옹(懶翁)이 중건하였다.
그러나 지공이 창건하기 전에도 1174년(명종 4) 금나라의 사신이 회암사에 온 적이 있으며, 보우(普愚)가 1313년(충선왕 5)에 회암사에서 광지(廣智)에게 출가한 바 있어 이미 12세기에 존재했던 사찰임을 알 수 있으나, 정확한 창건연대와 창건주는 알 수 없다.
고려 말 전국 사찰의 총본산이었던 이 절의 승려 수는 3,000명에 이르렀으며,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전국에서 규모가 가장 컸던 절로, 조선의 태조가 왕위를 물려주고 수도생활을 했을 뿐 아니라 효령대군(孝寧大君)도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1424년(세종 6)의 기록을 보면 이 절에는 250명의 승려가 있었고, 경내가 1만여 평에 이르렀다고 한다.
1472년(성종 3)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정현조(鄭顯祖)에게 명하여 중창하였으며, 명종 때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불교 재흥정책을 펼 때 전국 제일의 수선도량(修禪道場)이 되었으나, 왕후가 죽고 유신(儒臣)들에 의해 나라의 정책이 다시 억불정책으로 선회하자 1565년(명종 20) 사월 초파일에 보우(普雨)가 잡혀 가고 절은 불태워짐으로써 폐허화되었다.
1821년(순조 21) 지공 · 나옹 · 무학의 부도와 탑비가 고의적으로 훼손되었으나 조정에서 1828년에 다시 중수하였으며, 옛터 옆에 작은 절을 짓고 회암사라는 사호를 계승하였다. 1922년에 봉선사 주지 홍월초(洪月初)가 새로 보전을 짓고 불상을 봉안했으며 지공 · 나옹 · 무학의 진영을 모셨다.
보물 제387호인 회암사지 선각 왕사비(檜巖寺址禪覺王師碑), 보물 제388호로 무학대사(無學大師)의 부도인 회암사지 부도(浮屠), 보물 제389호인 회암사지 쌍사자 석등(雙獅子石燈)이 있으며,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지공선사 부도(指空禪師浮屠)·나옹선사 부도(懶翁禪師浮屠)·무학 대사비(碑) 등이 있다.
회암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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