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8. 23. 03:15ㆍHistory & Human Geography
나옹화상(懶翁和尙)
법명은 혜근(惠勤, 慧勤), 초명은 원혜(元慧), 법호는 나옹(懶翁 /게으른 노인?) 또는 강월헌(江月軒).
경북 영덕군 영해(寧海) 사람. 아버지는 선관서령(饍官署令)을 지낸 아서구(牙瑞具), 어머니는 정(鄭) 씨였다.
태몽에 :어머니가 황금빛 새가 날아와 머리를 쪼으며 알을 떨어뜨렸는데 그 알이 품에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1320년(고려 충숙왕 7) 1월 15일에 태어났다.
20세 경 친구의 죽음으로 죽음에 대하여 의심을 품고 문경 공덕산 묘적암(妙寂庵)으로 요연(了然)선사를 찾아가 출가하였다.
"그대 지금 여기에 왔는데 그것(나옹)은 무슨 물건인고?"
"말하고 들을 줄 아는 것이 온 것입니다. 보려고 해도 실체를 볼 수 없고 찾으려 해도 어떤 물체인지 찰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닦아 나아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1344년(충혜왕 5) 경기도 양주 회암사에서 수도, 정진하였다.
1347년(충목왕 3) 11월, 중국의 유학, 원나라 수도 연경 법원사(法源寺)에 머물면서 인도 승려 지공(指空)의 지도를 받음.
게송
산과 물, 땅 이 모든 것 눈 앞의 꽃이요. 山河大地眼前花
삼라만상 또한 그러하다. 萬像森羅亦復然
자성의 본래 청정함을 비로소 알았나니 自性方知元淸淨
티끌과 티끌, 절과 절이 바로 진리의 왕이다. 塵塵札刹法王身
연경 광제선사에 주석.
1358년(공민왕 7) 3월, 고려로 귀국함.
오대산 상두암 주석, 해주 신광사에서 머무름. 신광사로 홍건적이 몰려왔으나 해를 입지 않음.
1363년(공민왕 12) 7월, 해주 구월산 금강암에 머무름.
1370년(공민왕 19) 3월, 중국으로부터 지공선사의 사리가 양주 회암사로 와 나옹도 회암사로 가 지공를 맞이 함.
1376년(우왕 2) 5월, 임금의 명으로 밀양 영원사(營原寺)로 가는 도중 여주 신륵사에서 열반에 듬. 세수 57년, 법랍 37년.
*나옹의 승탑과 비는 회암사와 신륵사에 있으며 비문은 임금의 명으로 이색이 지었다. 시호는 선각(禪覺)이다.
(책 '동사열전'에서 '나옹왕사' 편을 정리함.)
모친이 세금을 못 내어서 관아로 끌려와서 '나옹'을 출산하였다는 설도 있다.
1371년(공민왕20) 왕사로 봉해졌다.
나옹선사, 나옹화상, 나옹왕사, 선각왕사 등으로 불리며 시와 그림에 능했다 한다.
저서로는 『나옹화상어록(懶翁和尙語錄)』 1권, 『가송(歌頌)』 1권이...
靑山兮要我 - 청산은 나를 보고 - 나옹선사 (懶翁禪師)
경북 영덕 반송유적지에 나옹왕사 사적비
2008. 10. 22. 02:37
[서울신문]경북 영덕에 고려말 고승 '나옹왕사'를 기리기 위한 사적비가 세워졌다.
영덕군은 21일 창수면 신기리 반송유적지에서 지관 조계종 총무원장과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장관, 김관용 도지사, 불교 신도, 지역 주민 등 2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나옹왕사 사적비 제막식을 가졌다.
반송유적지는 나옹왕사가 출가하면서 소나무 지팡이를 꽂았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사적비는 폭 5m, 높이 3.4m 규모로,47t의 보령오석으로 제작됐다. 비문은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큰스님이 근찬(작문)했으며, 글씨는 향토 서예가 초당 이무호 선생이 한자(해서체와 광개토대왕비체)와 한글(궁서체, 판본체) 총 2678자를 혼용해 작성했다.
지관 총무원장은 축사에서 "이번 행사를 계기로 많은 사람이 나옹왕사의 사적비를 찾아 스님의 거룩한 사상과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길 바란다."면서 "우리도 스님처럼 세속에 물들지 않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인촌 문화부 장관도 "나옹왕사는 훌륭한 종교인인 동시에 우리 문화·예술계의 큰 거목"이라며 "앞으로 영덕에서 나옹왕사 같은 인재들이 많이 배출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나옹왕사(1320∼76)는 불교의 3대 화상(지공, 나옹, 무학대사) 중 한 분으로 고려말 왕사(공민왕, 우왕)이다. 인도의 고승 지공 스님의 제자이자 조선 건국에 기여한 자초 무학 대사의 스승이다.
영덕군 창수면 갈천리 운서산 기슭에 있는 장륙사를 창건하고 저술로 '나옹화상 어록' '나옹화상 가송'이 현존하고,'청산은 나를 보고' 등의 선시가 널리 알려져 있다.
영덕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서울신문( www.seoul.co.kr)
운서산(雲棲山, 520m) 장륙사( 莊陸寺)
나옹왕사(1320-1376)는 고려 충숙왕 7년 영해부 가산리에서 출생해 20살때 문경 공덕산 묘적암의 요연선사에게서 출가한 불교 3대 화상(지공, 나옹, 무학대사)의 한사람으로 고려 공민왕과 우왕의 왕사이자 조선건국에 기여한 무학대사의 스승이다.
나옹왕사는 고려 공민왕 4년 영덕군 창수면 운서산에 장륙사를 창건했으며 저술로는 '나옹화상 어록'과 '나옹화상 가송'이 현존하고 있다.
'구름이 산다'는
운서산(雲棲山, 520m) 장륙사( 莊陸寺)
장륙사(裝陸寺)는 고려 공민왕(재위1351-1374) 때 나옹왕사가 서기 1355년에 창건한 사찰로서 영덕군 창수면 갈천1리 120번지 운서산(雲棲山, 520m)에 자리한 대한불교 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 말사이다.
창건시기는 오래됐으나 조선 세종 연간에 한번 전소되어 다시 지어진 사찰이다.
운서산 장륙사(雲棲山 莊陸寺) 일주문(一柱門)
운서산 장륙사(雲棲山 莊陸寺)
◯ 장륙사 대웅전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138호 )
고려 말 나옹선사가 창건한 장륙사, 아담한 대웅전 앞마당에 입장한다.
창건시기는 오래됐으나 조선 세종 연간에 한번 전소되어 다시 지어진 사찰이다.
2점의 유형문화재를 지녔을 뿐 아니라, 장육사 대웅전은 그 자체가 문화재다.
대웅전 좌편으로는 국가보물인 종이로 만든 장륙사 건칠관음보살좌상(보물 제993호)이 안치된 관음전이 위치해 있다.
건칠불(건칠상)은 진흙으로 속을 만들어 삼베를 감은 기본 틀 위에 종이를 여러 겹 덧붙여 금칠을 한 불상이다.
대웅전(유형문화재 제138호) 내에 삼존불 후면에 봉안된 영산회상도 후불탱화(경상북도 유형문화재 373호)는
석가가 영취산에서 여러 불·보살에게 설법하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다.
막돌로 허튼층을 쌓은 기단위에 주초를 두고 두리기둥을 세웠다. 앞면 3칸, 옆면 3칸의 규모이며, 주심포 겹처마 맞배기와 7량가 집이다. 지붕은 옆모습이 사람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방식으로 건축되었으며, 조선중기 사찰 건축 양식으로 알려져 있고, 대웅전의 단청을 금단청으로 하여 화려하기 이를 데 없으면서도 색상이나 무늬가 장엄하고 거룩 하다.
장륙사 대웅전은 태조 4년(1395)에 태조와 그의 부인 신덕왕후 강씨를 기리기 위하여 지방관리들이 중심이 되어 만들었고, 태종 7년(1407)에 다시 금을 입혔다. 또 숙종 3년(1677)에 수리하였다는 등 자세한 기록이 있어 유명하다.
장륙사흥원루(莊陸寺興遠樓)
장륙사를 창건한 나옹선사는 경상도 영해부(現, 경북 영덕군 창수면 가산리 불모곡)에서 1320년 출생하였으며, 속성은 아씨(牙氏)로 아명은 원혜, 호는 나옹으로 세속 20세에 출가해서 1371년 왕사에 임명되었으며, 1355년 장륙사를 창건하고 1376년 세수 57세 법랍 38세로 입적하였는데 태조 이성계의 왕사인 무학대사가 나옹선사의 제자이며, 그의 법계를 이어 받았다고 한다.
靑山兮要我 - 청산은 나를 보고 - 나옹선사 (懶翁禪師)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성냄도 모두 다 벗어버리고
물처럼 바람처럼 살다가 가라하네
- 나옹선사 (懶翁禪師) -
겹천장에는 비천이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비천상이 천상의 법음을 연주하고 있다.
***********************************************************************************************************************************************
선각왕사지비禪覺王師之碑
목은 이색(李穡)이 임금의 명을 받아 "선각왕사지비禪覺王師之碑"문을 근찬하다.
영덕군 영해읍 괴시리 영양 남씨 집성촌 안내판에 목은 이색의 기념관이 있다는...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은 본관지가 충남 서천의 한산(韓山)으로 포은 정몽주, 도은 이숭인과 함께 고려 3은의 한사람이다. 혹자는 야은 길재를 포함해서 4은으로도 부른다.
목은의 아버지 가정 이곡(李穀, 1298~1351)이 경상도 영해지방에 살던 사족(士族) 간재(簡齋), 김택(金澤?~?)의 사위가 되어 목은은 영해 외가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곡이 급제하기 전에 유람(遊覽)으로 영해에 와서 김택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내를 삼았다’고 했다. 목은의 외할아버지 김택의 본관은 함창김씨다.
경상북도 상주시 은척면 무릉리에 있는 나옹화상이 심은 것으로 전해지는 느티나무 2그루
나옹화상이 심었다는 느티나무 유래비
경상북도 상주시 은척면 무릉리 동구 앞에는 나옹정(懶翁亭)이 있다
문경 사불산 대승사에 있던 나옹화상 (懶翁和尙,1320~1376) 이 간재 김택의 사위였던 이곡(李穀 , 1298~1351)과 함께 일대의 산수를 사랑해 자주 왕래할 때 심은 느티나무 2그루가 마을 사람들에게 정자 구실을 하여 나옹정이라 한다는 것이다.
나옹화상은 영해부 가산리에서 아버지 아서구(牙瑞具)와 어머니 정씨(鄭氏)사이에서 1320년(충숙왕 7)에
태어났다.
20살때 같이 놀던 절친했던 친구가 죽자 ‘죽으면 어디로 가는 것이냐’며 마을 사람들에게 물었으나 모두 ‘모른다.’고 하자 괴로워하며 문경 공덕산(현 문경 사불산) 묘적암의 요연(了然)선사에서 출가하였다.
그 후 명산대찰을 편력하다가 1344년(충혜왕 5) 양주의 회암사(檜岩寺)에 머문다. 그러나 여기서도 불교의 오묘한 진리를 깨달음에 부족했던 그는 1347년(충목왕 3) 마침내 중국을 향해 출발 이듬해 원나라 수도 연경(燕京)의 법원사(法源寺)에 도착 그 곳에 머물고 있던 인도 출신의 지공(指空)화상으로부터 불법을 배웠다.
1358년(공민왕 7) 10여 년의 중국에서의 구도생활을 접고 귀국한다. 1361년(공민왕 10) 왕이 그를 불러 설법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선물을 주고 개경 가까운 해주 신광사(神光寺)에 머물게 했다. 공민왕의 끝임 없는 배려로 불교발전에 기여했다. 1371년(공민왕 20)왕사로 다음 즉위한 우왕으로부터도 왕사로 추대 받았다. 1376(우왕 2)왕명으로 밀양 영원사로 가던 도중 여주 신륵사에서 열반하니 세속 나이 57세, 법랍 38 이었다.
나옹은 불교 3대 화상(지공, 나옹, 무학대사)의 한사람으로 고려 공민왕과 우왕의 왕사이며 인도의 고승 지공 스님의 제자이자 조선건국에 기여한 무학대사의 스승이다
저서로 <나옹화상어록, 보물 제697호> 등이 있다.
한산군 이색(李穡, 1328~1396)이 임금의 명을 받아 " 선각왕사지비禪覺王師之碑" 비문을 짓고 공신 권중화가 쓴 비가 신륵사에 전해오고 있다. 비록 왕명이었지만 아버지의 벗이었던 나옹화상의 비문을, 아들이 쓴 것도 뿌리 깊은 인연이 아니고는 불가능할 것이다.
'History & Human Geography'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두섬, 대마도(つしま=tsusima=對馬島)'는 한국땅 (0) | 2024.08.25 |
---|---|
잊혀가는 독도와 ‘평화선’ 드라마 (0) | 2024.08.24 |
Napoleon I & Saint Helena Island (0) | 2024.08.21 |
Las Bolas: Stone Spheres of Costa Rica (0) | 2024.08.05 |
The stone spheres of the Diquís (0) | 2024.08.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