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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낙동·백두를 가다] (51) 성주 가야산
매일신문
입력 2009-12-18 07:14:42 수정 2009-12-18 07:14:42
골·봉우리마다 전설·불심 깃든 '해동제일의 명산'
'성주 가야산 최고 명승지는 만물상(앞의 두 사진)과 칠불봉(뒤의 사진)이다. 만물상은 금강산과 설악산의 만물상에 비견할 만큼 빼어난 절경을 자랑한다. 특히 만물상은 등산로가 개방되어 가까이서 만물상의 군상들을 만날 수 있다. 우두봉과 쌍웅인 칠불봉은 날카로운 정상의 바위 형상, 겨울 설경과 가을 능선의 운무는 감탄사가 절로 난다.
법수사지 당간지주(法水寺址幢竿支柱)
성주 법수사지는 802년(신라 애장왕 哀莊王 3년) 창건 당시 금당사(金塘寺)로 기록된 후, 고려시대 중건해 법수사라 했다.
경순왕의 왕자가 출가하여 법명 범공(梵空)으로 법수사에 머물렀다 한다.
이 법수사의 당간지주는 성주군 수륜면 백운리1316 중기마을 앞에 위치하며
1975년 12월 30일 자로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87호로 지정
*2009
법수사지 당간지주. 성주 가야산 일대가 해인사가 있는 합천 가야산 일대에 못지않은 장대한 신라 불교문화가 꽃피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성주 법수사지 삼층석탑(星州 法水寺址 三層石塔)
2010년 대한민국의 보물 제1656호로 지정
문화재청은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가야산에 위치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86호 '성주 법수사지 삼층석탑'을 5일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 1656호로 승격 지정 고시했다고 밝혔다. (2010. 7. 5)
보물 제 1656호 '성주 법수사지 삼층석탑'은 신라 애장왕(800∼809년) 때 창건한 법수사(法水寺) 터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절터는 가야산 계곡을 석축으로 단을 조성하여 자리 잡고 있다.
석탑의 높이는 5.8m이며, 상·하 2층 기단에 3층의 탑신부를 올린 양식으로 노반 이상의 상륜부는 남아 있지 않으나 보존 상태는 대체로 양호하다.
1677년(숙종 3) 간행된 성주 지방지인 ‘경산지(京山志)’의 기록에 의하면 법수사지는 9금당, 8종각 등 무려 천 칸이나 되는 사찰이었다고 돼 있어 사역 규모가 합천 해인사를 능가하는 대규모 사찰임을 짐작할 수 있다.
가장 많이 알려진 가야산의 수식어는? '합천 가야산'이다. 왜일까?
가야산국립공원의 나들목이 합천 땅에 있고, 가야산의 또 다른 수식어인 법보종찰 해인사와 팔만대장경 역시 합천 땅에 존재해서다. 그래서 일반인들은 합천 가야산에 친숙해 있다.
몇해 전 성주와 합천이 재미있는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 바로 최고봉 다툼. 합천과 성주의 경계인 우두봉과 성주 땅의 칠불봉은 불과 250m의 거리를 두고 있다. 당시 성주군은 전문기관에 의뢰해 가야산의 최고봉 조사를 했다. 조사 결과 칠불봉이 해발 1,432.4m, 우두봉이 1,429.8m로 나타났다. 최고봉으로 공식화된 우두봉보다 칠불봉이 3m 가까이 높은 것. 하지만 여전히 가야산의 정상은 우두봉이 대접받고 있다.
서로를 지척에 둔 칠불봉과 우두봉은 쌍웅(雙雄)이다. 날카로운 모양의 칠불봉과 유연한 우두봉이 마주보며 강과 유의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또한 우두봉과 칠불봉은 성주와 합천 땅을 거느린 것도 모자라 저 멀리 지리산에서 백운산을 거쳐 덕유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은 물론 팔공산과 독용산, 경남과 전라남·북도의 산들까지 안고 포효하고 있지 않은가.
최고봉 다툼은 어찌보면 부질없는 논쟁인가 싶다. '성주 가야산'을 널리 알리고 싶은 성주인들의 열정으로 받아들이면 되지 않을까.
우린 합천 가야산에 비해 덜 알려진 '성주 가야산'의 진면목을 찾아 나섰다.
갸야산은 경북의 서남단에 우뚝 자리잡은 영남 제일봉이자 우리나라 12대 명산 중 하나다. 자연경관이 수려해 예로부터 '조선팔경의 하나', '해동 제일의 명산'으로 이름났다.
백두산의 정기를 받은 소백산맥이 추풍령을 거쳐 지리산으로 내리 뻗다가 동쪽으로 혈맥을 갈라 솟아오른 곳이 가야산이요, 예로부터 삼재(三災=火·水·風)가 들지 않는 영산(靈山)이기도 했다.
가야산은 성주와 합천, 거창군에 걸쳐 있으며 전체 면적 중 성주군이 차지하는 면적이 60%를 넘는다. 성주의 가야산을 속속들이 알아야 가야산을 제대로 둘러봤다고 할수 있는 이유다.
성주 가야산의 첫 명승지는 칠불봉과 상아덤이다. 성주 수륜의 백운동에서 정상 칠불봉을 향해 산길을 한참 가다보면 칠불봉 턱 밑에 커다란 바위군이 발길을 멈추게 한다. 둥그스레하면서도 비스듬히, 그리고 횃불이 타오르는 듯한 형상의 바위 봉우리다. 하늘의 여신이 사는 바위라는 뜻의 상아덤에서 동북쪽으로는 성주 가야산의 또 다른 자랑인 만물상이 화려하게 펼쳐지고, 북쪽으로는 칠불봉이 심장까지 멈추게 한다. 상아덤이 가야산 최고의 조망처여서다.
상아덤은 가야산 '스토리꾼'이다. 가야산의 모태이자 가야의 건국신화가 서린 곳이다. 가야산은 6가야의 주산이었다. 옛날 정견모주라는 여신이 상아덤에 머물면서 천신인 이질하와 만나 두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 뇌질주일은 대가야의 시조 이진아시왕이 되고, 둘째 뇌질청예는 금관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이 됐다. 금관가야의 수로왕은 인도의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과 결혼해 10명의 왕자를 두었는데, 큰 아들 거등은 왕위를 계승해 김씨의 시조가 되고, 둘째와 셋째 아들은 어머니의 성을 따서 허씨의 시조가 됐다.
나머지 7왕자는 허황후의 오빠 장유화상을 스승으로 모시고 가야산에서 가장 힘차고 높은 칠불봉 밑에서 3년간 수도한 후 도를 깨달아 생불이 됐고, 그 자리에는 칠불암이 있었다는 전설이다. 상아덤은 으뜸 조망처이자 가야산에서 가장 성스러운 곳이 아니겠는가.
상아덤에서 왼쪽으로는 만물상이 한 눈에 들어온다. 상아덤에서 바라본 만물상은 뭐랄까? '최고'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금강산이나 설악산의 만물상을 옮겨 놓은 듯한 착각이 생길 정도였다. 만물상은 갖가지 형상을 한 바위들이 그 수를 헤아릴수 없을 만큼 줄 지어 서 있다. 바위들은 날카롭지 않고 부드러워 강한 어머니의 품과도 같았다. 또한 만물상은 소나무들과 절묘한 조화를 이뤄 보는 이들의 가슴을 재차 놀라게 한다.
조선 숙종 때의 인문지리학자인 이중환이 '석화성(石火星)의 절정'이라고 한 말은 바로 가야산의 만물상을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일행 역시 가야산을 여러 번 가보았지만 가야산 최고의 명승지를 꼽으라면 두말없이 만물상을 꼽고 싶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안타깝게도 만물상은 그 동안 그저 바라보는 산이었다. 37년 동안 '접근 금지'의 금산(禁山)이었다. 조만간 만물상 등산 코스가 개방된다고 한다. 가야산 백미를 드디어 만날 수 있는 날이 얼마남지 않았다. 벌써부터 가슴이 설레는 이유는 뭘까? 일행은 올 겨울 눈오는 날 만물상의 겨울 얼굴인 설경을 반드시 가슴에 담겠다는 약속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이들 뿐이랴. 수륜 백운동 용기골 등산로에서 동성재 오르는 길의 통제구역 안에 위치한 건들바위, 성주 선비 응와 이원조의 구곡(九曲)이 담긴 옥계(포천계곡)의 비경, 가천 신계리의 가야산 자락에 숨은 높이 40m의 용수폭포, 가야산 백운동지구 주차장 왼쪽 진입로를 따라 시작하는 심원골의 절경 또한 성주 가야산의 '보물'들이다.
가야산은 한국 불교의 성지다. 합천 해인사가 이를 대표한다. 하지만 가야산에 합천 해인사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그 동안 몰랐던, 아니 버려두다시피한 성주 가야산에도 그 옛날 장대한 불교 문화가 꽃폈다.
성주 수륜면 소재지에서 합천으로 가는 59번 국도를 따라 4㎞ 정도 올라가면 도로 옆에 3층석탑이 있다. 경북 유형문화재 86호인 법수사지 3층 석탑이다. 2개의 기단과 3층의 탑신으로 구성돼 있으며 6m 높이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신라식 일반석탑이다.
석탑 인근에는 중기라는 마을이 있는데, 마을 입구에는 옛날 절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당간지주가 서 있다. 당간지주는 요즘으로 치면 깃발 게양기이다. 옛날 절에서는 깃발의 장대를 고정시키는 것이 필요했는데, 그게 바로 당간지주다. 석탑과 당간지주 모두 통일신라 때 법수사라는 사찰이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옛 문헌에 따르면 성주의 법수사는 합천 해인사와 더불어 가야산을 대표하는 대가람이었다. 삼국유사에 '법수해인사'라는 문구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창건연대는 해인사와 비슷한 시기인 서기 802년(신라 애장왕 때)으로 추정하고 있다.
성주읍지인 '경산지 불우조'에 의하면 법수사는 구금당, 팔종각 등 무려 1천여 칸이 넘는 건물을 거느렸고, 딸린 암자만도 100여 개가 넘었다고 한다'고 적고 있다. 해인사급 규모와 세를 짐작케 한다.
대사찰 법수사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폐사의 길로 접어들었다. 사찰에 있던 비로자나불 등 유물이 뿔뿔이 흩어져 주존불인 비로자나불은 해인사로 옮겨졌고, 미륵당 불상은 1967년 경북대학교로 옮겨졌다. 만약 법수사가 지금까지 위명을 이어오고 있다면 가야산의 불교지도를 새로 그려야 하지 않을까.
백운리의 용기골에는 사라진 사찰 용기사의 터가 있다. 용기사는 법수사 폐사 후 비로자나불이 한때 모셔진 곳이다. 지금은 절터와 물을 담았던 석조, 승려들의 음식을 만드는데 사용한 맷돌 등이 남아 있다. 법수사의 부속 암자였던 용기사는 용이 일어났다는 뜻으로 명당 터로 지역에 알려져 있고, 임진왜란 때 승군이 주둔했다는 기록도 있다.
백운리 심원골에 자리한 심원사 역시 가야산 일대에서 화려한 불교 문화를 꽃피운 사찰이었다. 지금은 그 옛날 폐사된 절터에 복원된 심원사가 옛 명성을 되찾아가고 있다. 심원사의 창건 시기는 법수사와 비슷한 시기로 추정된다. 2001년 발굴조사에서 나온 통일신라시대의 가람배치 유물이 입증한다. 절은 임진왜란 때 의병들의 실화로 불탔고 다시 중건됐다. 당시 기록에선 "(심원사를) 크게 중수, 규모가 크고 굉장했다'고 적었고, 경산지도 "잣나무 밭(심원사의 병풍)이 남쪽 동불암에서부터 심원사에 이르기까지 10리에 걸쳐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발굴조사에서 항아리, 기와조각, 백자제기, 음각한 물고기문양 기와, 불상광배 탁본 등이 출토돼 심원사의 규모가 컸음을 입증했다. 그 만큼 성주 가야산 자락에 불교가 융성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성주 가야산에는 나라잃은 왕족의 한도 서렸다.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막내아들은 가야산 법수사에서 일생을 보냈다고 한다. 삼국유사는 "(마의)태자는 금강산으로 들어가 베옷과 채식으로 한세상을 마쳤고, 계자(막내아들)는 머리를 깎고 중이 돼 법명을 범공으로 하고 법수사에 머물며 해인사에 드나들면서 산승으로 일생을 마쳤다"고 기록했다. 법수사터에서 신라 천년사직의 스러진 한을 달랜 범공의 고뇌를 유추해보면 어떨까.
성주 가야산은 가야의 흔적을 품고 있다. 가야산을 오르다보면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가야산성과 복원된 독용산성이 그러하다. 가야산성은 대가야의 흔적이다. 지표조사에서 성의 둘레가 7㎞가 넘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성벽은 거의 무너져 내린 상태다. 지금은 서성재에서 칠불봉을 오르는 구간에서 무너진 가야산성의 흔적들을 볼 수 있다.
독용산성은 1천5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성주를 기반으로 한 성산가야의 대표 성이다. 지금의 독용산성은 옛 모습 수준의 문과 성곽이 복원돼 독용산과 어우러져 성주의 대표 명승지로 자리잡고 있다.
가야산은 크게 성주와 합천을 아우르고 있다. 이젠 성주의 가야산에도 올라 합천으로 기울었던 관심의 추를 평형으로 맞춰 봄은 어떨까.
이종규기자 성주·최재수기자 사진 정운철기자
자문단 배춘석 성주문화원장 곽명창 성주군 문화유산해설사 이길영 성주군 공보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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