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 또한 영남의 인재향

2024. 8. 26. 13:51History & Human Geography

[2009 낙동·백두를 가다] (50) 성주 또한 영남의 인재향
퇴계·남명학파 교유한 곳…'조선학문'의 으뜸고을

 

매일신문

입력 2009-12-18 07:14:42 수정 2009-12-18 07:14:42

 

 

 

 

 

고려충절 도은 이숭인 유허지 ‘청휘당(晴暉堂)’ 도은 기념관

법수사지 방향  백운동 초입인, 성주군 수륜면 신파리에 위치하고 있는‘청휘당’은 1375년(고려 우왕 1) 도은 이숭인이 북원(北元)의 사신을 물리치는 상소를 올렸다가 후환을 입어 성주에 유배되었을 때 창건한 사당이다.

 

 

숭모각(崇募閣)

(숭모각에는 한강 정구 선생의 저서및 문집의 각종 판각등 유물과 유품을 보관하고 있다.)

 

 

성주는 도은 이숭인, 동강 김우옹, 한강 정구, 응와 이원조, 심산 김창숙 등 고려 말 충의를 지킨 선비와 조선 성리학의 대유들을 배출해 ‘영남 고을의 인재향’이라는 이름을 떨쳤다. 성주 수륜 수성리의 ‘갓말’은 한강 선생 후손들의 세거지로 고고한 소나무와 마을 전경이 인재향 성주를 대변하고 하다.

 

청천서당은 1729년(영조 5) 사림에 의해 동강 김우옹을 제향하기 위해  처음에는 청천서원 (晴川書院) 으로 창건되었다.

김우옹은 성주 지역에서 정구와 함께 양강(兩岡)으로 불리며,  퇴계 이황의 제자가 되었다. 

청천서당은 심산 김창숙 생가 인근에 있다. 심산은 청천서당에 성명학교를 세워 성주 땅에 독립의 혼을 심었다.

 

 

회연서원은 한강 선생이 회연초당을 세워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다. 회연서원은 성주를 대표하는 수많은 선비들을 배출했다.

 

정구의 자는 道可(도가) 호는 寒岡(한강) 시호는 文木(문목)으로 아버지 정사중이 성주 이씨와 혼인하여 성주에 정착하여 살았다고 하는데  현풍 낙동강가에 서 있는 도동서원의 주인인 한훤당 김굉필은 그의 외증조가 된다고 합니다.

 

 
 
1년 가까이 경북 낙동강 중·상류지방을 다니면서 ‘영남 고을의 인재 반은 ○○’라는 수식어를 자주 접했다.

안동과 예천, 상주, 선산이 그러하다. 이 반열에 성주도 당당히 그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들 고을의 공통점은 모두 낙동강을 끼고 있다. 낙동강은 마을이라는 터전을 줬고, 마을은 명망높은 인물을 배출하는 허파와 같은 존재로 자리잡았다. 조선 500년에서 안동과 예천, 상주, 선산, 성주 고을은 조선의 인재 보고(寶庫)였던 것이다.

 

인물은 명망높은 가문과 고을에서 비롯된다. 성씨를 보면 알 수 있다. 행정구역 상 지금의 성주 땅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는 모두 28성관(姓貫)이다. 한 지역을 본관으로 하는 성관이 이렇게 많은 경우는 드물다. 그 만큼 본관을 중심으로 성주 땅에 크고 작은 마을이 생겼고, 인물이 났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성주는 지금 임진왜란 때 소실된 성주사고(史庫)를 복원 중이다. 학술조사 보고서를 중심으로 학문의 상징적 존재인 사고를 옛 모습 그대로 되돌리고 있는 것이다. 조선 초기에는 전국에 4대 사고가 있었다. 한양의 춘추관과 충주사고, 전주사고, 성주사고 등이다. 성주에 조선 초기 4대 사고가 있었다는 것은 그 만큼 성주가 조선 학문의 으뜸 고을이라는 뜻이다.

 

그러했다. 성주는 고려 말 충의와 절개의 고장이었고, 조선으로 넘어와선 조선의 통치이념이자 대표 학문인 성리학의 주요 근거지로 으뜸 학자들을 배출했다.

 

가야산 자락의 아늑한 마을인 수륜면 신파리에 청휘당이 있다. 고려 말 고려 왕조에 절의를 지킨 도은 이숭인이 기거하면서 후학을 양성한 곳이다.

 

도은 이숭인은 성주가 고향이다. 성주에 충의와 절개를 심은 대선비이자 당대를 대표하는 문장가이자 시인, 학자였다. 어찌보면 성주 학문의 큰 스승이다.

 

고려 말 ‘삼은’(三隱)은 교과서에 나오는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를 칭한다. 한편으론 학계에선 도은을 삼은에 포함해야 한다는 의견까지 나온 적이 있다. 이는 도은의 명망과 절의, 깊은 학문의 세계를 두고 말하는 찬사가 아니겠는가.

 

목은의 제자인 도은은 어려서부터 학문이 뛰어나 16세에 등과(조선의 과거급제에 해당)했다. 포은과 함께 실록을 편찬했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는 중국의 사대부들이 도은의 저술을 보고 탄복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특히 도은은 시에 뛰어나 남긴 500여 수의 시는 당대 '동방 제일'이라는 명망까지 낳았다.

 

하지만 도은은 포은과 연루됐다는 이유로 유배를 당했고, 지금의 나주 땅에서 정도전의 심복에 의해 생을 마쳤다. 그 때 나이 46세. 고려 왕조에 대한 충의를 다하고 순절한 것이다. 훗날 조선 3대 임금이 된 태종 이방원은 스승인 도은의 죽음을 전해듣고 “도은의 문장과 덕망은 내가 사모해왔다”고 애통해했다고 한다.

 

비록 정치적 이념이 달랐고, 도은이 죽은 후였지만 태종 이방원의 스승에 대한 예의는 임금이 된 후에도 극진했다. 후일 태종은 도은에게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권근·변계량 등 학자들에게 도은의 유집을 발간토록 했다.

 

조선으로 와서 성주는 영남의 인재향(人材鄕)으로 그 이름을 더욱 떨쳤다.

 

훗날 택리지의 저자인 이중환은 인물이 많은 성주를 이렇게 묘사했다. “세 고을(성주)의 논은 영남에서 가장 기름져 씨를 조금만 뿌려도 수확이 많다. 그런 까닭에 고향에 뿌리박고 사는 사람들은 모두 넉넉하게 살며 떠돌아다니는 자가 없다. 성주는 산천이 밝고 수려하여 고려 때부터 문명이 뛰어난 사람들과 이름 높은 선비가 많았다, 조선에 와서도 동강 김우옹과 한강 정구가 이 고을 사람이다.”

동강과 한강은 성주의 ‘이강’(二岡)이다. 그 학문이 뛰어나 성주(星州)가 조선 학문의 으뜸 고장으로 불리게 한 별(星)이다.

일행이 이들 두 선비에게서 주목하는 것은 조선 영남학파의 양대산맥인 이황의 퇴계학파와 조식의 남명학파가 성주 땅에서 교우했다는 점이다. 동강은 남명의 제자이면서도 퇴계의 영향을 받았고, 한강 역시 남명의 제자이자 퇴계의 문인이었기 때문이다. 성주는 퇴계와 조식의 학문이 모두 꽃핀 고을인 것이다.

 

동강은 과거 급제 후 병을 이유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을 수양하다 급제 후 5년 뒤에 첫 벼슬길에 올랐다. 대사성, 이조참판, 예조참판 등을 역임하면서 율곡 이이와 교우하고, 동향인인 한강과도 학문을 논했다. 말년에 인천과 청주에 기거했을 때는 동강은 좇는 선비들이 문전성시를 이뤘다고 한다.

 

한강은 21세때 퇴계의 문하에 들어갔고, 24세가 되어선 남명의 제자가 됐다. 출세의 지름길인 과거보다는 오로지 학문 수양에 정진한 한강은 벼슬이 없는 선비, 포의(布衣)였다. 37세가 되어서야 첫 벼슬길에 나아가 창녕현감을 지냈고, 임진왜란 때는 강원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구국의 길을 걸었다. 전란 후인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한 뒤 대사헌이 되었으나 이후 고향에 돌아가 후학 양성에 몰두했다.

 

한강의 조부인 정응상은 대학자인 한훤당 김굉필의 제자이자 사위였다. 한강이 대학자의 운명을 타고 났다는 이야기다. 퇴계는 한강의 인품과 학문의 깊이에 매료됐고, 한강은 서애 유성룡, 학봉 김성일과 함께 '퇴계문하 삼걸'이라는 칭호도 얻었다. 한강은 낙동강 북부의 퇴계학을 낙동강 중류에 퍼뜨렸고, 동시에 경남 합천의 스승 조식으로부터 배운 남명학을 성주 땅에 심었다.

 

한강은 퇴계와 남명 두 스승의 장점을 잘 조화시켜 후에는 자신만의 독특한 학문 세계를 열었다. 그는 우주공간의 모든 것을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경세, 병학, 의학, 역사, 천문, 풍수지리 등에 통달했는데, 특히 예학에 밝았다.

 

그는 예는 가깝고 먼 것을 정하고, 믿고 또 못 믿음을 결정하고, 같고 다름을 구별하고, 옳고 그름을 밝히는 기준이라 했다. 한강은 한국철학사에서 예학을 연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한강은 성주 땅에 풍류도 낳았다. 가천면에서 수륜면 소재지로 가는 33번 국도 변에 대가천이 흐르고, 대가천 변에는 규모면에서 퇴계의 도산서원에 버금가는 회연서원이 있다. 한강이 후학을 가르쳤던 곳이다. 서원의 절벽인 봉비암은 무흘구곡이 시작되는 곳이다. 무흘구곡은 대구 사람치고 모르는 이가 드물다. 대구 사람들로부터 여름 피서지로 각광받는 계곡이기 때문이다.

 

서원의 전신인 회연초당에서 후학을 가르치던 한강은 중국 송나라 주자의 '무이구곡'을 떠올리며 봉비암에서 용추폭포까지의 아홉 절경을 '무흘구곡'이라 정하고, 1곡인 봉비암을 시작으로 시를 읊었다.

 

도은에서 시작돼 이강으로 대표되는 성주 학문은 조선 후기 최고의 선비였던 응와 이원조로 이어진다.

한개마을에서 태어난 응와는 입재 정종로의 제자다. 입재는 퇴계 학맥을 이은 대산 이상정의 문인이면서 우복 정경세의 6대손이다. 이황-류성룡-정경세로 이어지는 학문과 김성일-이현일-이상정으로 이어지는 학맥을 연결시킨 인물이 곧 입재였다. 입재의 학문을 계승한 응와는 '응와문집' 등 13종의 저서를 남겼다.

 

또한 응와는 공조판서, 대사간, 판금부의사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응와가 정계에 진출한 시기는 세도정치기. 영남 남인이 괄시받던 당시 응와는 뛰어난 학문을 소유한 영남 남인의 대표 관료로 정계에 당당히 나아간 것이다. 스스로 “성품이 산수를 좋아한다”고 밝힌 응와는 말년에 고향의 포천계곡에 만귀정을 짓고 마지막 학문적 열정을 불태웠다. 응와는 무이구곡에 견주어 포천계곡의 구곡의 시도 남겼다.

 

성주의 인물을 논할 때 심산 김창숙을 빼놓을 순 없다. 대가면 칠봉리의 심산 생가는 지금 며느리 손응교 여사가 홀로 집을 지키고 있다.

 

선비란 어떤 존재인가? 오로지 학문에만 매진한다고서 선비이겠는가. 의를 배우고, 이를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 임진왜란 때 선비들은 구국을 위해 분연히 일어났고, 구한말에도 항일독립운동으로 선비의 의를 실천했다.

 

유학자인 심산은 조선 말기의 마지막 영남 선비 중 한 분이었다. 심산은 동강 김우옹의 후손이다. 20대의 젊은 유학자 심산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서울로 올라가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을 성토하는 상소를 올려 옥고를 치렀다. 1909년 고향에서 성명학교를 세운 뒤 인재를 키우는데 매진했다. 성명학교는 지금 심산 생가 인근에 위치한 청천서당 자리다. 3·1운동 후 중국으로 건너간 심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 되었고, 이듬해 귀국해 제 1차 유림단사건으로 일컬어지는 ‘파리장서사건' (우리의 독립 의지를 세계 만방에 알린 사건)에 연루돼 체포됐다. 심산은 출옥 후 다시 중국으로 가서 서로군정서 군사선전위원장,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 등을 맡으며 독립운동을 계속하다 본국으로 압송돼 다시 투옥됐다. 광복 후 심산은 유도회를 조직하고 성균관대학교 초대 총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성주 학문은 일제 강점시 심산을 비롯 성주 유림들에게 항일운동이라는 선비 정신을 낳게 한 것이다.

초전면 고산리에는 백세각이 있다. 심산, 면우 곽종석, 공산 송준필 등 성주 유림들이 파리장서사건을 논의했던 바로 그 자리다. 파리장서에 서명한 유림 137명 가운데 13명이 성주 유림이었다. 조선 후기 대유학자인 한주 이진상의 맏아들인 대계 이승희 역시 서상돈과 함께 국채보상운동을 벌였고, 고종 양위사건이 일어나자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해 이상설 등과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