鐵嶺은 한양에서 원산으로 가는 길에 있는 고개 - 미수복 강원도의 명소

2024. 10. 8. 06:55Wonderful World

철령鐵嶺은

한양(지금의 서울)에서 원산으로 가는 길에 있는 고개

 

철령의 설경 (출처 자주시보)

 

김화평야와 민통선 DMZ를 넘으면 광삼평야와 남대천이 펼쳐진다.

 

 

입력 2020. 9. 29. 06:53

(평양 노동신문=뉴스1) =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2020년 9월  29일 다가오는 당 창건 75주년(10월10일)을 기념해 당의 역사를 돌아보고 관련 사진을 게재했다. 신문은 사진과 함께 "철령이여 길이 전하라, 위대한 장군님의 불멸의 선군영도 업적을"이라고 덧붙였다.

 

 

높이 685m. 고개  철령(鐵嶺)은.

함경남도 안변군 신고산면과 강원도 회양군(현 북한의 금강군) 하북면 사이에 있는 고개로,  군사 요새를 만들고 철령관(鐵嶺關)이라 불렀다.

 

철령관(鐵嶺關)을 중심으로

동쪽인 강원도는 관동(關東)지방,

북쪽인 함경도는 관북(關北)지방,

서쪽인 평안도는 관서(關西)지방으로 불린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철령(鐵嶺)은. 서울과 관북지방 사이, 회양과 고산, 안변을 연결하는 교통·군사상의 중요한 고개였다. 

옛 31번 국도로 넘을 수 있으며중부 지방과 관북 지방을 잇는 중요한 교통로입니다.

 

고산은 고개 북쪽, 회양은 고개 남쪽에 발달한 영하취락(嶺下聚落)이다. 

철령에는 지금도 석성(石城)터가 남아 있고 부근에 고음폭포(鼓音瀑布) ·취적5경(吹笛五景) 등이 있다.

 

서쪽의 풍류산(風流山)과 동쪽의 장수봉(將帥峰)이 천하의 난관을 이루며 북한강과 안변 남대천(安邊南大川)의 수원이다.

 

1388년(고려 우왕 14) 명나라가 철령 이북은 본래 원나라 땅이라 하며 요동(遼東) 관할하에 두겠다고 통보해오자, 고려에서는 이에 반대하고 철령뿐만 아니라 그 이북의 공산령(公山嶺)까지도 본래는 고려의 영토라 하여 요동정벌을 결의하였다.

 

 당시 실권자였던 최영은 당연히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요동정벌에 나섰는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 자체가 바뀌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이성계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요동정벌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철령 이북의 땅도 명나라에 귀속되지 않았다.
 

철령을 넘으면 삭방(朔方)이라 하였는데 비록 고개 하나에 불과했지만 이 고개를 사이로 이쪽과 저쪽의 풍물과 민정(民情)이 서로 달라 관념상의 높이는 실제보다 훨씬 높았다.

 

 

 

백사(白沙이항복(李恒福,1556-1618)은  광해군 5년에 일어난 계축옥사(癸丑獄事)와 관련되어

5년후 삭탈관직 당해 북청(北靑)으로 유배되었을 때  철령(鐵嶺)고개를 넘으면서 시 한 수 읊조리다.

 

철령 높은 봉에
- 이항복

 

철령(鐵嶺) 높은 봉(峯)에 쉬어 넘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孤臣寃淚)를 비삼아 띄어다가 
님 계신 구중심처(九重深處)에 뿌려 본들 어떠리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은 조선 중기에 영의정을 지낸 문신으로 오성대감(鰲城大監)이라 한다. 호는 백사(白沙)이다. 이 시조는 인목대비 폐비론을 반대하다 유배 길에 오른 자신의 심경을 표현한 작품으로 철령의 높은 산봉우리에 걸쳐 있는 구름을 자신의 모습으로 투영하여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표현하고 있으며,  고신(孤臣)이란 말은 임금의 은총을 받지 못하는 외로운 신하란 뜻으로 내침을 받은 그 서러움을 궁궐에 계신 임금님께 빗물로 뿌려 자신의 충절을 알리고픈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전편에 충절심이 면면히 흐르고 있다. 

 

철령관을 중심으로  동쪽인 강원도는 관동지방, 북쪽인 함경도는 관북지방, 서쪽인 평안도는 관서지방으로 불린다.

관동지방인 강원도는 ‘영동(嶺東)’과 ‘영서(嶺西)’로 다시 나누는데

이는 태백산맥의 대관령(大關嶺) 마루를 기준으로 동쪽 지방과 서쪽 지방을 말한다.

 

정철 선생의 관동별곡은 바로 이 지역을 유람하고 쓴 글이다.

 

 

 

 

자고 가는 저 구름아 - 위키리

 

경현철(景鉉喆) 작사/ 이인권 작곡

그랜드(LG-50029) /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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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람도 불지 않고 산새도 울지 않는     
   높고 높은 철령재에 자고 가는 구름아       
   물어보자 세상살이 인정없고 말도 많은데   
  너는 어이 말도없이 흘러만가나 흘러만가나

 

 

2.

세상이 싫었던가 인간이 싫었던가   
철령 높은 고개 위에 자고 가는 구름아
물어보자 인생살이 한도 많고 고달픈데
     너는 어이 지향없이 흘러만가나 흘러만가나

 

 

철령 鐵嶺 - 미수복 강원도의 명소

|작성자 이북도민작가 이동현

2018. 3. 4. 23:59

 

 

철령(鐵嶺)은 강원도 회양군과 고산군 사이에 있는 고개로서 높이는 685m입니다이 고개를 기준으로 동쪽을 관동서쪽을 관서북쪽을 관북이라 합니다옛 31번 국도로 넘을 수 있으며중부 지방과 관북 지방을 잇는 중요한 교통로입니다.
 
고려 공민왕 때 쌍성총관부를 수복하면서 이 고개도 다시 고려 땅이 되었는데후에 원나라를 밀어내고 들어선 명나라가 고려에게 본디 철령 이북은 원나라가 다스렸으니 원나라를 밀어낸 자신들이 다스려야 한다며 도로 내놓으라 했습니다당시 실권자였던 최영은 당연히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요동정벌에 나섰는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 자체가 바뀌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철령을 넘으면 삭방(朔方)이라 하였는데 비록 고개 하나에 불과했지만 이 고개를 사이로 이쪽과 저쪽의 풍물과 민정(民情)이 서로 달라 관념상의 높이는 실제보다 훨씬 높았습니다.

201110월 북한의 철령을 방문한 외국기자의 답사기를 소개합니다.
철령-미수복강원도의 명소   이북도민작가 이동현
 

 

북한 백두대간에의 첫 발 – 철령 (鐵嶺)


BY ADMIN | PUBLISHED OCT 24 2014
로저 셰퍼드 번역 한영환

2011년 10월에  강원도 고산군  철령을 방문한 외국기자의 답사기

 

만약 여러분이 백두대간의 개요를 보여주는 한반도 지도를 본다면백두대간의 대략 중간 쯤에 남쪽을 향하고 있는 거의 쐐기 모양의 L자형 굴곡 부분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작년 초 내가 평양의 김일성대학교에 가서 두 지리학 교수를 만났는데그들은 이 지역의 어느 곳이 백두대간의 정확한 중간 지점으로 바위에 표시가 있었다고 말했다(북한에서는 백두대간을 백두대산줄기라고 부른다). 그리고 덧붙여 그들은 그 표시가 해발 5-600미터에 있었는데 일제 강정기 때 일본인들이 그것을 징으로 뭉게버렸다고 말했다그 두 교수는 이 중간 지역을 철령이라고 불렀다철령은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신산경표에는 표시되어있지 않다나의 북한 인솔자들도 우리가 가려는 곳에 대해 전혀 몰랐다그들중 이전에 이 지역에 가본 사람이 없었다심지어 쾌활한 성격의 운전기사 한 씨도 백두대간의 산으로의 운전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원산은 동해안에 있는 북한의 항구 도시이다외형은 북한의 다른 도시와 비슷했다도시 도로는 아스팔트 포장이 되었으나 평평하지 않았고 패인 곳도 있었으나 깨끗했다건물들의 칠은 바랬고 일부 흰 페인트가 갈라진 곳도 있었으나닫힌 창문 밖에 고운 꽃을 담은 화분들이 늘어선 곳도 있었다북한 도시에는 환상 교차로(로터리)가 많았는데늘 그렇듯이 큰 시멘트 게시판에 위대한 지도자들의 정책을 찬양하는 글이 적혀 있었다때때로 이런 로터리에는 곤색 제복을 입은 예쁜 아가씨가 교통을 정리하고 있었다정확한 수신호로 차에게 방향을 지시하는 그녀들은 잘 훈련되어 보였다.

 

이날 아침 일찍 우리가 떠난 호텔은 10층이었는데시금치 색과 비슷한 녹색으로 칠해졌다호텔 방에서 조용한 여흥만의 바다가 내려다 보였다부두에는 검은 굴뚝을 가진 낡은 배 몇 척이 밧줄로 서로 묶여서 흔들리고 있었다일부 해안에는 노랗게 단풍이 들고 있는 큰 나무들이 늘어서 있어 운치가 있었다그 나무들 밑으로 색이 바래가는 흰 콘크리트로 만든 배를 메는 기둥들이 늘어서 있었다이곳에서 재미로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한가로이 낚시대를 드리우고 있었다때때로 아이들도 온다고 했다할 일이 없을 때 탐욕을 버린 한가로운 마음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원산을 떠난 뒤 논들이 나타났는데이미 수확이 끝나 짚단들이 세워져 있었다그들 뒤로 산들이 지평을 이루고 있었고다가오는 비구름으로 인해 검게 보였다경치가 초현실적이었다.
 
우리가 철령에 도달하기 전에 들른 첫 작은 읍은 고산인데원산에서 서남쪽으로 약 30 킬로미터 떨어져있었다중심 거리만이 아스팔트 포장이 되었으나 크게 갈라진 데가 있었다우리가 비포장 도로로 접어들어갔는데이곳은 장마 때 진창이 될 것으로 보였다지역 위원회 건물 밖에 정차한 뒤 황성철이 들어갔다가 얼마 뒤에 우리를 안내할 현지 관리 한 사람을 데리고 나왔다그는 내가 본 중에서 가장 몸집이 작은 사람이었다그의 체구가 아주 작기 때문에 그를 조수석에 앉은 황철영의 옆에 앉혔다.

 

그 날 오전 우리가 철령을 향해 꼬불꼬불한 비포장 도로를 달려갔다과거 일인들이 백두대간의 정기를 끊으려고 그 바위 능선을 자르려고 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지만그것이 엄청난 작업이어서 실제로 그런 일을 하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내가 차를 타고 가는 동안 가져보았다얼마 뒤 우리가 철령에 도착했다고개 꼭대기로 비포장 도로가 나있었는데그곳에 군인 초소가 있었다우리가 있어도 군인들은 태평하게 있었으며우리도 주위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그러나 내가 사진을 찍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민간인과 더 많은 군인들을 태운 트럭들이 고개를 넘을 때마다 초소 앞에서 정차했다심지어 일부 사람들은 고개 꼭대기로 걸어가기도 했다사람들은 긴 여행으로 피로해 보였다고개의 한편에 주차장이 있었으며 그곳에 흰 콩크리트 게시판이 있었는데붉은 색으로 쓰여진 한글 게시문이 있었다한국전쟁 때 이 격전지에서 희생된 많은 전사자들에 대한 김일성 수령의 격려가 적혀 있다고 했다그러나 일제 강정기 때 일본인들이 백두대간의 정기를 끊으려고 시도했다는 따위의 산에 관한 내용은 없었다.
 
우리 모두는 나무 그늘 밑에 둘러 앉아평양 소주와 맛좋은 대동강 맥주를 곁들이면서 점심을 먹었다서둘러 마련한 점심은 밥김치불고기였다점심 뒤 우리는 백두대간 능선으로 걸어 올라가서 장수봉(1,053m) 쪽으로 갔다오래 된 산길 입구 옆에는 소나무들이 있었으며그곳에 원색으로 칠한 호랑이와 곰의 모형이 있어 전략적으로 중요한 이 고개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해주고 있었다지형은 인상적이지 않았지만이곳은 내가 북한에서 바로 백두대간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곳이어서 감개가 무량했다.

 

약 30분 뒤 수확이 끝난 작은 채소밭이 나타났다이 밭은 TV 안테나를 관리하는 작은 집의 거주자들이 여름 동안 채소를 얻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이곳에서의 360도 조망이 훌륭하여 철령 고개를 포함한 능선을 촬영하기에 좋았다우리의 현지 안내자는 그 지역을 잘 알고 있어백두대간의 주요 지점들을 지적해주었다약 2 km 서쪽으로 풍류산(1,058 m)이 있는데그것은 40 km 되는 좁은 L자형 굴곡의 동쪽 끝이다. L자형 굴곡은 남쪽으로 뻗어 새포에 도달한다날씨가 청명했기 때문에 그는 또한 멀리 서쪽에 있는 추애산(1,528 m)을 가리킬 수 있었다이 산은 L자형 굴곡의 서쪽 끝인데우리 위치에서 단지 15 km 떨어져있었다우리의 남쪽으로 북한강의 수원을 이루는 지형을 바라볼 수 있었다이 북한강이 나중에 양평의 한강지맥의 끝에서 한강에 합류하게 된다한국의 강산을 산 능선들과 강들이 연결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새삼스럽게 감회를 느꼈다나는 동남 쪽으로 약 70 km 떨어진 곳에 있을 금강산의 날카로운 봉우리들을 상상해 보았다약 한 시간 더 우리는 능선 위에 머물러 따스한 가을 해와 멀리 펼쳐지는 조망을 즐겼다그 뒤 우리는 철령으로 걸어내려가 전쟁기념비 앞에서 단체 기념 사진을 찍었다그리고 우리는 자동차를 타고 꼬불꼬불한 산길을 따라 고산으로 내려갔다이번에는 대부분의 구비에서 정차하여 차에서 내려서백두대간의 산허리를 덮고 있는 밝고 고운 색의 단풍을 구경했다.
 
 
이날 우리에게 아직 몇 시간이 남아있어 예정된 길을 우회하기로 결정했다황성철이 내가 불교 문화에 관심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현지 안내자가 구룡리의 작은 마을 근처에 큰 옛 절터가 있다고 알려주었다얼마 뒤 우리가 석왕사지(釋王寺址역주-이성계가 꿈에 석가래를 본 것을 그가 왕이 될 꿈이라고 해몽해준 무학대사를 위해 창건된 절로 알려지고 있다)의 정문에 도착했다절터 안으로 들어가는 차도의 양 옆에는 큰 나무들이 서있었다우리는 빈 주차장에 주차했다한편에서 일단의 남녀가 들놀이 파티를 벌리고 있었다큰 카세트 플레이어에서 음악이 요란하게 흘러나왔는데그것은 80년대에 ghetto blaster(역주-대형 휴대용 라디오 카세트)라고 불리었을 것이다스피커에서 잡음이 났으며때때로 카세트의 속도가 느려져서 음악의 맥이 풀렸다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은 흥겹게 춤을 추었다그들의 한국식 춤은 큰 학이 날개를 얌전히 펼치고 땅을 걸어가는 모습이었다.
 

우리는 걸어서 절터의 첫 문을 지나갔는데 잎이 노래진 아주 큰 느티나무가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아래에 있는 설명판에 따르면절이 창건되던 같은 해인 1336에 식목된 것으로 북한의 국가 자연기념물 제208로 지정된 것이다나무 줄기 둘레가 거의 8 m이고 높이가 25 m나 되어 위압적으로 보였다그것이 한국에서 가장 큰 느티나무라고 한다

석왕사 절터로 갔는데지금은 건물이 거의 없고 터만 남아있다유일하게 남은 건축물은 1394년에 지어진 불이문(不二門)뿐이었다그리고 나중에 지은 종각과  복원된 사천왕문이 유일한 다른 건물이었다그런데 이 사천왕문에는 사천왕들의 조상이 없었다법당과 경당이었던 곳에는 주춧돌들만이 남아있었다나는 이 절터의 현황에 관심이 있을 사람이 남한에 있을 것으로 여겨 가능한 한 많은 사진을 찍었다우리가 절터를 떠나려고 할 때 절터 안내자이기도 한 현지 여인을 만났다우리가 그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에도 여흥을 즐기는 사람들의 춤판은 계속 신나게 진행되고 있었다그녀에 따르면이 절의 아주 유명한 스님은 무학대사이며한때에는 9개의 전각이 절터를 메우고 300명의 비구와 200명의 비구니가 머물고 있었다고 했다이 절은 한국전쟁 때 미군의 폭격으로 소실된 뒤 복원되지 않고 있다북한에는 재발견되어야 할 많은 불교 유적지가 있을텐데나는 미래의 어느 날 그것들을 볼 수 있기를 바랬다.

 

우리가 투숙한 원산의 호텔로 돌아왔을 때 거의 어두워졌다내가 금강산 밖의 백두대간에 첫 발을 디디는 등 하루 종일 바쁘게 보낸 날이었다나는 내가 북한에 머무는 동안 이런 특전이 계속 베풀어지기를 바랬다사실 나는 나의 북한과의 관계가 오래 지속되기를 원했다그런 기분은 내가 이번의 첫 백두대간 탐방에서 얻은 좋은 느낌에 고무된 것이리라. (번역 한영환)

 

철령-미수복강원도의 명소(3)|작성자 이북도민작가 이동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