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星州) 고산정(高山亭) 백세각(百世閣)

2024. 10. 17. 08:52Wonderful World

 

 

성주(星州) 고산정(高山亭) 백세각(百世閣)

 

 

백세각 (百世閣)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에 있는 조선전기 문신 야계 송희규 관련 주택.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63호.

조선 전기의 문신 야계(倻溪)송희규(宋希奎)가 사헌부 집의(執義)로 있으면서 명종의 외삼촌인 영의정 윤원형(尹元衡)과 이기(李芑)를 탄핵하다가 귀양살이를 하고 돌아와 1561년(명종 6년)에 지은 제택(第宅)이다. 쇠못을 사용하지 않고 구멍을 뚫어 싸리로 얽었으며, 대패질을 하지 않고 자귀만으로 깎아 다듬어 만든 건물로 유명하다.

전체적으로 정침과 별당,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면에 일각 대문을 두고, 주위에 토석 담장을 돌려 영역을 한정하고 그 안의 다소 높은 기단 위에 백세각이 남남동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 좌측 별곽에는 사당이 있으며 백세각 앞쪽 우측에는 관리사가 각각 위치한다.

정침의 평면은 정면 7칸, 측면 6칸의 ‘구(口)’자형이다. 정면 7칸 중 동쪽에서부터 헛방, 마구칸이 1칸씩 놓이고, 그 다음이 중문칸이다. 중문칸 서쪽으로는 사랑방 2칸과 사랑대청 2칸을 두었고, 사랑방과 마루 앞쪽에는 툇마루가 놓여 있는데 사랑방 앞 쌍여닫이 세살창문에는 각각 고졸한 구조의 가운데 설주가 서 있다. 앞마당 뒤의 안채 부분에는 3칸의 안대청을 중심으로 서측에는 건넌방과 마루방, 안사랑방과 부엌이 앞채에 이어졌고, 동측에는 안방과 부엌, 뒤주 등이 앞채의 마구간으로 이어진다.

안방과 안사랑방, 안대청 뒷벽의 창문에도 가운데 설주가 서 있다. 기단은 네모나게 잘 다듬은 돌을 4겹으로 쌓아 놓았고 자연석 초석을 놓아 각주를 세운 집이다. 사랑마루와 안대청 상부가구는 3량가에 제형 판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얹은 간소한 구조이며, 홑처마에 맞배집이다.

이 건물에는 이율곡(李栗谷), 한석봉(韓石峰), 채번암(蔡樊岩)의 친필이 각각 한 점씩 소장되어 있었으나, 한석봉의 친필은 1970년에 도난당하였다. 별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대청과 전(田)자형 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있고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다.

1919년 3ㆍ1운동 당시 공산(恭山)송준필(宋浚弼)을 위시한 그 문인들이 성주시장일에 배포한 독립청원장서 3,000장을 복사했다고 전하며, 또한 경북 유림단 파리장서 사건의 모의 장소로 사용되어 3ㆍ1독립운동과도 관련이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성주백세각(星州百世閣) ]

백세각

백세각(송준강서)

야계(송희규의 호)고택


송준필(宋浚弼, 1869년(고종 6) ~ 1943년)

경상북도 성주 출신. 본관은 야성(冶城), 자는 순좌(舜佐), 호는 공산(恭山). 아버지는 송기선(宋祺善)이다.

이진상(李震相)의 강학에 참석했고, 1886년(고종 23)부터 장복추(張福樞)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후에 김흥락(金興洛)의 문하에서 수학하기도 하였으며, 당시 영남의 석학들 문하에 폭넓게 왕래하며 수학하였다.

1919년 유림의 독립청원운동인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에서 곽종석(郭鍾錫)·장석영(張錫英) 등과 더불어 활동함으로써 의리정신과 민족의식을 발휘하였다. 만년에는 김천에서 살았다.

송준필의 성리설은 주로 이황(李滉)의 심합이기설(心合理氣說)을 따른 장복추의 영향 속에 형성되었다. 송준필은 성리설의 학통에서 이상정(李象靖)을 중시하여 주희(朱熹)와 이황의 정맥(正脈)을 이상정이라고 파악한다.

나아가 이황은 마음을 통합적[渾淪]으로도 설명하고 분별적[分開]으로도 설명한 데 반해, 이이(李珥)는 통합적인 파악을 내세워 분별적 이해를 공격했다고 지적하였다. 여기에 덧붙여 이현일(李玄逸)·권상일(權相一) 등은 분별적 설명을 강조하여 통합적 파악을 거부한 반면, 이상정은 이러한 대립된 견해를 통합하여 이황의 본래 의도를 발휘하였다고 본다.

송준필은 당시의 다양한 성리설에 대해 예리한 분석을 하고 있다. 이진상의 심즉리설(心卽理說)은 보통 사람의 마음이 아니라 성인의 마음을 가리킨 것이라 지적하면서도, 마음과 본성을 일치시켜 마음이 기질과 결합된 사실을 외면하는 것은 일치시킬 줄만 알고 분별하여 이해할 줄은 모르는 것이라 비판한다. 또한 전우(田愚)의 성존심비설(性尊心卑說)은 본성을 이(理)로 보아 존중하는 것을 시인하면서도, 마음을 본성과 상대시켜 비하했는데, 송준필은 이러한 견해를 거부하였다.

송준필은 당시에 성리학설이 심즉리설이나 심즉기설(心卽氣說)로 양극적 대립을 보이는 현실을 서로 이기려고만 드는 것으로 깊이 경계하면서, 두 입장의 부분적 타당성을 인정하며, 동시에 심합이기설로 통합할 것을 역설하였다.

송준필은 이황의 『성학십도(聖學十圖)』 제6도를 심화시킨 『심통성정삼도발휘(心統性情三圖發揮)』(1928)에서 송대 성리설과 퇴계학통의 성리설을 정연하게 체계화시키고, 나아가 자신의 성리설을 정립하고 있다. 이 저술은 20세기 초에 정리된 성리학설의 일대 집약이라 할 수 있다.

그 밖의 주요 저서로는 성리학에 관한 『대산서절요(大山書節要)』·『사물잠집설(四勿箴集說)』 등이 있고, 예학에 관한 『육례수략(六禮修略)』이 있다. 또한 수양론 및 윤리서로는 『오선생미언(五先生微言)』·『정학입문(正學入門)』이 있고, 역사서로는 『속속자치통감강목(續續資治通鑑綱目)』이 있으며, 문집으로는 『공산집(恭山集)』이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송준필(宋浚弼) ]


이상정(李象靖, 1711년(숙종 37) ~ 1781년(정조 5))

경상북도 안동 출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경문(景文), 호는 대산(大山). 아버지는 이태화(李泰和)이며, 어머니는 재령 이씨(載寧李氏)로 이현일(李玄逸)의 손녀이며 이재(李栽)의 딸이다.

1735년(영조 11) 사마시와 대과에 급제하여 가주서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1739년 연원찰방(連原察訪)에 임명되었으나, 이듬 해 9월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대산서당(大山書堂)을 짓고 제자 교육과 학문 연구에 힘썼다.

1753년 연일현감이 되어 민폐를 제거하고 교육을 진흥하는 데 진력하였다. 2년 2개월 만에 사직하려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자, 그대로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고신(告身: 직첩의 별칭)을 박탈당하였다. 그 이후로는 오직 학문에만 힘을 쏟아 사우들과 강론하고, 제자를 교육하는 데 전념하였다. 정조가 왕위에 오른 뒤 병조참지·예조참의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상정은 이황(李滉) 이후 기호학파에 비해 상대적으로 침체된 영남학파에서 이황의 계승을 주창하고 일어난 이현일·이재로 이어진 영남 이학파의 중추적 인물이다. 이상정은 외할아버지 이재를 통해 영남 이학파의 학풍을 계승하는 한편, 그 근원이 되는 이황의 사상을 계승하고 정의하는 입장에서 사상적 터전을 마련하였다. 특히 이황의 존리적(尊理的)인 입장을 견지하면서 『독성학집요(讀聖學輯要)』 등의 저술을 통해 이기를 대등하게 보는 기호학파의 태도를 거부하였다.

한편 이황의 존리적인 태도를 하나의 이념으로 받아들여 일방적인 주리론을 펴는 것을 반대하고, 이(理)의 동정(動靜)과 이기(理氣)의 선후(先後) 등이 가지는 의미를 해명하고 본 뜻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또한 성명이기(性命理氣)에 대한 논의보다는 덕성을 배양하는 일용궁행(日用躬行)의 실천적 공부에 치중해야 함을 강조하였고, 일용평상(日用平常)의 도리인 유학의 본지로 돌아가는 일을 몸소 실천하였다.

이상정의 학문적 흐름은 동생 이광정(李光靖)과 남한조(南漢朝)를 통해 유치명(柳致明)으로 이어지고, 이진상(李震相)에 이르러 유리론(唯理論)으로 전개되었으며,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는 곽종석(郭鍾錫)으로 계승되었다.

이상정은 학문에 크게 힘써 문장·율려(律呂) 등 제도문물에 대하여 연구하고 경학에 침잠하였다. 저서 및 편저로는 『사례상변통고(四禮常變通攷)』·『약중편(約中編)』·『퇴도서절요(退陶書節要)』·『심동정도(心動靜圖)』·『이기휘편(理氣彙編)』·『경재잠집설(敬齋箴集說)』·『심무출입설(心無出入說)』·『주자어절요(朱子語節要)』·『밀암선생연보(密庵先生年譜)』·『심경강록간보(心經講錄刊補)』·『연평답문속록(延平答問續錄)』 등이 있다.

고종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고산서원(高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상정(李象靖) ]


백세각 항일의적비 (百世閣 抗日義蹟碑)

백세각 항일의적비

국내에 통고하는 글(통고국내문 ,通告國內文 )

'아!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렸으니 나라가 회복되면 죽어도 오히려 사는 것이요, 나라가 회복되지 못하면 살아도 또한 죽은 것이다. 이 날이 무슨 날인가. 서울을 비롯하여 밖으로 이름 있는 도시와 큰 항구 및 깊은 산골 외진 마을에 이르기까지 혈기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환호하고 춤추며 한 마음으로 함께 외치지 않는 자가 없으니, 하늘의 뜻이 화를 내린 것을 뉘우치고 사람들의 마음이 단결되었음을 이미 알 수 있도다.

 

아! 우리가 입을 다물고 혀를 깨물며 분노의 눈물을 흘리고 소리 없이 통곡한 지가 지금 십년이 되었도다. 이제 천 년에 한번 있는 기회를 만나 만방의 여론이 스스로 공평하여 나라가 회복할 가망이 있는데도 우리가 어떤 사람이기에 문을 닫고 앉아만 있을 수 있겠는가.

 

이에 우리는 울분을 이기지 못하여 글을 띄워 우러러 고하노니, 이것은 실로 온 나라가 같은 심정일 것이며, 여러 군자들의 생각 또한 마음속에서 빛날 것이다. 원컨대 지금부터 군에서 향으로 향에서 동에 이르기까지 각각 독립의 깃발을 세워, 종노릇 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뜻을 밝히자. 그리고 다시 만국회의에 글을 보내어 우리의 실정과 소원을 알게 함으로써 공평한 여론이 널리 펼쳐지게 한다면 천만다행이리라.'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보내기 위해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서한을 작성한 사건.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자 유림측에서도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는 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장문의 서한을 작성하였다. 이 사건은 전에 의병을 일으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던 호서지방의 유종(儒宗)인 전 승지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대부분 의병에 참여하였던 김덕진(金德鎭)·안병찬(安炳瓚)·김봉제(金鳳濟)·임한주(林翰周)·전양진(田穰鎭)·최중식(崔中軾, 혹은 崔中式) 등에 의해 이뤄졌다.

그들이 작성한 서한은 현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요지는 일본의 배신행위와 명성황후(明成皇后)와 고종의 시해, 그리고 한국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고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호서지방 유림들의 활동이 전개되고 있을 때, 영남유림에서도 곽종석(郭鍾錫)·김창숙(金昌淑) 등이 필두로 같은 목적의 일이 추진되고 있었다. 그 뒤 영남유림은 이런 사실을 알고 영남본(嶺南本)을 전용학(田溶學)에게 주며 홍성으로 가서 호서본(湖西本)과 비교, 검토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교정본이 작성되기 전에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선정된 김창숙이 시급히 상해(上海)로 출발하게 되었다. 이에 서울유림들은 영남본이나 호서본의 내용이 서로 뜻이 같으나, 영남본이 호서본보다 포괄적이면서도 뜻이 명확하다는 여론에 따라 김창숙에게 영남본을 주어 출발시켰다. 그리고 장서 말미에 134명 유림대표가 서명하였으며, 대표파견 경비는 황일성(黃佾性)이 조달하였다.

그러나 장서는 김창숙이 파리로 가져가지 못하고, 당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 대표로 선정되어 파리에 가 있던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되었으며, 또한 국내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그런데 같은 해 4월 12일 경상북도 성주의 만세시위운동에 관련되어 일본경찰에 붙잡혔던 송회근(宋晦根)에 의해 사건이 발각됨으로써 관계자들이 피체되어 옥고를 겪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

파리장서와 서명자 명단

(공훈전자사료관 (mpva.go.kr)에서 인용하였습니다.)

1. 파리장서

한국유림대표 곽종석·김복한 등 137인은 삼가 파리평화회의 제대위 각하에게 봉서하노라 하늘 및 땅 위 모든 만물이 함께 생성발육하고 있으니 이는 큰 광명의 비침과 큰 대화(大化)의 행함으로써 그 진리를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생활의 혼단(混端)이 일어남으로써 강약의 세가 나뉘고 겸병(兼幷)의 권력이 움직임으로써 대소의 형세가 달라져 마침내 남의 생명을 해쳐가며 그 위력을 자행하고 남의 나라를 도절하여 제것으로 만드니 아-천하에는 어찌 이런 일들이 그다지도 많은고? 이것은 하늘이 위대한 여러분을 보내시어 하늘의 뜻을 받들어 큰 영광을 비치고 크게 대화를 행하여 온 천하를 한결 같이 대동의 세계로 돌아가게 하고 만물로 하여금 각기 그 자유를 누리게 함으로써 만국을 통일시하고 나해를 평등화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의 1이라도 지구상에서 이러한 소식을 듣고 실제의 혜택을 얻지 못하거나 또는 원통한 충정을 품고도 공의에 호소할 기회를 갖지 못한다면 이 어찌 모든 여러분 사명이 오직 여기에만 다할 수 있겠는가?

 

지금 우리가 피를 끓으며 모든 억울한 실정을 호소하는 것도 또한 참을 수 없는 박절한 심정을 토로하는 것이니 모든 여러분은 자세히 살피시라.

 

오! 한국도 천하 만방의 하나로서 지역이 3천리요 인민이 2천 만이오 또한 4천년 여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반도 문명국임은 온 세계가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국운이 불행하여 강인(强隣)의 외제(外制)로서 모든 조약이 강제로 체결 되었을 뿐 아니라 마침내는 국토를 빼앗고 왕위를 폐하여 우리한국을 이 세계 열방에서 제외하였으니 일본의 이 같은 행위를 대략 열거코자 한다.

 

병자년(서기 1876년) 우리나라 대신과의 강화조약이나 을미년(서기 1895년) 청국대신과의 마관 조약에서 한결같이 “한국의 자주독립에 대한 조약을 영구히 준수하다”하였고 또 계묘년(서기 1903년) 러시아에 선전할 때에도 “한국의 독립을 공고히 한다”는 것을 분명히 세계에 성명하였으니 이는 세계가 주지하는 사실이다.

 

그러고도 미구한 시일에 그들로 부터 온갖 사기와 조작이 연출되어 내정의 협박과 외교의 기만으로 독립이 보호로 변하고 보호가 합병으로 변하게 한 다음 극소수의 친일분자를 사주하여 “이것이 곧 한국민의 소원이라” 가장하고 세계의 공의를 도면(圖免)하려 하니 이것은 곧 한국만을 그들이 무시하였을 뿐 아니라 기실은 만방도 그들의 심중에 두지 않았던 것이다.

 

만국대표 여러분! 일본의 우리한국에 대한 이러한 행위가 과연 세계 공의에 위배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또한 일본이 세계만방에 그 신의를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우리한국 인민이 비록 적수공권으로 스스로 분기치 못할 것도 알고 있었으나 자나 깨나 이 나라 이 백성은 조국독립을 잊지 못하고 서로 개탄 비분하여 “언제나 하늘이 우리를 돌보시어 좋은 운수가 돌아올 것인가?”하고 모든 수치와 고난을 참으면서 기다린 지 이미 10년이 되었다.

 

마침 여러분이 세계평화회의를 파리에서 개최한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 인민은 모두가 용약 분격하여 “이제 만국이 참으로 평화하게 된다면 우리한국도 만국의 하나이니 어찌 우리에게만이 평화가 없겠는가?”하고 또 폴란드 등 모든 나라가 이미 독립되었다는 말을 듣고 다같이 만세를 부르며 “평화회의에서 폴란드의 독립이 결정되었다니 폴란드는 그 누구이며 한국의 공의가 마땅히 이와 같을 것이오. 하늘의 대운이 좋게 돌아올 것이오. 모든 여러분의 사명이 완수될 것이오. 다같이 나라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니 우리가 비록 죽어서 구렁에 뒹군다 하더라도 백골인들 어찌 그 은혜를 잊으리오”하였다.

 

이로써 서로가 기쁨을 금치 못하며 오직 좋은 소식이 있기만을 기다렸더니 하늘도 무심하여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우리 임금이 승하(昇遐)하시니 온 천지는 눈물바다요 끝없는 슬픔과 원통함을 호소할 곳이 없었다.

 

3월 1일 국장일을 당하여 각교(各敎) 각사(各社) 개인 남녀가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으며 우리 임금의 영혼을 위로하였다.

 

이때에 일본 군경으로부터 아무리 심한 매질과 탄압과 총칼이 목전에 닥치어도 맨 손으로 앞을 다투어 서로 죽음을 돌보지 않았으니 이는 대중의 원한과 억울한 충정(衷情)이 오랫만에 쏟아진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여러분 [제대위(諸大位)]으로부터 이러한 기회와 용기를 우리에게 주었다는 것도 우리는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러나 그 후 계속 시일만을 끌고 아무런 획기적 구처가 보이지 않으므로 우리는 또 다시 회의와 공구가 엇갈리어 우리나라 실정이 제대로 전달되기 어려운 것과 또 일본인들의 간계와 조작이 여러분의 이목을 현혹케 한 것이 없는가 하여 다시 그 사실을 변명코자 한다.

 

대체로 하늘이 만물을 나을 때에는 반드시 그 물체의 하나하나에게 활동의 능력을 부여하는 것이다. 비록 작은 인개(鱗介)와 곤충일지라도 모두 그 자유 활동의 능력을 갖고 있으니 사람으로서 사람된 것과 나라로서 나라된 것이 또한 각자의 치리(治理) 능력을 갖고 있는 까닭이다. 우리한국이 비록 작다 하나 3천리 강토와 2천만 인민과 4천년 여의 역사를 지니고 있으니 우리나라에서도 족히 우리나라 일을 담당할 사람이 적지 아니 하거늘 어찌 남의 나라의 대치(代治)를 바라리요.

 

옛말에 천리에는 풀기가 다르고 백리에는 민속이 같지 않다하였다. 비록 일본이 말하기를 “한국이 스스로 독립할 능력이 없기에 일본의 통치로써 한국의 풍속을 변경하려 한다” 하나 풍속이라는 것은 쉽사리 변경되는 것이 아니며 대치(代治)라는 것은 마침내 혼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될 뿐이니 그를 실행치 못할 것이 자명한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일본은 공회에서 말하기를 “한인은 오래전부터 일본에 붙기를 원한다”하나 대체 한민으로서 한민의 주체성을 가지게 된 것은 오직 일정한 지역과 풍속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또한 우리의 고유한 사상과 문화에서 얻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차라리 밖으로 일시적 곤욕과 위협에 굴할지언정 그 정신적 한민이라는 것은 비록 천만년을 지날지라도 면할 수 없는 것이니 어찌 그 민족의 본연성을 무시할 수 있겠는가. 그 민족의 본연성을 무시할 수 없음을 알면서 일본은 온 세계가 부정하는 그들의 권리를 이용하여 도리혀 온 세계의 공통된 공의를 얻었고자 하니 이것은 일본으로서도 잘 하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산야 폐인으로서 국제 사정을 자세히 알지 못하고 다만 이 나라 신자(臣子)로서 부모의 교훈에 의하여 유문(儒門) 에 종사하여 왔더니 이제 대계 유신의 날을 당하여 이 나라의 유무(有無)가 이번 회의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나라가 없이 살기보다는 차라리 나라 있고 죽는 것을 바라며 한구석에서 소리 없이 자고(自枯) 되기보다는 차라리 여러분 앞에서 떳떳이 그 억울한 충정을 폭로하여 모든 사태의 귀추를 기다리는 것만 같으랴?

 

생각컨대 해륙의 길은 너무 멀고 국제간 사찰은 지나치게 심하여 만일 몸소 갈 수도 없고 아우성을 처도 들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 조석으로 어떨지 모를 생명이 중도에서 쓰러지고 만다면 이 세상 이 슬픔은 영원히 호소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아무리 현명한 여러분일지라도 어찌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우리한국의 억울한 실정을 어찌 알아 줄 수 있으리오.

 

이제 한 장의 서신을 여러 동지들의 뜻을 모으고 또 10년 동안 갖은 고통의 실정을 기록하여 천애(天涯) 만리 밖에 호소코자 하니 너무나 처절 박절하여 말할 바를 알지 못하겠다.

 

여러분은 깊이 생각하시고 공의의 권위를 더욱 높이어 큰 광명과 같이 비치지 않는 곳이 없고 큰 운화(運化)와 같이 순행치 않음이 없도록 하시면 이는 우리의 없어진 나라를 회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인류가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오. 여러분의 사명도 완수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못한다면 우리는 차라리 자진하며 죽을지언정 맹세코 일본의 노예는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 2천만 생명만이 홀로 천지의 화육에 관계치 않으며 조창(條暢)의 화기권에서 제외될 수 있겠는가? 제대위(諸大位)는 생각하시라.

 

2. 파리장서에 서명한 명단

곽종석(郭鍾錫)·김복한(金福漢)·고석진(高石鎭)·유필영(柳必永)·이만규(李晩煃)·장석영(張錫英)·노상직(盧相稷)·유호근(柳浩根)·안병찬(安炳瓚)·김동진(金東鎭)·권상문(權相文)·김건영(金建永)·김창우(金昌宇)·신직선(申稷善)·김상무(金商武)·김순영(金順永)·이종기(李鍾夔)·권상익(權相翊)·고제만(高濟萬)·서건수(徐健洙)·곽수빈(郭守斌)·유연박(柳淵博)·하겸진(河謙鎭)·최학길(崔鶴吉)·이경균(李璟均)·이석균(李鉐均)·조현규(趙顯珪)·하봉수(河鳳壽)·이수안(李壽安)·하재화(河載華)·하용제(河龍濟)·박규호(朴圭浩)·우하교(禹夏敎)·김재명(金在明)·변양석(卞穰錫)·고례진(高禮鎭)·이승래(李承來)·윤인하(尹寅夏)·김봉제(金鳳濟)·박종권(朴鍾權)·윤철수(尹哲洙)·김택진(金譯鎭)·권상두(權相斗)·정태진(丁泰鎭)·정재기(鄭在夔))·임한주(林翰周)·배종순(裵鍾淳)·유진옥(柳震玉)·허평(許坪)·박상윤(朴尙允)·김지정(金智貞)·이인광(李寅光)·이학규(李學奎)·안종달(安鍾達)·손상현(孫上鉉)·이이익(李以翊)·유준근(柳濬根)·송홍래(宋鴻來)·송준필(宋浚弼)·성대식(成大湜)·이기향(李基馨)·이덕후(李德厚)·안효진(安孝珍)·강신혁(姜信赫)·전양진(田穰鎭)·이정후(李定厚)·노도용(盧燾容)·김태린(金泰麟)·김정기(金定基)·송철수(宋喆洙)·문용(文鏞)·송호완(宋鎬完)·송호곤(宋鎬坤)·권명섭(權命燮)·이돈호(李墩浩)·박정선(朴正善)·황택성(黃宅性)·이상희(李相羲)·최중식(崔仲軾)·김양모(金瀁模)·권병섭(權昺燮)·권상원(權相元)·고순진(高舜鎭)·김택주(金澤柱)·정규영(鄭奎榮)·송호기(宋鎬基)·이길성(李吉性)·송철수(宋哲秀)·박익희(朴翼熙)·송재낙(宋在洛)·권상도(權相道)·김병식(金秉植)·이능학(李能學)·이현창(李鉉昌)·이수인(李洙仁)·박준(朴埈)·이봉희(李鳳熙)·박은용(朴殷容)·정근(鄭根)·백관형(白觀亨)·전석구(全錫九)·송주헌(宋柱憲)·전석윤(全錫允)·김영식(金榮植)·김양수(金陽洙)·김상진(金相震)·장영구(張永九)·이내수(李來修)·조재학(曺在學)·김영찬(金永贊)·정재호(鄧在浩)·김덕진(金德鎭)·손진창(孫晋昌)·손병규(孫秉奎)·김병식(金炳軾)·이태식(李泰植)·이만성(李萬成)·이계원(李啓源)·이계준(李季埈)·우성동(禹成東)·김학진(金學鎭)·우찬기(禹纘基)·이병회(李柄回)·윤량식(尹亮植)·김용호(金容鎬)·이복래(李福來)·곽걸(郭杰)·우삼하(禹三夏)·우경동(禹涇東)·박순호(朴純鎬)·우승기(禹升基)·조석하(曺錫河)·김동수(金東壽)·박재근(朴在根)·이진춘(李鎭春)·이인규(李麟奎)·이기정(李基定).


장석영(張錫英, 1851년(철종 2) ~ 1926년)

장석영 초상(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자료)

 

일제강점기 칠곡 국채보상회 회장, 제2차유림단운동 영남대표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유학자.

본관은 인동(仁同). 일명 석교(碩敎). 호는 회당(晦堂). 경상북도 칠곡 출신. 1905년 일제가 무력으로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통분하여 일제침략을 규탄하고 을사조약의 파기와 을사오적의 처형을 요청하는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이승희(李承熙)·곽종석(郭鍾錫)과 함께 올렸다.

1907년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 전국에 파급될 때 칠곡지방의 국채보상회 회장으로 추대되어 활동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곽종석·김창숙(金昌淑) 등과 협의하여 파리평화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였으며, 고향에 만세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이기정(李基定)·성대식(成大湜)·송수근(宋壽根) 등 유림과 접촉하여 만세 일정을 계획하였다.

 

이때 유진성(兪鎭成)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측의 만세운동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들과 만나 함께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합의, 4월 2일 성주 장날의 독립만세운동에 적극 참가하였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25년 제2차유림단운동이 있을 때 영남대표로 활동하였다. 저서로는 『회당집』·『요좌기행문(遼左紀行文)』이 있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장석영(張錫英)]

* 아래 자료는 장석영과 관련된 칠곡호국평화기념관 자료입니다.

1910년 장석영 간찰 - 장석영이 경술국치 이후 병으로 합천에서 돌아와 거주지의 수령에게 간찰 형식으로 작성하여 올린 상서이다. 일본 경찰이 장석영에게 은사금을 하사하기 위해 편지를 보내자 이를 받지 않고 돌려 보내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회당집 책판

녹동서당

녹동서당(경북 칠곡군 기산면 각산리)에서 조금 더 가면 성주 세종대왕자태실, 태실문화관, 선석사가 나온다. )

회당 장선생사적비

조한루

참고자료: 월간중앙 - 중앙시사매거진 (joins.com)

칠곡 애국동산에 있는 '회당장석영선생파리장서기적비'

2021년 5월 ...

[출처] 성주 백세각(星州 百世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