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星州) 고산정(高山亭), 백세각(百世閣) 회나무(槐木)

2024. 10. 17. 08:57Wonderful World

 

 

성주(星州) 고산정(高山亭) 백세각(百世閣)

 

입향조(入鄕祖) 야계(倻溪) 송희규(宋希奎 1494~1558 )선생이

 조선조 명종16(1551), 정면 7칸 측면 7칸 맞배지붕 입구()자 집을 지어 1552년에 완공.

  

1980년,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163호로 지정

 

이 건물에는 백세각(百世閣)이란 당호(堂號)와 야계고택(倻溪古宅)이란 현판(懸板) 등

 이율곡(李栗谷), 한석봉(韓石峰), 채번암(蔡樊岩)의 친필이 각각 한 점씩 소장되어 있었으나,

한석봉의 친필은 1970년에 도난당하였다고...

고산정(高山亭) 백세각(百世閣)

~경상북도(慶尙北道) 별고을(星州) 푸른 풀밭(草田) 고산정 (高山亭) ~

 

 

성주군 초전면 고산정 마을은 야성 송씨(冶城 宋氏) 집성촌이다.

고산정은 야성송씨(冶城宋氏) 충숙공파(忠肅公派)의 집성촌(集姓村)으로 유가(儒家)의 법도(法度)와 입향조(入鄕祖) 야계(倻溪) 송희규(宋希奎 1494~1558 )선생의 충효정신(忠孝精神)을 460여 년간 이어온 전통이 살아 숨 쉬는 마을로 행정구역은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이다.

 

음촌(公西 : 음지뜸), 양촌(公東 : 양지뜸), 닭실(酉谷), 금련(金蓮) 4개의 자연부락으로 되어 있고 초전면 소재지에서 서북으로 약 2Km 떨어져 있으며 유곡계(酉谷溪)의 세천(細川)이 마을 앞으로 흐르고 남쪽으로 가야산의 지맥인 별뫼(星山 : 白馬山) 줄기가 뻗어 내려온 성산(城山)이고  동북으로 금오산, 동남으로 멀리 가야산이 바라보이는 곳에 자리 잡은 아늑하고 풍광(風光)이 뛰어난 마을이다.

 

조선 전기의 문신 야계(倻溪) 송희규(宋希奎)가 사헌부 집의(執義)로 있으면서 명종의 외삼촌인 영의정 윤원형(尹元衡)과 이기(李芑)를 탄핵하다가 오히려 역적으로 몰려 전라도 고산현(지금의 전북 완주군 고산) 으로 귀향을 갔었는데, 그곳에서 5년간의 귀향살이를 하고 고향에 돌아와 리명을 고산리라 고쳐 부르고 백세각(百世閣)을 건립한다.  

 

건축 목재에 쇠못을 사용하지 않고 구멍을 뚫어 싸리로 엮었으며 대패질 대신 목재를 자귀만으로 깎아 다듬은 특이한  건축기법으로 유명하다.

 

백세각(百世閣)이란 당호(堂號) 는 백세청풍(百世淸風)”에서 따온 것인데 봉암산(鳳巖山) 아래 종기(宗基)를 정한 야계선생께서  앞으로 자손들이 군자의 맑고 높은 덕()을 오래오래 이어가고 무궁토록 번성하기를 기원했다고 한다.  '야계산옹(倻溪散翁)’이라 스스로 호를 지어 유유자적하면서 다시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백세각(百世閣)이 자리 잡은 음촌 뒤쪽의 봉암산(鳳巖山)은 봉황(鳳凰 머리를 이루고 우측은 난산(卵山)이 자리해서  소위 봉황(鳳凰)이 알을 품고 있는 포란지형(抱卵之形)의 명당이다.

 

야계(倻溪)선생이 백세각(百世閣)을 짓고 세거한 후로 고산정(高山亭)은 후손(後孫)들이 대를 이어 자자손손(子子孫孫동성대촌(同姓大村)의 세거지(世居地)를 이루며 살아온, 이른바 야성송씨(冶城宋氏), 세칭 고산정송씨(高山亭宋氏)의 관향이 되다.

 

*원불교 2대 종법사인 정산(鼎山송규(宋奎, 1900~1962) 종사는 야성송씨로 시조(始祖송맹영(宋孟英)의 29세 손()이며 고산정 입향조 충숙공(忠肅公야계(倻溪송희규(宋希奎)의 14세 손()이다.

 

백세각 항일의적비

 

 이 집은 1919년 3·1운동 이후 당시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우리의 독립을 요청하는 독립청원서를 보낼 것을 모의하고 성주 장날 만세운동을 준비한 곳이다.

 

당시 서울에서는 손병희 외 33인의 민족대표들이 대한독립선언서를 만들어 천하에 포고하고 모두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칠 때 오직 유림(儒林)의 선비들만이 같이 동참하지 못해 뜻있는 선비들이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던 때에  파리에서  약소국가의 독립을 위해 만국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고 성주의 거유(巨儒), 공산(恭山) 송준필(宋浚弼)을 중심으로 종친(宗親)들이 모여 문회(門會)를 열어 독립운동에 문중이 다 함께 참여할 것을 결의하고,

 

성주의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과 더불어 의논하여 거창 다전(茶田)의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성주(星州)의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께 함께 거사할 약속을 승낙받고 통고국내문(通告國內文)을 작성해서 봉강서원(鳳岡書院) 대청마루  감나무 한 장을 빼내 목판을 만들어 수천 매를 인쇄하여 각지에 배포케 했으며,  파리장서 초안을 가지고 10여일 동안 국내 유림인사들을 찾아가 서명을 받아오게 하였으니  파리장서에 서명한 인사가 137인이었다 (巴里長書事件) . 또한 백세각에서 성주 장날 만세운동에 사용할 태극기를 만들어 보관하고 종친들과 공산선생의 문도들로 하여금 만세에 참여할 사람들을 규합하여 선동 지휘하였다.

 

국내에 통고하는 글 (통고국내문,通告國內文) 

 

 "성주 파리장서(星州 巴里長書)   4.2성주 독립만세운동"과 관련이 깊은 사적지이며 독립유공자 공산 송준필과 괴당 송회근이 태어난 집이기도 하다.

 

건물 앞마당에 심은 연대는 정확한 고증이 없어 알 수는 없으나 400여 년이 넘었으리라 추정되는 회화나무 3그루가  이 집의 고색창연(古色蒼然)함을 더 해주는데 이 나무들은 풍수지리(風水地理)에서 봉소포란지형(鳳巢抱卵之形)이 화기(火氣)가 강해서 비보(裨補)로 심었다는 전설이다.

 

“비가 오는 날 자정에는 말발굽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오기 때문에 종손이 아니면 무서워서 잠을 못잔다”는 전설이 있다.  

 

현재 백세각은 공산 송준필 선생 문중의 종손인 송만수씨가 관리하고 있다.

 

송씨는 "1919년 3·1운동 당시 선조인 공산을 대표로 여러 문인들이 2층 다락방에 모여 태극기를 만들어 성주장날에 배부했다"며 "뿐만 아니라 이곳은 파리장서사건을 모의한 역사적인 장소이자 유림의 궐기를 독려하는 '통고국내문'을 제작 배포하는 등 독립운동의 성지"라고 자부한다.

 

백세각(百世閣) 회화나무(槐木)

 

* 회화나무(槐木)

다른 이름으로 ‘학자수(學者樹)’ ,  영어 이름  ‘스칼러 트리(Scholar tree)

국내에서는 통용되는 명칭이 많은데  회화(槐花)나무, 회나무, 홰나무, 괴나무, 괴화(槐花)나무라고 한다.

충청도에서는 호야나무라고 일컫기도 한다. 

 

* 이상은 세칭 '고산정 송씨' 유래와  '역사속의 백세각' 흔적을 개략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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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세각(百世閣) 사진속에는 유서 깊은 '회나무'가  깊은 역사를  웅변하듯 고색 창연한 웅장한 자태를~~~ 

 

이곳 '경북지역방'에서도  한동안 활동하신 '회나무'님은

현재 백세각을 관리하는 사람으로  '고산정 송씨 종손'인 바 

그 분의 닉네임이  '회나무'인  사연  또한  상서로운 소이연이 없지 아니할 것이라 여긴답니다.

 

회나무님과  저 별고을(종전 닉네임 '좋아요')은 본 카페에서  조우하여 다년간

별고을(星州) 푸른 풀밭(草田),  동향  향우로서  도리(道理)와 정리(情理)를 소중히 한 바 있답니다.  

 

~영남의 석화성( 嶺南의 石火星), 성주 가야산(星州 伽倻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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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소개하는 글은  

회나무님(본명 송ㅁ수)께서

2018년 01월 05일 본 카페   끝말 잇기 아름방 에  게재하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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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6일  경북의 텃밭 농심, 벼리님께서  친히 '수수찰떡이 쫄깃쫄깃하다나 달작지근하다나' 어쨌다나 하신 탓,

불현듯 생각키운  '수수밭  굴비 사연'  예 있다 하였슨즉...ㅎ

 

~ 아래~

 

 

음담패설~~~(설)

회나무 추천 1 조회 107 18.01.05 21:24 댓글 8

 

이 시(詩)는
오 탁번 씨의 시집 “겨울 강”에 수록된

“굴비”란 제목의 시(詩)다.


굴비 /오탁번


수수밭 김매던 계집이 솔개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마침 굴비 장사가 지나갔다.
굴비사려, 굴비! 아주머니, 굴비사요.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메기수염을 한 굴비 장수는
뙤약볕 들녘을 휘 둘러 보았다.
그거 한번 하면 한 마리 주겠소.
가난한 계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품 팔러 간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올랐다.
웬 굴비여?
계집은 수수밭 고랑에서 굴비 잡은 이야기를 했다.
사내는 굴비를 맛있게 먹고 나서 말했다.
앞으로는 절대 하지 마!
수수밭 이랑에는 수수이삭 아직 패지도 않았지만
소쩍새가 목이 쉬는 새벽녘 까지
사내와 계집은
풍년(豊年)을 기원하며 수수방아를 찧었다


며칠 후 굴비 장수가 다시 마을에 나타났다
그날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또 올랐다.
또 웬 굴비여!
계집이 굴비를 발라 주며 말했다.
앞으로는 안했어요.
사내는 계집을 끌어 않고 목이 메었다
개똥벌레들이 밤새도록
사랑의 등 깜박이며 날아다니고
베짱이들도 밤이슬 마시며 노래 불렀다.


이 이야기는 허구(虛構)이고, 웃고 즐기자고 누군가가 만들어 낸 어른들의 우스개 소리일 뿐이다.
그러나 이런 음담(淫談)에도 삶의 진실은 있는 것이다.

그런 진실 앞에 어슬프게 정조(貞操)나 순결(純潔) 을 들이대며 힐난(詰難)만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웃다가 결국은 울고 마는 이야기, 그런 상식을 초월(超越)해 버리는 역설(逆說)은
이 시인(詩人)의 특유(特有)한 장기(長技)라고 할 수 있겠다.

 

짖궂은 ~  어느 시인이

맛나는 굴비로 시 한 수 짓노라고 ㅎ 말장난을...

 

 수수밭 고랑에서 굴비 잡은 이야기를 하다가 ㅎ~

"- 앞으로는 안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