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0. 17. 09:10ㆍHistory & Human Geography
성주 파리장서(星州 巴里長書)사건과 4.2독립만세운동
성주 백세각은 1551년(명종 6년) 상주목사와 대구부사를 역임한 송희규 선생이 건립한 건물로, 일제강점기 유림들이 모여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을 청원하기로 결의한 곳이다.
1919년 4월 2일(성주장날) 일어난 성주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한 곳이기도 하다. 송준필을 비롯한 야성 송씨 문중의 청년들이 격문(국내통고문)을 짓고, 마루판자에서 격문을 새겨 3,000장을 찍고, 태극기를 만들어 벽장에 감추어 둔 곳이다.
백세각항일의적비는 송준필, 송홍래, 송회근, 송규선, 송훈익, 송천흠, 송우선, 송문근, 송인집, 송수근, 송명근 등 11명의 애국지사를 기리기 위해 2004년 건립됐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성주의 학생과 학부모들은 2019년 3월 1일 12시,백세각에 모여 상황극, 태극기 그리기, 나의 독립청원서 쓰기, 소원서 만들기, 국내통고문 탁본하기를 진행하며, 항일의적비 앞에서는 <독립군가>에 맞춰 플래시몹 공연을 하고 이어 독립만세를 불렀다.
성주는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기 위한 유림들의 사전 논의장소인 백세각이 있고,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 선생이 독립청원서를 짚신으로 역어서 상해 임시정부로 가져갔으며, 파리장서에 서명한 유림 137명 중에서 가장 많은 16명이 참여한 지역이기도 하다.
▲ 성주군사진(드론으로 촬영한 백세각)
뿐만 아니라 1919년 4월 2일 성주 장날에는 유림들과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성주 군민 3,000여명이 모인 대규모 만세운동을 펼쳤었다.
일본 경찰의 발포로 2명이 그 자리에서 숨지고 20여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46명이 투옥되어 모진 고문으로 숨진 독립운동가도 다수다. 성주는 독립운동으로 추서된 독립유공자만 85명으로 독립운동의 고장이다.
[출처] 성주군, 파리장서 4.2독립만세운동 100주년기념사업|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 음지뜸 마을에
성주의 자랑스러운 독립운동의 유산으로,
성주의 독립운동 근거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63호 #백세각(百世閣)이 있다.
#성주백세각
1551년(조선 명종 6년) 상주목사와 대구부사를 역임한 송희규 선생이 건립한 건물로
(출처-(사)우리문화유산알림이)
조선 전기에 세워진 생활유적 문화재로도 중요하지만
일제강점기 유림(儒林)들이 모여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을 청원하기로 결의한 곳으로
성주의 독립운동의 근거지로도 매우 의미가 큰 고택이다.
1919년 4월 2일 성주 장날 일어난 #성주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한 곳이기도 하다.
송준필을 비롯한 야성 송 씨 문중의 청년들이 통고국내문을 짓고,
마루 판자에 #통고국내문 을 새겨 3,000장을 찍고,
#태극기 를 만들어 벽장에 감추어 둔 곳으로 역사적 의미가 깊은 곳이다.
(출처- (사)우리문화유산알림이)
[출처] [문화] "파리장서를 품은 백세각" 독립운동 사적지 탐방 |
백세각 (百世閣)
~경상북도 유형문화제 제163호~
3.1운동이 일어나자 김창숙을 비롯한 유림 대표는
파리 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제1차 유림단의거(파리장서운동)를 추진하였다.
성주군 초전면 고산마을의 야성송씨 문중도 적극 참여 하였는데 이에 앞장선 사람이 송준필이였으며
그는 백세각에서 문중회의를 열어 시국 상황을 논의 하였다고 한다.
이어 김창숙을 만나 파리장서 계획을 협의하고 성주지역 서명자 규합에 나섰다.
또한 통고국내문을 작성하여 유림의 궐기를 독려하였고
4월2일 성주읍내의 만세운동을 일으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경북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 542
경북유형문화재 제163호
솟을 대문이 있는 백세각 입구.
.
백세각 현판
1997년 마룻대를 올리는 (아마도 복원)상량식을...
야계 송희규가 건립한 백세각
그는 당시 세도가인 윤원형의 행패를 탄핵하다가 오히려 전라도 고산으로 유배되었는데
그곳에서 5년동안 유배생활을 한 뒤 고향으로 되돌아와 마을 이름을 고산리로 바꾸고
조선 명종 6년(1551)에 기공하여 그 이듬해 완공한 가옥이라고 전해진다.
전체적인 건물은 □ 자형으로 지어져
사랑채는 정면 7칸, 측면 7칸인 맞배지붕 건물로 지어져 있다.
건물은 쇠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구멍을 뚫어 싸리로 얽은점이 특이하다.
ㅁ 자형 가옥의 모습.
건물은 쇠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구멍을 뚫어 사리로 얽은점
대패질을 하지 않고 자귀만으로 깎고 다듬어 만든 건축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1919년 3.1운동 당시 문인들이 성주 장날에 배포한
#독립청원장서 3,000장을 이곳에서 복사했다고 전해지며,
경북 유림단이 파리장서 운동의 모의 장소로 사용되어 3.1독립 운동과 관련이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출처] [소식] 만세함성 백세각 (2021 성주군 고택·종갓집 활용사업)
백세각 항일의적비 (百世閣 抗日義蹟碑)
백세각(百世閣)에서 주도한 '파리장서 서명운동과 4·2 성주 장날 만세운동'에 관련되어 그 공훈을 기리어 정부로부터 서훈(敍勳)을 받은 문중(門中)의 공산(恭山) 송준필(宋浚弼), 회천(晦川) 송홍래(宋鴻來), 괴당(槐堂) 송회근(宋晦根), 자광(自光) 송규선(宋圭善), 송훈익(宋勳翼), 송천흠(宋千欽), 세한재(歲寒齋) 송우선(宋祐善), 송문근(宋文根), 해여(海旅) 송인집(宋寅輯), 은포(隱圃) 송수근(宋壽根), 송명근(宋命根) 등 11인을 추모(追慕)하고 애국정신 고취를 위한 교육장으로 조성하기 위하여 2004년 국비(國費)와 군비(郡費)의 지원을 받고 11인의 후손(後孫)들의 성금을 모아 11인의 공적과 애국정신을 기리는 '백세각항일의적비'를 건립(建立)하였다(2004년 10월) .
2012년 11월 현충시설로 지정 받아 후세들의 산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1919년 3.1운동 이후 백세각에서 공산 송준필을 중심으로 비밀리에 문중회의를 열고
문중단위로 독립운동을 전개 할 것을 결의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4.2성주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선봉에 서서 군중들의 궐기와 만세를 독려하고 독립을 외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희생된
독립유공자 11인의 공적과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기 위해 백세각 입구에 항일의적비를 세웠다.
국내에 통고하는 글 (통고국내문,通告國內文)
국내에 통고하는 글(통고국내문 ,通告國內文 )
'아!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렸으니 나라가 회복되면 죽어도 오히려 사는 것이요, 나라가 회복되지 못하면 살아도 또한 죽은 것이다. 이 날이 무슨 날인가. 서울을 비롯하여 밖으로 이름 있는 도시와 큰 항구 및 깊은 산골 외진 마을에 이르기까지 혈기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환호하고 춤추며 한 마음으로 함께 외치지 않는 자가 없으니, 하늘의 뜻이 화를 내린 것을 뉘우치고 사람들의 마음이 단결되었음을 이미 알 수 있도다.
아! 우리가 입을 다물고 혀를 깨물며 분노의 눈물을 흘리고 소리 없이 통곡한 지가 지금 십년이 되었도다. 이제 천 년에 한번 있는 기회를 만나 만방의 여론이 스스로 공평하여 나라가 회복할 가망이 있는데도 우리가 어떤 사람이기에 문을 닫고 앉아만 있을 수 있겠는가.
이에 우리는 울분을 이기지 못하여 글을 띄워 우러러 고하노니, 이것은 실로 온 나라가 같은 심정일 것이며, 여러 군자들의 생각 또한 마음속에서 빛날 것이다. 원컨대 지금부터 군에서 향으로 향에서 동에 이르기까지 각각 독립의 깃발을 세워, 종노릇 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뜻을 밝히자. 그리고 다시 만국회의에 글을 보내어 우리의 실정과 소원을 알게 함으로써 공평한 여론이 널리 펼쳐지게 한다면 천만다행이리라.'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보내기 위해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서한을 작성한 사건.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자 유림측에서도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는 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장문의 서한을 작성하였다. 이 사건은 전에 의병을 일으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던 호서지방의 유종(儒宗)인 전 승지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대부분 의병에 참여하였던 김덕진(金德鎭)·안병찬(安炳瓚)·김봉제(金鳳濟)·임한주(林翰周)·전양진(田穰鎭)·최중식(崔中軾, 혹은 崔中式) 등에 의해 이뤄졌다.
그들이 작성한 서한은 현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요지는 일본의 배신행위와 명성황후(明成皇后)와 고종의 시해, 그리고 한국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고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호서지방 유림들의 활동이 전개되고 있을 때, 영남유림에서도 곽종석(郭鍾錫)·김창숙(金昌淑) 등이 필두로 같은 목적의 일이 추진되고 있었다. 그 뒤 영남유림은 이런 사실을 알고 영남본(嶺南本)을 전용학(田溶學)에게 주며 홍성으로 가서 호서본(湖西本)과 비교, 검토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교정본이 작성되기 전에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선정된 김창숙이 시급히 상해(上海)로 출발하게 되었다. 이에 서울유림들은 영남본이나 호서본의 내용이 서로 뜻이 같으나, 영남본이 호서본보다 포괄적이면서도 뜻이 명확하다는 여론에 따라 김창숙에게 영남본을 주어 출발시켰다. 그리고 장서 말미에 134명 유림대표가 서명하였으며, 대표파견 경비는 황일성(黃佾性)이 조달하였다.
그러나 장서는 김창숙이 파리로 가져가지 못하고, 당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 대표로 선정되어 파리에 가 있던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되었으며, 또한 국내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그런데 같은 해 4월 12일 경상북도 성주의 만세시위운동에 관련되어 일본경찰에 붙잡혔던 송회근(宋晦根)에 의해 사건이 발각됨으로써 관계자들이 피체되어 옥고를 겪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
파리장서와 서명자 명단
(공훈전자사료관 (mpva.go.kr)에서 인용하였습니다.)
1. 파리장서
한국유림대표 곽종석·김복한 등 137인은 삼가 파리평화회의 제대위 각하에게 봉서하노라 하늘 및 땅 위 모든 만물이 함께 생성발육하고 있으니 이는 큰 광명의 비침과 큰 대화(大化)의 행함으로써 그 진리를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생활의 혼단(混端)이 일어남으로써 강약의 세가 나뉘고 겸병(兼幷)의 권력이 움직임으로써 대소의 형세가 달라져 마침내 남의 생명을 해쳐가며 그 위력을 자행하고 남의 나라를 도절하여 제것으로 만드니 아-천하에는 어찌 이런 일들이 그다지도 많은고? 이것은 하늘이 위대한 여러분을 보내시어 하늘의 뜻을 받들어 큰 영광을 비치고 크게 대화를 행하여 온 천하를 한결 같이 대동의 세계로 돌아가게 하고 만물로 하여금 각기 그 자유를 누리게 함으로써 만국을 통일시하고 나해를 평등화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의 1이라도 지구상에서 이러한 소식을 듣고 실제의 혜택을 얻지 못하거나 또는 원통한 충정을 품고도 공의에 호소할 기회를 갖지 못한다면 이 어찌 모든 여러분 사명이 오직 여기에만 다할 수 있겠는가?
지금 우리가 피를 끓으며 모든 억울한 실정을 호소하는 것도 또한 참을 수 없는 박절한 심정을 토로하는 것이니 모든 여러분은 자세히 살피시라.
오! 한국도 천하 만방의 하나로서 지역이 3천리요 인민이 2천 만이오 또한 4천년 여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반도 문명국임은 온 세계가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국운이 불행하여 강인(强隣)의 외제(外制)로서 모든 조약이 강제로 체결 되었을 뿐 아니라 마침내는 국토를 빼앗고 왕위를 폐하여 우리한국을 이 세계 열방에서 제외하였으니 일본의 이 같은 행위를 대략 열거코자 한다.
병자년(서기 1876년) 우리나라 대신과의 강화조약이나 을미년(서기 1895년) 청국대신과의 마관 조약에서 한결같이 “한국의 자주독립에 대한 조약을 영구히 준수하다”하였고 또 계묘년(서기 1903년) 러시아에 선전할 때에도 “한국의 독립을 공고히 한다”는 것을 분명히 세계에 성명하였으니 이는 세계가 주지하는 사실이다.
그러고도 미구한 시일에 그들로 부터 온갖 사기와 조작이 연출되어 내정의 협박과 외교의 기만으로 독립이 보호로 변하고 보호가 합병으로 변하게 한 다음 극소수의 친일분자를 사주하여 “이것이 곧 한국민의 소원이라” 가장하고 세계의 공의를 도면(圖免)하려 하니 이것은 곧 한국만을 그들이 무시하였을 뿐 아니라 기실은 만방도 그들의 심중에 두지 않았던 것이다.
만국대표 여러분! 일본의 우리한국에 대한 이러한 행위가 과연 세계 공의에 위배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또한 일본이 세계만방에 그 신의를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우리한국 인민이 비록 적수공권으로 스스로 분기치 못할 것도 알고 있었으나 자나 깨나 이 나라 이 백성은 조국독립을 잊지 못하고 서로 개탄 비분하여 “언제나 하늘이 우리를 돌보시어 좋은 운수가 돌아올 것인가?”하고 모든 수치와 고난을 참으면서 기다린 지 이미 10년이 되었다.
마침 여러분이 세계평화회의를 파리에서 개최한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 인민은 모두가 용약 분격하여 “이제 만국이 참으로 평화하게 된다면 우리한국도 만국의 하나이니 어찌 우리에게만이 평화가 없겠는가?”하고 또 폴란드 등 모든 나라가 이미 독립되었다는 말을 듣고 다같이 만세를 부르며 “평화회의에서 폴란드의 독립이 결정되었다니 폴란드는 그 누구이며 한국의 공의가 마땅히 이와 같을 것이오. 하늘의 대운이 좋게 돌아올 것이오. 모든 여러분의 사명이 완수될 것이오. 다같이 나라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니 우리가 비록 죽어서 구렁에 뒹군다 하더라도 백골인들 어찌 그 은혜를 잊으리오”하였다.
이로써 서로가 기쁨을 금치 못하며 오직 좋은 소식이 있기만을 기다렸더니 하늘도 무심하여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우리 임금이 승하(昇遐)하시니 온 천지는 눈물바다요 끝없는 슬픔과 원통함을 호소할 곳이 없었다.
3월 1일 국장일을 당하여 각교(各敎) 각사(各社) 개인 남녀가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으며 우리 임금의 영혼을 위로하였다.
이때에 일본 군경으로부터 아무리 심한 매질과 탄압과 총칼이 목전에 닥치어도 맨 손으로 앞을 다투어 서로 죽음을 돌보지 않았으니 이는 대중의 원한과 억울한 충정(衷情)이 오랫만에 쏟아진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여러분 [제대위(諸大位)]으로부터 이러한 기회와 용기를 우리에게 주었다는 것도 우리는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러나 그 후 계속 시일만을 끌고 아무런 획기적 구처가 보이지 않으므로 우리는 또 다시 회의와 공구가 엇갈리어 우리나라 실정이 제대로 전달되기 어려운 것과 또 일본인들의 간계와 조작이 여러분의 이목을 현혹케 한 것이 없는가 하여 다시 그 사실을 변명코자 한다.
대체로 하늘이 만물을 나을 때에는 반드시 그 물체의 하나하나에게 활동의 능력을 부여하는 것이다. 비록 작은 인개(鱗介)와 곤충일지라도 모두 그 자유 활동의 능력을 갖고 있으니 사람으로서 사람된 것과 나라로서 나라된 것이 또한 각자의 치리(治理) 능력을 갖고 있는 까닭이다. 우리한국이 비록 작다 하나 3천리 강토와 2천만 인민과 4천년 여의 역사를 지니고 있으니 우리나라에서도 족히 우리나라 일을 담당할 사람이 적지 아니 하거늘 어찌 남의 나라의 대치(代治)를 바라리요.
옛말에 천리에는 풀기가 다르고 백리에는 민속이 같지 않다하였다. 비록 일본이 말하기를 “한국이 스스로 독립할 능력이 없기에 일본의 통치로써 한국의 풍속을 변경하려 한다” 하나 풍속이라는 것은 쉽사리 변경되는 것이 아니며 대치(代治)라는 것은 마침내 혼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될 뿐이니 그를 실행치 못할 것이 자명한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일본은 공회에서 말하기를 “한인은 오래전부터 일본에 붙기를 원한다”하나 대체 한민으로서 한민의 주체성을 가지게 된 것은 오직 일정한 지역과 풍속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또한 우리의 고유한 사상과 문화에서 얻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차라리 밖으로 일시적 곤욕과 위협에 굴할지언정 그 정신적 한민이라는 것은 비록 천만년을 지날지라도 면할 수 없는 것이니 어찌 그 민족의 본연성을 무시할 수 있겠는가. 그 민족의 본연성을 무시할 수 없음을 알면서 일본은 온 세계가 부정하는 그들의 권리를 이용하여 도리혀 온 세계의 공통된 공의를 얻었고자 하니 이것은 일본으로서도 잘 하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산야 폐인으로서 국제 사정을 자세히 알지 못하고 다만 이 나라 신자(臣子)로서 부모의 교훈에 의하여 유문(儒門) 에 종사하여 왔더니 이제 대계 유신의 날을 당하여 이 나라의 유무(有無)가 이번 회의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나라가 없이 살기보다는 차라리 나라 있고 죽는 것을 바라며 한구석에서 소리 없이 자고(自枯) 되기보다는 차라리 여러분 앞에서 떳떳이 그 억울한 충정을 폭로하여 모든 사태의 귀추를 기다리는 것만 같으랴?
생각컨대 해륙의 길은 너무 멀고 국제간 사찰은 지나치게 심하여 만일 몸소 갈 수도 없고 아우성을 처도 들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 조석으로 어떨지 모를 생명이 중도에서 쓰러지고 만다면 이 세상 이 슬픔은 영원히 호소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아무리 현명한 여러분일지라도 어찌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우리한국의 억울한 실정을 어찌 알아 줄 수 있으리오.
이제 한 장의 서신을 여러 동지들의 뜻을 모으고 또 10년 동안 갖은 고통의 실정을 기록하여 천애(天涯) 만리 밖에 호소코자 하니 너무나 처절 박절하여 말할 바를 알지 못하겠다.
여러분은 깊이 생각하시고 공의의 권위를 더욱 높이어 큰 광명과 같이 비치지 않는 곳이 없고 큰 운화(運化)와 같이 순행치 않음이 없도록 하시면 이는 우리의 없어진 나라를 회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인류가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오. 여러분의 사명도 완수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못한다면 우리는 차라리 자진하며 죽을지언정 맹세코 일본의 노예는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 2천만 생명만이 홀로 천지의 화육에 관계치 않으며 조창(條暢)의 화기권에서 제외될 수 있겠는가? 제대위(諸大位)는 생각하시라.
2. 파리장서에 서명한 명단
곽종석(郭鍾錫)·김복한(金福漢)·고석진(高石鎭)·유필영(柳必永)·이만규(李晩煃)·장석영(張錫英)·노상직(盧相稷)·유호근(柳浩根)·안병찬(安炳瓚)·김동진(金東鎭)·권상문(權相文)·김건영(金建永)·김창우(金昌宇)·신직선(申稷善)·김상무(金商武)·김순영(金順永)·이종기(李鍾夔)·권상익(權相翊)·고제만(高濟萬)·서건수(徐健洙)·곽수빈(郭守斌)·유연박(柳淵博)·하겸진(河謙鎭)·최학길(崔鶴吉)·이경균(李璟均)·이석균(李鉐均)·조현규(趙顯珪)·하봉수(河鳳壽)·이수안(李壽安)·하재화(河載華)·하용제(河龍濟)·박규호(朴圭浩)·우하교(禹夏敎)·김재명(金在明)·변양석(卞穰錫)·고례진(高禮鎭)·이승래(李承來)·윤인하(尹寅夏)·김봉제(金鳳濟)·박종권(朴鍾權)·윤철수(尹哲洙)·김택진(金譯鎭)·권상두(權相斗)·정태진(丁泰鎭)·정재기(鄭在夔))·임한주(林翰周)·배종순(裵鍾淳)·유진옥(柳震玉)·허평(許坪)·박상윤(朴尙允)·김지정(金智貞)·이인광(李寅光)·이학규(李學奎)·안종달(安鍾達)·손상현(孫上鉉)·이이익(李以翊)·유준근(柳濬根)·송홍래(宋鴻來)·송준필(宋浚弼)·성대식(成大湜)·이기향(李基馨)·이덕후(李德厚)·안효진(安孝珍)·강신혁(姜信赫)·전양진(田穰鎭)·이정후(李定厚)·노도용(盧燾容)·김태린(金泰麟)·김정기(金定基)·송철수(宋喆洙)·문용(文鏞)·송호완(宋鎬完)·송호곤(宋鎬坤)·권명섭(權命燮)·이돈호(李墩浩)·박정선(朴正善)·황택성(黃宅性)·이상희(李相羲)·최중식(崔仲軾)·김양모(金瀁模)·권병섭(權昺燮)·권상원(權相元)·고순진(高舜鎭)·김택주(金澤柱)·정규영(鄭奎榮)·송호기(宋鎬基)·이길성(李吉性)·송철수(宋哲秀)·박익희(朴翼熙)·송재낙(宋在洛)·권상도(權相道)·김병식(金秉植)·이능학(李能學)·이현창(李鉉昌)·이수인(李洙仁)·박준(朴埈)·이봉희(李鳳熙)·박은용(朴殷容)·정근(鄭根)·백관형(白觀亨)·전석구(全錫九)·송주헌(宋柱憲)·전석윤(全錫允)·김영식(金榮植)·김양수(金陽洙)·김상진(金相震)·장영구(張永九)·이내수(李來修)·조재학(曺在學)·김영찬(金永贊)·정재호(鄧在浩)·김덕진(金德鎭)·손진창(孫晋昌)·손병규(孫秉奎)·김병식(金炳軾)·이태식(李泰植)·이만성(李萬成)·이계원(李啓源)·이계준(李季埈)·우성동(禹成東)·김학진(金學鎭)·우찬기(禹纘基)·이병회(李柄回)·윤량식(尹亮植)·김용호(金容鎬)·이복래(李福來)·곽걸(郭杰)·우삼하(禹三夏)·우경동(禹涇東)·박순호(朴純鎬)·우승기(禹升基)·조석하(曺錫河)·김동수(金東壽)·박재근(朴在根)·이진춘(李鎭春)·이인규(李麟奎)·이기정(李基定).
파리 장서 사건[巴里長書事件],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한 독립청원서 1919.3
주요내용
1. 한국은 삼천리강토와 2,000만 인구와 4,000년 역사를 지닌 문명의 나라이며 우리 자신의 정치원리와 능력이 있으므로 일본의 간섭은 배제되어야 한다.
2. 일본은 지난날 한국의 자주독립을 약속했지만 사기와 포악한 수법으로 독립이 보호로 변하고 보호가 병합으로 변하게 했고, 교활한 술책으로 한국사람이 일본에 붙어살기를 원한다는 허위선전을 하고 있다.
3. 일본의 포악무도한 통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한국인들은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으며, 만국평화회의와 폴란드 등의 독립소식을 듣고 희망에 부풀어서 만국평화회의가 죽음으로 투쟁하는 우리 2,000만의 처지를 통찰해 줄것으로 믿는다.
파리 장서사건 혹은 유림 독립선언, 제1차 유림단사건은 1919년 김창숙을 중심으로 한 유림의 인사들이 파리 평화회의에 독립탄원서를 보내다가 발각된 사건이다.
3·1 운동 이후 유림의 인사들은 유림이 독립선언에 참여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이를 대신하여 파리장서에 서명을 하였다.
한국의 유림대표 곽종석·김복한 등 137명이 김창숙의 연락으로 독립탄원서를 작성, 김창숙이 이 탄원서를 가지고 상하이에 가서 파리평화회의에 우송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발각되어 곽종석 이하 대다수가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일부는 망명하였다.
곽종석·하용제·김복한 등은 감옥에서 순국하였고, 그 밖의 사람들도 형에 못 이겨 죽고 또 처형되었다.
밀양의 영남루 인근, 정읍의 정읍사공원, 서울의 장충단공원,거창의 침류정에 파리장서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출처] 파리 장서 사건[巴里長書事件], 1919년|
'History & Human Geography'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논산 수락산(首落山) 가장골, 백제 계백장군 묘 (0) | 2024.10.26 |
---|---|
몰래 태극기를 만들어 만세운동을 펼치다[성주 백세각] (2) | 2024.10.17 |
광주시 양림동 정율성거리 및 기독교 유적지 (2) | 2024.10.05 |
“하나의 중국? 대만은 단 한시간도 中과 같은 나라였던 적이 없다” (6) | 2024.10.05 |
京都国際高校 #甲子園 優勝 #第106回全国高校野球選手権大会 (10) | 2024.08.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