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7. 05:04ㆍJapanese Arts
私の歌の道・・・都はるみ~
2017.
https://www.youtube.com/watch?v=j-M9EmYmUKY
「アンコ椿は恋の花」 「涙の連絡船」 「好きになった人」 「北の宿から」 「大阪しぐれ」 「浪花恋しぐれ」
일본 하늘에 뜬 성주의 별(星州の 星)
일본 여성 엔카가수(演歌 歌手) 쌍두마차를 든다면
*미조라 히바리( 美空ひばり,1937년 5월 29일 ~ 1989년 6월 24일)와
*미야코 하루미( 都はるみ, 1948년 2월 22일 ~ )를 들 것이다.
일본 여성 엔카의 톱스타 미야코 하루미(都はるみ)는 실상 성주이씨 (星州 李氏) 춘미(春美)다.
일본의 한국계 엔카 가수 미야코 하루미(都はるみ, 1948년 2월 22일 ~ )의 아버지 이종택(李鐘澤 1904~ 1987)의 일본 이름은 마츠다 세이지(松田 正次).
성주이씨 李鐘澤은 1904년 경상북도 성주태생으로 1940년 일본 교토의 비단 명산지인 니시진(西陣) 으로 이주하여 직물기술자가 되었다. 당시 그가 운영하던 직물공장에 너무나 성실한 여공으로 일하던 마츠시로(松代 1919~2005)와 결혼하여 얻은 딸이 '미야코 하루미 (都はるみ)'다. 한국명 이춘미(李春美).
‘미야코 하루미’의 어머니 ‘마츠시로 (松代)’는 어머니 ‘타미’(タミ)와 아버지 ‘나카타니 도미타로’(中谷 冨太郎)사이에 1919년 교토(京都)에서 태어나 ‘이시카와현’(石川県) ‘코마츠시’(小松市) 로 이사하였습니다. 그녀가 네 살 때 부모가 이혼한 후 어머니 ‘타미’(タミ)는 ‘기타무라 조사부로’(北村 助三郎)와 재혼하여 마츠시로는 교토로 돌아와 자랐다.
이종택(李鐘澤 1904~ 1987)과 마츠시로(松代 1919~2005)의 딸,
李春美(都はるみ)는 1948년 일본 교토부 교토에서 태어났다.
본명; 기타무라 하루미(北村春美).
일본의 저널리스트 아리타 요시후(有田芳生)는 자신의 저서 ‘노래쟁이 미야코 하루미 (歌屋 都はるみ) '에서, 그녀의 아버지는 재일 한국인이며, 그녀의 한국 이름은 이춘미(李春美)라고 적고 있다.
北村春美の名で京都市立乾隆小学校へ通い、京都市立嘉楽中学校の卒業証書を手にした際はじめて自身の本名が李春美であることを知る。
키타무라 하루미의 이름으로 교토시립 켄류 소학교(Kyōto shiritsu Kenryū shōgakkō)에 다녔고, 교토시립 카라쿠중학교(Kyōto shiritsu Karakuchūgakkō)의 졸업증서를 받았을 때 처음으로 자신의 본명이 이춘미임을 안다.
예능을 좋아한 모친은 하루미의 나이 다섯살 때부터 일본 무용과 발레를 배우게 했다. 李春美는 교토시에 있는 라쿠요 종합 고등학교(洛陽総合高等学校)를 다니다가 가수가 되고싶다는 이유로 중퇴하였다.
1964年、 15세에 第14回 콜롬비아 全国歌謡 콩쿠르 優勝 .
1964年、 16세에《곤란해요 (困ることヨ)》로 데뷔하였으며,
같은 해 발표한 《앙코동백은 사랑의 꽃(アンコ椿は恋の花)》이 일본열도를 뒤흔들면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1965年、발표한 ‘눈물의 연락선(涙の連絡船)'이 155만 장의 앨범판매를 기록하는 폭발적인 인기를 가져오면서 그해 연말 일본 가수의 꿈에 무대인 제16회 NHK 홍백가합전에 출장하게 된다.
이후 1984년 『第35回NHK紅白歌合戦』까지 20년 연속 홍백가합전 출장한 후 총 29회 출장이라는 대기록을 보유한 인기 정상의 가수가 되었다.
1973년 선 뮤직 프로덕션으로 이적한 ‘미야코 하루미’는 1976년 그동안 불러온 전통적인 엔카와 다른 감성적인 가요 ‘북쪽의 집에서’(北の 宿から)를 발표하여 앨범판매 143만 장이라는 큰 흥행을 가져온다. 이 노래는 12월 엄동의 겨울에 발표되어 추운 겨울 연인을 향한 애틋한 여심을 발라더한 대중가요로 노래하여 대 히트를 기록하면서 ‘미야코 하루미’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었던 노래이다. 1976년 이와 같은 대 히트곡 ‘북쪽의 집에서’로 제18회 일본 레코드 대상을 받게 된다.
1969년 11월 ‘주간 평범’이라는 잡지에 ‘미야코 하루미’의 어머니 ‘마츠시로’가 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하여 ‘내가 조선인과 결혼하였기 때문에 딸 ‘하루미’가 어린 시절부터 극심한 차별과 멸시를 받아왔다.’면서 ‘이러한 세상을 보면서 딸을 인기 가수로 키워내고 싶었다.’ 라며 ‘미야코 하루미’가 재일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밝혔던 것이다. 당시 ‘하루미’ 어머니는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딸 ‘하루미’가 재일 한국인임을 주변에서 모두 알고 있는 사실에 비추어 감추고 숨기는 것보다는 사실대로 밝히는 것이 인기인의 도리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사의 파문은 너무나 컸다. 당시 ‘주간 평범’ 잡지는 1959년에 창간된 잡지로 1960년에 100만 부가 팔려나가는 인기 잡지였다. 이에 음반회사는 물론 기획사와 언론에 이르기까지 재일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거론한 내용에 대하여 가수의 생명이 끝이 날 수 있다는 분위기가 팽배하였던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일본 전역에서 재일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공개한 것에 대하여 이를 비난하는 편지들이 쏟아져 ‘미야코 하루미’ 어머니는 물론 가수 ‘하루미’ 본인도 이후 일체의 취재를 거부하며 함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사실이 1976년 히트곡 ‘북쪽의 집에서’로 제18회 일본 레코드 대상을 받게 될 당시 극심한 논란을 가져왔던 것이다. 이는 1976년 12월 9일 일본의 대표적인 신문 중 하나인 ‘산케이신문’(産業経済新聞)에서 발행하는 ‘주간 산케이’에 ‘하루미의 아버지는 일본인이 아니다.’ ‘이러한 하루미에게 일본의 대표적인 상을 줄 수 없다.’라는 기사가 실리면서 이에 동조하는 여론이 들끓었던 것이다.
‘미야코 하루미’는 우여곡절 끝에 레코드 대상을 받았지만 ‘이즈오섬’(伊豆大島)을 소재로 만든 ‘아가씨 동백꽃은 사랑의 꽃’을 부를 때마다 환호하던 함성과 ‘눈물의 연락선’과 ‘북쪽의 집에서’를 부를 때 함께 울던 눈물이 재일 한국인이라는 한마디의 말에 차가운 냉소로 돌아서는 비정함을 바라보며 가수 생활을 그만두려 하였다.
재일 한국인 문제로 언론의 뭇매를 맞으면서 많은 충격을 받고 은퇴를 고심하던 그 때 미야코 하루미에게 다가온 가수가 있었다. 그가 바로 일본의 국민가수 미소라 히바리였다. 당시 여러 기록에 의하면, 하루미에게 히바리가 전했던 말은 (여러 이야기가 쓰였네) (하지만 열심히 노래해)라는 말에 이어 (나도 싫은 일이 많았다.) (기죽지 마)라며 깊은 관심을 가지고 격려하였다. 이와 같은 미소라 히바리의 격려를 안고 시련을 견딘 미야코 하루미는 그해 마지막 날 대망의 NHK 홍백가합전에서 출전자의 맨 마지막 순서를 장식하는 오오토리(大トリ)에 선정되었다.
당시 미소라 히바리가 미야코 하루미의 은퇴 소식을 듣고 '너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버리는 것이니 꼭 행복해야 한다.' 며 비장한 얼굴로 지켜보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고 훗날 하루미(春美, はるみ)는 회고하였다.
1980年、「大阪しぐれ」で 第22回日本レコード大賞・最優秀歌唱賞
1984年、'보통의 아줌마가 되고싶다.(普通のおばさんになりたい。)'는 말을 남기고 『第35回NHK紅白歌合戦』을 끝으로 은퇴하였다.
1989年、일본에서 데뷔한 김연자의 곡을 프로듀싱 하는 등 후배 양성에 힘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1989年、1989년 6월 24일 국민가수 미소라 히바리의 죽음을 전해 듣고 미야코 하루미는 가수 복귀를 선언하였다.
1989年、『第40回NHK紅白歌合戦』に出場し、「アンコ椿は恋の花」を歌唱, 가수로 복귀하였다.
NHK 홍백가합전(紅白歌合戰)
일본 가수들의 꿈의 무대인 NHK 홍백가합전(紅白歌合戰)에는
1965년부터 1984년까지, 1989년부터 1997년까지 총 29회 출연하였다.
NHK 홍백가합전 역대 순간 최고 시청률은
1984년 제 35회 NHK 홍백가합전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한 미야코 하루미가 눈물로 불렀던 노래 '부부 고갯길(夫婦坂)'이 방송되던 시점의 88.4%라는 경이적인 기록이다.
현재 레코드 회사는 콜롬비아 뮤직 엔터테인먼트.
*자수포장 ※ 학문·예술의 연구나 창작에 공적이 있는 사람에게 일본 정부가 수여하는 포장.
그녀는 독특한 꺾기 창법을 잘 구사하여 큰 인기를 얻었으며, 그녀의 독특한 꺾기는 여러 연예인에 의해 성대모사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그녀는 주로 애수(哀愁)가 담긴 곡들을 많이 노래했으며, 이외에도 고향인 교토를 소재로 한 노래들을 취입하기도 하였다. 또한 엔카 이외의 장르의 곡들도 자주 부르기도 하였다.
アンコ椿は恋の花 都はるみ 1964年 (昭和39年) 当時16歳
1964년 16세에 " 아가씨 동백은 사랑의 꽃"으로
일본 열도를 흔들면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都 はるみ(みやこ はるみ、1948年(昭和23年)2月22日 - )は、日本の女性演歌歌手、音楽プロデューサー。本名は北村 春美(きたむら はるみ)。京都市生まれ。レコード会社は日本コロムビア。所属事務所は「コロムビア音楽芸能」「サンミュージックプロダクション」「プロデュースハウス都」を経て現在は再びサンミュージック。「はるみ節」と呼ばれる独特の力強い歌唱法を持ち、昭和後期を代表する女性演歌歌手として数多くのヒット曲を世に送った。
「アンコ椿は恋の花」 「涙の連絡船」「好きになった人」「北の宿から」「大阪しぐれ」「浪花恋しぐれ」の6曲がミリオンセラー(公称セールス)を記録している。
*ミリオンセラー[million seller] ① 밀리언 셀러 ② 레코드나 서적 등에서 100만 매·권 이상 팔린 인기 상품
来歴
在日韓国人の父(李正次)、日本人の母(北村松代)の間に生まれたハーフ。北村春美の名で京都市立乾隆小学校へ通い、京都市立嘉楽中学校の卒業証書を手にした際はじめて自身の本名が李春美であることを知る。
5歳のとき、芸能好きの母親によって日本舞踊とバレエを習いはじめる。6歳の6月6日からは母親から浪曲と民謡を直接指導されるようになった。
洛陽女子高等学校の学校長(当時)は、いきなり「歌手になります!」と言って中退したと語る。同時期の若者には頻繁にみられた言動で、そのうちの一人と高をくくっていたという。在学当時は歌うことに傾倒し成績は芳しくなかった。
1963年、第14回コロムビア全国歌謡コンクールにて優勝。
1964年、「困るのことヨ」でデビュー。
同年「アンコ椿は恋の花」がミリオンセラーの大ヒットを記録し、
第6回日本レコード大賞・新人賞を獲得。
「はるみ節」と呼ばれる、うなり声のような力強いこぶし回しや、波打つような深いビブラートが特徴的。
昭和40年代〜50年代にかけて数多くのヒット曲を生み、名実ともに日本を代表する女性演歌歌手となった。
都はるみ~ 예술혼을 위하여
https://www.youtube.com/watch?v=RLelC5By3so
大阪しぐれ 都はるみ
https://www.youtube.com/watch?v=bvGzHluGit4
都はるみ~ 예술혼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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