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의 왕위 찬탈 : 성삼문과 신숙주, 집현전 친우(親友)의 엇갈린 선택

2024. 12. 30. 04:50History & Human Geography

 단종 복위 운동

문종이 재위 2년만에 죽자 단종이 13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게 된다. 어린 임금이 즉위하면 서열이 가장 높은 대비가 수렴청정을 해야 하지만 당시에는 수렴청정을 할 대왕대비가 없었다. 그 이유로 모든 정치적 권력은 문종의 명을 받은 황보인, 김종서 등이 잡고 있었다. 단종의 왕권이 정립되지 못했을 때 수양대군은 정치적 야심을 가지고 주위에 사람을 모으기 시작했다. 수양대군은 단종 즉위 2개월 정도가 지난 1452년 7월경 거사를 계획하고 권람, 홍윤성, 한명회, 신숙주 등을 심복으로 삼는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김종서, 황보인, 조극관 등 여러 대신을 쓰러뜨리고(계유정난), 거사에 직접적 간접적으로 공을 세운 정인지, 권람, 한명회 등 43인을 정난공신으로 책봉한다.

 

이러한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은 과거 세종과 문종의 총애를 받았던 집현전의 일부 학사 출신으로부터 강한 저항을 받았고,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김문기 등의 유신들은 세조를 제거하고 상왕인 단종을 복위시킬 것을 모의한다.

1456년 6월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 때 거사를 치를 계획을 세웠는데, 거사 계획이 탄로남을 두려워한 김질이 장인에게 거사 계획을 누설한 뒤 세조에게 고변함으로써 거사 주동자인 사육신과 그 외의 연루자들이 모두 처형되면서 단종을 복위시키려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간다.

 

성삼문은 한글 창제를 위해 음운 연구를 해 훈민정음 반포를 도왔다.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단종 복위를 꾀하였으나 김질의 밀고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단종 복위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성삼문은 주모자들과 함께 모진 고문과 함께 거열형을 받았으며, 아버지와 세 동생, 네 아들 등 모두 처형되었고 여자들은 모두 노예가 되었다.

이 몸이 주거 가셔 무어시 될꼬 ᄒᆞ니​

봉래산(蓬萊山) 제일봉에 낙락장송(落落長松) 되야 이셔

백설이 만건곤(滿乾坤)ᄒᆞᆯ 제 독야청청(獨也靑靑) ᄒᆞ리라

 

 

세조의 왕위 찬탈이 빚어낸 역사의 불협화음

권경률 역사 작가

입력 2024.10.24 08:15 수정 2024.10.25 08:54

호수 202411

 

[권경률의 노래하는 한국사(32)]

성삼문과 신숙주, 집현전 친우(親友)의 엇갈린 선택

 

 

성삼문, 단종 복위 도모하다 의롭게 죽어… ‘충절의 표상’ 부활

신숙주, 세조 도와 나라를 실질적 견인했으나 ‘숙주나물’ 오명

성삼문(좌)과 신숙주(우)는 기질과 소신에 따라 각자의 길을 걸었다. 후일 사림(士林)은 성삼문을 충절의 표상으로 추켜세우고, 신숙주는 변절의 대명사로 깎아내렸지만, 최근 나라를 실질적으로 견인한 인물로 재평가되고 있다. [사진 나무위키]

 

“이몸이 죽어 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蓬萊山) 제일봉(第一峰)에 낙락장송(落落長松) 되어 있어

백설(白雪)이 만건곤(滿乾坤)할 제 독야청청(獨也靑靑) 하리라”

(김천택, <청구영언>)

성삼문의 충절을 노래한 단가다.

절명시처럼 비장하면서도 의롭고 호방한 기개가 뭉클한 감동을 안겨준다. 그는 숙부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단종을 다시 보위에 올리려다가 사지가 찢겨 죽었다. 하지만 후일 사림은 성삼문을 절의의 화신으로 떠받들었다.

“두만의 봄강이 변방산을 둘렀는데(豆滿春江繞塞山)

나그네의 돌아가는 꿈은 오색구름 사이에 있네(客來歸夢五雲間)

중서들은 취한 뒤에 아마 일이 없으리니(中書醉後應無事)

밝은 달 배꽃은 추위를 겁내지 않으리라(明月梨花不怕寒)”

(홍만종, <소화시평>)

신숙주가 함경도에서 노닐다가 동료들에게 보낸 시다. 조선 중기의 저명한 시 평론가 홍만종은 당시(唐詩)에 양보할 것이 없다며 그의 시를 높이 평가했다. 신숙주는 뛰어난 문장가요, 박학다식한 학자요, 유능한 행정가였지만 뒤에 변절의 오명을 뒤집어썼다.

세조 2년(1456) 6월 2일 임금이 편전에 나와 앉자 좌부승지 성삼문도 입시(入侍)했다. 세조는 즉시 군사를 시켜 그를 무릎 꿇렸다. 왕은 이미 김질의 밀고를 받은 터라 성삼문 등이 전날 자신을 죽이고 상왕 단종을 복위시키려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세조가 이를 따져 물으며 김질을 대질시키자 성삼문은 웃으면서 시인했다.

상왕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다

“상왕께서 춘추가 한창 젊으신데 왕위를 내놓았으니, 다시 세우고자 하는 것은 신하의 당연히 도리 아니오? 나리는 평소 주공(周公)을 읊으셨지만, 주공이 이처럼 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소.”(이긍익, <연려실기술> 단종조고사본말 ‘육신의 상왕 복위 모의’)

주공은 중국 주나라를 세운 무왕의 동생이다. 무왕에 이어 어린 조카 성왕이 즉위하자 섭정을 맡아 통치체제를 정립하고 나라를 안정시켰다. 그는 실권을 잡았지만, 조카의 왕위를 탐하지 않고 평생 신하의 본분을 다했다. 공자가 주공을 상고시대 최고의 성인(聖人)으로 추앙한 이유다.

수양대군은 1453년 10월 10일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김종서 등 대신들과 친동생 안평대군을 죽이고 모든 실권을 틀어쥐었다. 허수아비가 된 단종은 숙부에게 주공처럼 아름다운 이름을 남겨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신하 노릇 할 마음이 없었다. 어린 조카를 겁박해 1455년에 기어코 왕위를 찬탈하고 말았다.

하늘에 해가 둘이 아니듯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게 유자(儒者)의 충절이다.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성승, 이개, 하위지, 유성원 등은 상왕 복위를 모의했다. 1456년 6월 1일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연회장에서 거사를 벌이기로 한 것이다.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과 무신 유응부가 이 연회의 운검(雲劍)을 맡았으니 하늘이 도운 셈이다. 운검은 큰 칼을 차고 임금 곁에 서는 것이다. 왕, 세자, 측근들을 한꺼번에 도륙할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세조의 책사 한명회가 이상한 낌새를 챘는지 딴지를 걸었다. 날씨가 덥고 장소도 비좁다며 세자와 운검을 들이지 말도록 한 것이다. 성삼문과 박팽년은 경복궁에 남은 세자가 비상시 군사를 일으킬 수 있으니 거사를 미루기로 했다. 유응부가 후일로 미루면 누설될 것이라고 우려했지만, 듣지 않았다. 일이 차질을 빚자 과연 김질이 장인 정창손을 찾아가 거사 계획을 실토했다. 정창손은 곧장 임금에게 가서 상왕 복위 모의를 고변했다.

성삼문 등은 국문장에 끌려와 잔혹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임했다. 국왕을 ‘전하’가 아닌 ‘나리’라고 부르며 왕위 찬탈 이후 받은 녹봉은 한 톨도 쓰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들에게 세조는 임금이 아닌 무도한 종친일 뿐이었다.

국문은 참혹했다. 쇳조각을 불에 달구어 성삼문의 배꼽 밑에 놓으니 기름이 끓으며 불이 붙었다. 허나 그는 오히려 쇳조각이 식었다며 뜨겁게 달구어 오라고 외쳤다. 다리가 뚫리고 팔이 끊어져 나가는데도 그저 고문이 독하다고 했을 뿐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다. 이윽고 죽음을 직감한 그는 돌연 앞에 있던 신숙주를 꾸짖었다.

“지난날 자네와 내가 집현전에 번을 들었을 때 세종께서 원손(元孫)을 안고 뜰을 거닐면서 당부하셨네. ‘과인이 세상을 떠난 뒤에 경들은 부디 이 아이를 보호하라’고 하셨네. 그 말씀이 아직 귀에 쟁쟁하거늘 그대는 잊어버렸단 말인가. 자네의 악행이 이 지경에 이를 줄은 생각하지 못했네.”(남효온, <추강집> ‘육신전’)

세종이 품에 안고 보호를 당부했다는 그 원손이 바로 단종이다. 오랜 벗의 ‘피범벅’ 질타에 신숙주는 어떤 심경이었을까? 세조가 국문장 뒤로 피신시킬 정도였으니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던 듯하다. 성삼문과 신숙주, 두 사람의 끈끈한 인연이 파국을 맞아 크게 요동치는 순간이었다. 그 인연의 시작은 집현전이었다.

성삼문이 신숙주를 꾸짖은 까닭

세종대왕 치세의 집현전은 ‘인재사관학교’였다. 왕은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신하들을 치국(治國)에 쓸모 있는 인재로 양성했다. 직접 과제를 내주며 책을 읽으라고 독려했다. 업무 때문에 책 읽을 시간이 모자라면 특별휴가를 줬고(사가독서), 혹시라도 책 읽는 방법을 모를까봐 과외교사(변계량 등)까지 붙였다. 세종은 집현전의 젊은 학사들을 애지중지했다. 대왕이 온천에 거둥할 때면 항상 신숙주, 성삼문, 박팽년, 이개, 최항 등을 데리고 갔다. 그들은 편복 차림으로 어가 주위에서 왕의 자문에 응했다. 신하로서 영예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경연(經筵)에서도 옛 문헌을 상고해 임금과 국정에 대해 거침없이 토의했다.

신숙주와 성삼문은 집현전 학사들 중에서도 빼어났다. 1450년 1월에 명나라 한림시강 예겸이 사신으로 오자 대왕은 특별히 두 사람으로 하여금 그와 교류하게 했다. 예겸은 학자이자 문장가로 천하에 명성이 높았다. 세종은 조선의 학문도 명나라에 못지않음을 보여주기 위해 이들을 자랑스럽게 내세운 것이다.

두 사람은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와 보급에도 큰 역할을 했다. 유배 중인 명나라 학자 황찬에게 음운학을 배우기 위해 요동을 13차례나 왕래하기도 했다. 1448년에 나온 우리나라 최초의 운서(韻書) <동국정운(東國正韻)>은 그 소중한 결실이다. 훈민정음으로 한자의 통일된 표준음을 정한 것이다.

성삼문도 뛰어났지만, 당대에 더욱 두각을 나타낸 건 신숙주였다. 그는 집현전의 아이콘이었다. 궐내 장서각의 귀중한 책들을 마음껏 읽으려고 시도 때도 없이 집현전의 숙직을 자청했다. 이 소문을 들은 세종은 내관에게 신숙주의 동태를 지켜보게 했다. 과연 그는 밤을 새워 책을 읽다가 새벽녘 첫닭이 울자 잠자리에 들었다. 보고를 받은 임금은 기특하게 여기고 자신의 담비 갖옷을 내주며 학사에게 덮어주라고 했다. 신숙주와 시문을 주고받은 명나라 사신 예겸은 “굴원의 반열에 오를 만한 동방의 거벽(巨擘)”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1443년 서장관으로 일본에 갔을 때도 요청하는 자마다 즉석에서 시를 지어주며 문명을 떨쳤고, 귀국 후에는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를 저술해 양국 관계의 지침으로 삼았다. 학문의 쓰임을 보여주는 일솜씨다.

너그러운 도량도 갖추고 있었다. 한번은 이조에서 그를 제집사(祭執事)로 차출한 적이 있었다. 성균관 문묘에 제례를 올릴 때 실무를 맡도록 한 것인데, 늙은 서리가 실수로 첩문(牒文)을 전하지 않아 일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신숙주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면됐다. 사실대로 밝혔으면 늙은 서리가 파면됐겠지만, 그를 가엾게 여겨 자기가 첩문을 받고도 나아가지 않았다고 한 것이다. 이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신숙주는 임금에게 용서를 받고 동료들의 신망을 얻었다.

명나라 사행길에 신숙주 데려간 수양

세종은 일찍이 신숙주가 인재임을 알아보았다. “국사(國事)를 부탁할 만한 자”라고 세자에게 천거하기도 했다(<성종실록> 1475 6월 21일 ‘영의정 신숙주의 졸기’). 비록 세자(문종)가 병약하고 세손(단종)은 어리지만, 신숙주 같은 재목이 떠받친다면 왕업을 감당할 수 있으리라 믿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역사의 수레바퀴는 세종이 깔아놓은 궤도를 이탈했다. 세자에게 천거하고, 세손의 미래를 맡긴 믿음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수양대군(세조)은 어린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고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통치체제를 정비했다. [사진 영화 '관상' 스틸컷]

 

수양대군은 ‘정난(靖難)’, 난신을 다스린다는 명분으로 정변을 일으켰다. 정난은 1399년 명나라 연왕 주체(영락제)가 조카 건문제를 둘러싼 간신들을 쓸어버리겠다며 내건 구호다. 수양대군이 볼 때는 김종서, 황보인 등 대신들이 나라를 어지럽히는 난신이었다. 선왕(문종)의 고명(顧命)을 내세워 어리고 외로운 임금(단종)을 쥐고 흔들었기 때문이다. 국왕의 인사권을 농락한 ‘황표정사(黃標政事)’는 수양대군뿐 아니라 젊은 문신들마저 등 돌리게 만들었다.

수양대군은 명분과 함께 대업을 도모할 인재를 찾았다. 1452년 7월 권람의 추천으로 한명회를 만나 의기투합했고, 8월에는 집 앞을 지나는 신숙주를 불러세워 호감을 표했다. 10월에 수양대군은 한명회 등에게 뒷일을 맡기고 사은사가 돼 명나라로 떠났다. 이 사행길에 신숙주를 서장관으로 데려갔다. 원래 야심가일수록 사람 욕심이 많다. 수양대군은 명나라에 다녀오는 내내 신숙주를 극진히 대접했다. 사행길은 멀고 험난한 길이다. 4개월 가량 같이 고생하며 말동무로 지내면 없던 정도 생기기 마련이다. 길 위에서 두 사람은 급속도로 친해졌을 것이다. 자연스레 속내를 밝힐 기회도 있지 않았을까.

명나라에서 수양대군은 신숙주를 데리고 영락제의 무덤을 찾아갔다고 한다. 황제의 능 앞에서 두 사람은 영락제의 유지(遺志)를 음미했을지도 모른다. 조카 건문제를 내치고 대학자 방효유의 십족을 멸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패륜은 세월에 묻히겠지만, 위업은 역사에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1453년 계유정난 직후 43명의 정난공신(靖難功臣)을 봉할 때 신숙주는 이등공신이 된다. 당시 그는 외직에 나가 있었지만, 수양대군과 뜻을 함께했다. 정난을 도모한 건 한명회였지만, 향후 조정을 움직이는 건 신숙주의 몫이었다. 집현전 출신 소장파를 끌어들이는 일에도 공을 들여야 했다. 성삼문이 삼등공신에 이름을 올린 것도 신숙주의 추천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성삼문 또한 공신 명부에서 빼달라고 청하긴 했지만, 계유정난에 반감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수양대군은 영의정부사가 돼 국정을 총괄했고, 판이병조사를 겸직해 인사권을 장악했으며, 신설한 내외병마도통사를 맡아 병권까지 틀어쥐었다. 나라의 모든 권력이 수양대군에게 집중된 것이다. 다음 수순은 왕위 찬탈이었다. 수양대군 측은 어린 임금을 보호하려는 종친들(금성대군, 한남군, 영풍군 등)과 지친들(유모 혜빈 양씨, 누이 경혜공주 부부 등)을 죄인으로 몰아 단종이 더 이상 버틸 수 없도록 압박했다.

성삼문, 옥새를 들고 통곡하다

1455년 윤6월 11일 조카는 어쩔 수 없이 숙부에게 왕위를 넘기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그날 왕명에 따라 옥새를 세조에게 전해준 예방승지가 바로 성삼문이었다. 맡은 바 소임이었지만, 성삼문은 차마 옥새를 건네지 못하고 실성통곡했다. 수양대군은 짐짓 왕위를 사양하다가 머리를 들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남효온, <추강집> ‘육신전’). 세조와 성삼문의 관계는 이 일을 계기로 어긋나기 시작했다. 성삼문은 왕위 찬탈을 용납할 수 없었다.

경복궁 수정전 전경. 옛 집현전 자리에 들어선 전각이다. 근정전, 사정전 등과 가까워 임금과 언제든 소통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신숙주와 성삼문은 세종대왕 시절 집현전의 쌍두마차였다. [사진 국가유산포털]

 

반면 신숙주는 세조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한명회, 권람과 함께 좌익 일등공신에 올랐다. 명나라에 가서 세조의 국왕 책봉을 허락받고 고령군(高靈君)에 봉해졌으며, 보문각대제학과 성균관대사성을 겸직하며 나라의 학문과 교육을 총괄했다. 이후 병조판서, 판중추원사, 우찬성, 좌찬성을 지내며 국정의 중심에 섰다. 아직 나라의 기틀이 온전치 못한 상황에서 그는 세조처럼 과감한 지도자를 도와야 나라가 바로 선다고 믿었을 것이다.

1456년 성삼문은 상왕 복위를 모의하면서 “신숙주는 나와 좋은 사이지만, (죄가 중하니) 죽어야 마땅하다”라고 말했다(<세조실록> 1456년 6월 2일 ‘김질의 고변’). 두 사람은 집현전의 쌍두마차로 오랫동안 같이 일했다. 한 살 터울이니 서로 친애하고 존중하는 벗이었을 것이다.

성삼문은 그러나 평생 친구라도 살려둘 수 없다고 보았다. 거사를 결심한 이상 대의가 먼저였다. 6월 1일 거사 계획을 보면 신숙주를 베는 건 형조정랑 윤영손의 몫이었다. 신숙주가 편방(便房)에서 머리를 감을 때 윤영손이 칼을 어루만지며 몰래 다가갔다. 연회에 세자와 운검을 들이지 않아 거사를 보류하기로 했지만, 그는 모르고 있었다. 신숙주를 살려준 것은 성삼문이었다. 눈짓으로 만류해 칼을 거두게 한 것이다. 후일을 기약하기 위해서였겠지만, 목이 달아날 뻔한 친구를 구해준 셈이다.

세조를 왕답게 만든 신숙주

성삼문이 사대부의 절의에 목숨을 건 반면 신숙주는 세상을 훨씬 넓게 보는 사람이었다. 그는 천문, 지리, 법률, 운학, 외국어 등에 두루 능통했다. 한 예로 당시 사대부들은 외국어를 천시해 습득하는 것을 꺼렸다. 하지만 신숙주는 중국어는 물론 일본어, 여진어, 몽골어를 스스로 익히고 구사했다.

역관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능히 외교문서를 번역할 수 있었다. 넓은 안목과 식견으로 나랏일을 돌보는 유능한 인물이었다.

1453년 10월 10일 계유정난의 불길이 타오르며 수많은 사람들이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사진 JTBC 드라마 '인수대비' 장면]

성삼문 등은 상왕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1456년 6월 잔혹한 국문을 받고 극형에 처해졌다. [사진 KBS 드라마 '공주의 남자' 장면]

 

1462년 신숙주는 영의정에 올랐다. 세조는 큰일을 만나면 반드시 그에게 물었다. 외교·안보 분야에서는 독보적이었다. 사대교린 원칙에 따라 중국·일본과 평화롭게 교류하고, 여진족이 변경을 어지럽히면 직접 군사를 이끌고 토벌했다.

경제관념도 출중했다. 화폐 정책을 예로 들 수 있다. 신숙주는 세종 때처럼 화폐를 강제로 쓰게 하면 백성만 번거로울 뿐이라고 했다. 그는 화폐의 본질을 꿰뚫어 봤다. 백성이 자발적으로 시장을 열고 물산의 유통을 늘려야 화폐가 활발하게 통용된다는 것이다.

세조를 왕으로 만든 것은 한명회였지만, 왕답게 만든 것은 신숙주였다. 다른 공신들처럼 비리와 전횡을 일삼지도 않았다. 오히려 공신들의 잘못을 왕에게 고하고 시정을 촉구했다. 자기 자신은 자세를 낮추고 검소하게 처신했다. 그가 왕위 찬탈에 협조한 것은 부와 권력을 탐해서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요즘 회자되는 성격유형으로 치면 신숙주는 ‘T형’에 가깝다. 논리적인 사고를 중시하고 바람직한 결과를 추구했다. 그는 강력한 왕권을 세워 통치 체제를 개선하고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것이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반면 성삼문은 인간관계를 의식하고 과정의 공감 여부를 따지는 ‘F형’으로 볼 수 있다. 숙부가 적통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다니 이는 공감할 수 없는 패륜이며 세종의 은혜를 저버리는 짓이다.

성삼문도, 신숙주도 기질과 소신에 따라 각자의 길을 걸었을 뿐이다. 후일 사림(士林)은 성삼문을 충절의 표상으로 추켜세우고, 신숙주는 변절의 대명사로 깎아내렸다.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였다. 선비가 임금의 잘못을 들추면 강직하다는 평판을 얻었다. 성삼문처럼 목숨까지 던지면 그야말로 ‘레전드’가 된다.

백설(白雪)이 만건곤(滿乾坤)할 제 독야청청(獨也靑靑)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라를 실질적으로 견인한 것은 신숙주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숙주나물’이라 조롱하면 어떠리. 밝은 달 배꽃은 추위를 겁내지 않는다(明月梨花不怕寒).

권경률 - 역사 칼럼니스트이자 작가. 서강대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새로운 해석과 기발한 상상력으로 한국사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유튜브·페이스북에 ‘역사채널권경률’을 열어 독자들과 역사 하는재미를 나누고 있다. <모함의 나라>(2022), <조선을 새롭게 하라>(2017), <사랑은 어떻게 역사를 움직이는가>(2023)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