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 義士

2024. 8. 30. 04:29Beautiful People

 

윤봉길의사 최후모습 쓰레기장에 유해매장 일제만행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 義士

서울 서초구 매헌로99(시민의 숲 내)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 의사

 

丈夫出家生不還(장부출가생불환)
대장부가 집을 나서는데, 어찌 살아 돌아오리오.

 

한국의 독립유공자이자 교육자.

1932년 4월 백범 김구의 지시를 받아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본 천장절 및 전승 기념식에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義擧)를 성공시켰다. 본관은 파평 윤씨 판도공 제학공 공간공파 32대손, 호는 매헌(梅軒)이다.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 덕산군 현내면 조량리(現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목바리마을)에서 아버지 윤황(尹璜)과 어머니 경주 김씨 김원상(金元祥) 사이의 5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윤우의(尹禹儀)이다.

11살 때이던 1918년에 덕산공립보통학교(現 예산덕산초등학교)에 입학했으나, 조선인으로서 우리말도 맘대로 못 쓰고 외국말인 일본어를 쓰고 배워야 한다는 것과 꼴도 보기 싫은 일본인 교사 휘하에서 교육을 받아야 하는 것에 불만이 상당히 많았고, 결정적으로 이듬해 3월 초  3.1운동을 보고 더 일본인을 증오하게 되었으며, 그 길로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부모님에게 폭탄선언을 하고  자퇴하였다. 물론 그렇다고 완전히 학업을 멈춘 것은 절대로 아니었고, 그 대신 한학을 배우러 서당을 다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 한인애국단에 소속되었다.

 

길이 날릴 명성 선비의 기개 맑고
그 선비의 기개 맑고 맑아 만고에 빛나리니
만고에 빛나는 밝은 마음 모두가 학문 속에 있으니
그 모두가 배움을 행하는 데 있으므로 그 이름 영원하리라

 

매헌 윤봉길 의사가 열여섯 살 때 지은 '옥련환시(玉連環詩)'입니다. 윤봉길 의사는 1931년 겨울 대한민국임시정부 한인애국단에 가입한 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의 홍구공원에서 열린 일왕 생일축하연(천장절)과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행사가 함께 진행되는 단상에 폭탄을 던짐으로써 일본제국주의에 항거하여 조선인의 기개를 한껏 드높인 분입니다.

 

이날 의거는 단상에 있던 상하이 파견군총사령관과 일본거류민단장을 죽이고, 제3함대 사령관, 육군 제9사단장 등에게 중상을 입힌 엄청난 거사였지요. 당시 이 소식을 듣고 중국 국민당 총통 장개석은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했다"라고 높이 평가했으며 이를 계기로 국민당 정부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주기 시작했습니다.

 

윤봉길 의사 하면 의거만을 기억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는 여섯 살 때부터 《천자문》, 《소학》, 《동몽선습》을 익혔으며 열두 살 때부터는 매곡 성주록의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체계적으로 학문을 닦았고, 열여덟 살에는 《오추(嗚推)》, 《옥수(玉睡)》, 《임추(壬椎)》 같은 시집을 내기도 했지요. 윤봉길 의사가 남긴 시는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라고 시작하는 거사 전날 두 아들에게 남긴 시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를 합쳐 모두 500편에 이르고 있습니다. 독립운동가로만 알려진 윤봉길 의사는 올곧은 기개를 지닌 선비의 삶이 무엇인가를 터득한 시인이기도 했습니다.

 

홍커우 공원 거사 후 윤봉길은 그 자리에서 일본 육군 헌병들에게 붙잡혀 구타당한 채 연행됐고 모진 고문을 받은 뒤 상하이 파견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아 우편선 '타이요마루'에 실려 오사카 육군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후 카나자와 육군구금소를 거쳐 1932년 12월 19일 육군 작업장에서 향년 24세로 총살형을 당해 순국하였다.

 

 

윤봉길 의사의 처형을 준비하는 사진

 

 

 

襁褓에 싸인 두 兵丁에게


너어도 万一 피가 잇고 뼈가 잇다면 반다시
朝鮮을 爲하야 勇敢한 鬪士가 되여라
太極에 旗발을 놉히 드날니고 나의
빈 무덤 압헤 차재와 한 잔 술을 부어노으라
그리고 너의들을 아비 업슴을 슬처하
지 말어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잇스니
어머니의 教養으로 成功者를
東西洋 歷史上 보건대
東洋으로 文學家 孟軻가 잇고
西洋으로 佛蘭西 革命家 나푸레옹
이 잇고 米國애 發明家 에듸손이 잇다
바라건대 너의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의들은 그 사람이 되여라

 

 

청춘의 제군에게


피끓는 청년 제군들은 아는가
무궁화 삼천리 우리 강산
왜놈이 왜 와서 왜걸대나
피끓는 청년 제군들은 모르는가
되놈 되와서 되가는데
왜놈은 와서 왜 아니 가나
피끓는 청년 제군들은 잠자는가
동천에 서색(曙色)은 점점 밝아오는데
조용한 아침이나 광풍이 일어날 듯
피끓는 청년 제군들아 준비하세
군복 입고 총 메고 칼 들며
군악 나팔에 발맞추어 행진하세

 

 

어느 중국인이 쓴 한시

 

太極旗下正氣如虹
多君三千萬衆
春申江上巨彈殲敵
愧吾四百兆民

태극기 아래 바른 기운은 무지개처럼 빛나네
(조선에는) 군자가 많다 해도 3000만인데
봄날 상하이 황포 강변에서 거대한 폭탄으로 적을 섬멸하니
우리 4억 중국인을 부끄럽게 하는구나

어느 중국인이 쓴 한시

 

 

사후

처형 이후 일본군은 "윤봉길의 시신은 화장했다."고 신문에 보도했지만 사실은 근처 노다산 쓰레기 소각장이었던 노다산 공동묘지 관리소로 가는 좁은 길목에 사람들이 밟고 가도록 암매장되었다.

광복 이후 김구는 박열이강훈에게  윤봉길, 이봉창백정기의 유해 발굴을 부탁하였다.

 

윤봉길 의사의 유해, 처형 당시 묶여 있던 목제 형틀과 이를 발굴한 발굴대원들[실제유해]

 

 

1946년 3월 2일 서상한 선생을 필두로 재일동포들과 일본 현지에서 1946년 3월 6일 사형장에서 남쪽으로 3km 떨어진 카나자와시 노다산 시영공동묘지 북측 통행로에서 윤봉길의 유해를 발굴하였다.

 

 

추도식장으로 향하는 삼의사의 운구 행렬

 

1946년 5월 15일 이봉창백정기 의사의 유해와 함께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부산에서 추도식을 진행한 뒤 6월 16일 서울에 도착하여 6월 30일 용산구 효창공원의 '삼의사' 묘에 안장되었으며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윤봉길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1922년, 윤봉길은  14세에 자신보다 1살 많은 배용순과 결혼했다.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으나 둘째 아들 윤경과 딸 윤안순은 홍역으로 어린 나이에 죽었다. 망명 당시 첫째 아들 윤종은 고작 세 살이었으며, 셋째 아들 윤담은 아내의 뱃속에 있었다.

1949년 4월 29일 충남 예산에서 거행된 '윤봉길렬사비' 제막식에 참가한 김구와 윤봉길 유족들이다.

 

삼의사묘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의 묘

 

윤봉길 의사 묘

~ 1946년 6월 30일 효창공원내  "삼의사" 묘에 안장~

 

유족

 윤봉길 (1908 ~ 1932) / 妻 배용순 (1907 ~ 1988)

  • 1남 윤종 (1927 ~ 1984) / 妻 김옥남 (1936 ~ )
    • 1녀 윤주경 전 독립기념관장 · 제21대 국회의원(국민의힘, 비례대표) (1959 ~ )
    • 1남 윤주웅 (1974 ~ )
  • 2남 윤경 (1928)
  • 1녀 윤안순 (1929)
  • 3남 윤담 (1930 ~ 1938)

 

 

어느 가족의 독립운동사

 

상하이 홍커우 공원의 한 청년

애국지사 오희옥 할머니 광복절 기념식 애국가 제창 소름돋는 연출 · @KTV_korea

https://www.youtube.com/shorts/EJFZ8HRk2K4

 

 

 

 

 

 

윤봉길 의사 체포 사진은 가짜였다

윤봉길의사 최후모습 쓰레기장에 유해매장 일제만행

https://www.youtube.com/shorts/Vzgei0sBusM

 

 

박열은 조선 민족을 대표해 일본에 일갈했다.

The National Anthem of Independence Army · Hyung Joo Lim ·

 

https://www.youtube.com/shorts/G2Hf1YsEg8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