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숙[李眞淑] 前 대전 MBC 사장

2024. 8. 1. 04:48Beautiful People

솔직토로

이진숙 前 대전 MBC 사장

전쟁터 누비던 종군기자, 政爭터에서 ‘혁명가’ 꿈꾼다

글 : 박지현 월간조선 기자 talktome@chosun.com

 

 

⊙ 바그다드의 종군기자, “外信 받아쓰기 너무 부끄러워 목숨 걸고 국경 넘었다”

⊙ 인생에서 가장 잘한 건 아이 낳은 것, 다음은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것

⊙ 靑春 다 바친 곳이지만 ‘적폐 사장’ 낙인… “MBC 안 본 지 수년”

⊙ ‘심판자’ 아니라 선수로 뛰고 있는 언론 환경 보고 정치권 발 디뎌

⊙ 30년 만에 내려간 고향, 대구서 기회를 보다… “革新 위한 내 역할 있을 것”

李眞淑

1961년생. 대구신명여고, 경북대 영어교육학과 졸업, 한국외대 영어통역 석사,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공공정책학 석사, 서강대 정치학·언론학 석사 / 前 MBC 기자, MBC 워싱턴 특파원·지사장, MBC 홍보국장·대변인·기획홍보본부장·보도본부장, 대전 MBC 대표이사·사장

 

▲이진숙(여성 최초 종군기자)- 전쟁터 누비던 종군기자, 政爭터에서 ‘혁명가’ 꿈꾼다(사진=조준우)

 

 

‘전쟁 같은 삶’이라는 말이 딱 맞다. 걸프전과 이라크전. 세계사에 남은 굵직한 전쟁. 청춘을 그 현장 한가운데서 보냈다. 몇 년 후, 중년. 취재 현장을 떠나 MBC 관리자가 됐다. 들여다보니 회사 자체가 내전(內戰) 중이었다. 노조의 미사일이 날아들었다. 그 와중에도 여성으로는 최초로 지역 MBC 사장직에 올랐다. ‘공습’은 그칠 줄 몰랐다. ‘적폐 사장’이라는 낙인을 찍었다. 우여곡절 끝에 30년 언론인 생활을 접었다. 새로운 무대로 뛰어들었다. 그곳 또한 전쟁터다. 정치판이다. 2019년 10월, 당시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의 첫 인재 영입 대상자에 이름을 올렸다.

 

― 정치권 영입 제안, 이번이 처음이었습니까.

 

“세 번째예요. 첫 번째는 2000년대 초반, 김문수 공관위원장 시절이었는데 워낙 기자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때라 고사했죠. 두 번째는 2018년 김병준 비대위원장 시절이었는데, 그때도 준비가 되지 않아 거절했습니다.”

 

― 이번에는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나요.

 

“그보다는 달라진 언론 상황이 크게 작용한 것 같아요. 관찰자나 심판자 역할을 해야 하는 언론이 선수로 직접 뛰고 있는 형국이지 않습니까. 특정 진영에 들어가서 아주 열심히요. 2018년에도 그런 감이 있었지만, 점차 더 광란의 춤을 춘다고 할까요. 언론인 출신으로 이걸 바꿔보고 싶었습니다.”

 

― 어떻게요.

 

그는 종종 ‘전쟁 용어’를 곁들여 썼다.

 

“지금 좌파는 엄청난 진지(陣地)를 구축해놨습니다. 진지전에서 밀릴 수밖에 없는 구조예요. 가까운 예로 영화를 들면, 좌파성 영화는 엄청 많지만 우파 쪽은 거의 없죠. 문화 권력을 완전히 접수한 거예요. 각종 정책은 말할 것도 없고요. 나라가 건강하게 발전하려면 좌우가 비슷한 무게로 경쟁해야 합니다. 지금은 압도적인 비대칭 전쟁이에요. 언론 출신으로 좌우 균형을 잡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한 거죠.”

 

 

내 편 아니면 敵

▲2019년 10월 31일 황교안 당시 자유한국당 대표가 영입인재 환영식에 참석해 이진숙 전 대전 MBC 사장에게 당점퍼를 입혀주고 있다. 사진=조선DB

그런데 국회 입성에는 실패했다. 2020년 3월, 대구 동구갑 공천에서 탈락했다.

 

― 정치권에 발 디딘 후 ‘보수 정권에는 투사(鬪士)가 없다’고 했는데요, 본인이 투사가 되려고 했습니까.

 

“그러려고 들어왔어요. 대구·경북(TK) 지역에 국회의원이 25명이죠. 그중 적어도 5~6명 정도는 투사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차원에서 전희경 의원이 참 아깝다고 보는데….”

 

― 싸움의 목적은 정권교체인가요.

 

“물론이죠.”

 

― 막상 보수당에 몸담아 보니 어떻습니까. 교체 희망이 보이던가요.

 

“회의적이에요. 우선 보수에서 구심점이 될 사람이 없어요. 대표성을 띤 사람을 중심으로 결집이 되는 건데, 모일 데가 없습니다. 있다고 쳐요. 그때 ‘모여라’ 하고 호루라기를 불어줄 사람도 없습니다.”

 

― 출마 선언하고 나서 ‘편 가르기 정치를 지양해야 한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더군요. 투사는 편이 있어야 뛰는 사람인데, 주장과 배치되는 각오 아닌가요.

 

“이 정권 자체가 이미 편을 갈라놨잖아요. 건강한 비판자도 적이 돼버리는 구조로요. 조지 부시의 말처럼 ‘우리 편 아니면 적(Either you are with us or you are with the terrorists)’으로 만들어버렸어요. 이 같은 불의, 불법과 같은 ‘비상식’과 싸우는 투사를 말한 겁니다. 흔히 ‘막말’하는 싸움닭 같은 게 아니라요. 향후 정권교체가 되더라도, 보복의 정치는 안 했으면 합니다. 물론 불법 행위는 단죄해야겠지만, 현 정권처럼 터무니없이는 안 돼요. 초반에 ‘적폐 청산’ 운운하는 걸 보고 ‘아, 아마추어 정권이다’ 했습니다.”

 

2019▲년 10월 31일 당시 자유한국당의 제1차 영입인재 환영식. 사진=조선DB

― 기자 출신으로 여당발(發) 언론 관련법은 어떻게 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대표적으로 언론중재 및 피해구제 등에 관한 법률(언론중재법) 일부개정안이 있다.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020년 6월과 7월 발의했다. 정부가 소위 ‘가짜뉴스’에 대해 시정명령을 내리고 불응할 시 벌금을 물린다는 내용이다. 비판적 보도를 권력이 제어하겠다는 뜻이다. 우상호 의원은 2020년 11월 방송법·인터넷 멀티미디어 방송사업법(IPTV 사업법) 일부개정안을 발의했다. 방통위가 관련 사업자에 대한 현장조사권을 갖는 내용이 골자다. 일각에서는 이를 ‘방송사 사찰법’ ‘언론검찰법’이라고 비판한다.

 

“해당 법안들의 면면을 살펴봐야겠지만, 저는 이런 모습이 가증스러울 따름입니다. MBC에 이용마 기자라고 있었습니다. 제가 기획홍보본부장일 때 노조국장을 했죠. 그분이 투병 생활을 했는데,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주자이던 2016년 병문안을 갔어요. 그를 위로하고, 쓰다듬으면서 ‘공정언론을 위해 힘쓰겠다’고 했죠. 실제로 그 당시 민주당에서는 굉장히 많은 언론 관련법을 냈어요. 권력이 공영방송을 장악하는 걸 제도적으로 막는 장치들을 여럿 마련했죠. 막상 본인이 대통령 되고 나서는 그 법안들이 전혀 진행이 안 됐습니다.”

 

― 그렇다고 언론 자체의 책임이 없는 건 아니죠. 언제부턴가 ‘객관적 보도’라는 게 없어진 듯합니다.

 

“객관적 보도라는 건 원래 없어요. 쓴 사람, 주체가 있는데, 객(客)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만 균형 보도는 있어요. 중요하고, 지켜야 할 원칙이죠. 대상을 왜곡 없이 관찰하고 이를 균형 있게 보도함으로써 시청자, 독자들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언론 본연의 역할입니다. 지금은 그게 구조적으로 어렵죠. 애초 정부에서 나라를 둘로 쪼개놨으니까요. 정권 심판하는 언론은 적, 적이 아닌 언론은 선수, 이렇게 돼버렸죠.”

 

 

 “앉아서 받아쓰는 기사, 죽기보다 싫었다”

 

아직도 생생하다. 여릿한 체구. 그 뒤엔 항상 모래바람이 불었던 것 같다. 곳곳엔 탱크와 폐허들. 포화(砲火) 속에서도 현지인과 당당히 인터뷰를 마친 그는 늘 이렇게 마침표를 찍곤 했다.

 

“바그다드에서 MBC 뉴-스, 이진숙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첫 여성 종군기자로 1991년 걸프전과 2003년 이라크전을 취재했다. 이라크전 때는 현장에 남은 유일한 한국 기자였다.

 

― ‘기자 이진숙’을 잘 알려면 《오늘 밤 마이크가 그립다》(1991), 《MBC 이진숙 기자의 취재수첩》(1996) 둘 중 뭘 읽는 게 더 좋을까요.

 

“둘 다 읽지 말아주세요. 신변잡기식으로 써놨는데, 지나고 나서 보니까 너무 부끄러워요. 보지 마세요.”

 

― 기자를 꿈꾸는 이에게 필독서였는데요, 아직도 ‘여기자’ 하면 이진숙을 많이 떠올리더군요.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인생 통틀어 가장 감사한 일은 아이를 낳은 것이고, 직업적으로는 세계사에 남는 전쟁 속에 있을 수 있었다는 겁니다.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것도 이진숙이 그 현장에 있었기 때문일 거고요. 살아남았다는 것 또한 감사한 일이고요.”

 

그야말로 ‘목숨 건’ 취재였다. 미사일의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자동차를 수십 미터씩 날렸다. 한번 폭격 소리가 울리면 연발로 10여 차례 폭음이 이어졌다. 그 와중에도 6mm카메라를 놓지 않았다. 건물은 너덜너덜해졌고 도시엔 까만 연기가 자욱했다. 시체는 물론이고 팔다리, 머리가 잘린 처참한 광경도 많이 봤다. 미사일에는 눈이 없다. 기자라고 피해가지 않는다. 운명에 맡겨야 했다. 일시 귀국 직후 한 언론에 쓴 기고문 일부다.

 

“지금 죽어야 할 운명이라면 서울에서도 죽을 수 있는 것이다. 어린 딸과 오래오래 재미있게 살고 싶지만 지금 가야 하는 운명이라면 우주로 도망간들 그 운명을 피할 수 있을까. 나는 기자로서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을 했다. 그 결과로 한국의 시청자들이 좀 더 정확한 뉴스를 접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부수적인 이득이다. 그 모든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 1991년 처음 종군기자로 나갈 당시에는 국제부가 아니라 사회부 소속이었지요. 어떻게 이라크에 파견됐습니까.

 

“전쟁이 발발하자 MBC에서도 취재팀을 파견하려고 이라크대사관에 비자를 신청했어요. 그런데 대사관에서 발급을 거부했어요. 국가의 사활과 위신이 걸린 문제라, 이왕이면 중동 정세를 잘 아는 사람이면 좋겠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저는 사회부에 있었지만 평소 중동문제에 관심이 많아 꾸준히 중동 관련 세미나와 대사관 행사에 참석하면서 이라크대사관 인사들과 교류를 하고 있었어요. 국제부 선배의 제안이 들어왔고, 제 이름을 넣었더니 비자가 나온 거죠.”

 

― 2003년 이라크전 때는 회사에서 신변안전을 위해 철수 지시를 내렸는데, 몰래 다시 바그다드로 들어갔다죠.

 

“전쟁 전야에 바그다드에 있는데 요르단 암만으로 철수하라는 지시를 받았어요. 끝까지 남으려고 했는데 국경을 넘을 땐 눈물이 나오더군요. 있어야 할 자리를 버리고 떠난다는 생각에요. 지켜봐야 할 게 있는데, 500만의 바그다드 시민도 남아 있는데. 어쩔 수 없이 요르단 암만으로 넘어왔어요. 현장과 1000km 떨어진 곳이었죠. 거기서 외신을 검색해서 기사를 썼습니다. 그래놓고 ‘요르단 암만에서 MBC 기자 이진숙입니다’라고 하는데, 너무 창피하더라고요. ‘아, 이건 죽어도 싫다. 내가 왜 이 호텔 방에서 전쟁 기사를 써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행히 철수할 당시 재입국 비자를 미리 받아뒀다. 개별적인 진입 경로도 확보해놨다. 며칠 후, 이라크에서 비자가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바로 짐을 쌌다.

 

 

악착같이 살았던 이유

미국 제43대 대통령 조지 부시, 영부인 로라 부시와 함께. 사진=이진숙 제공

바그다드로 향하는 고속도로. 상공에는 전투기 십여 대가 날아다녔다. 공습을 준비하는 전폭기들이었다. 제 발로 전쟁터로 들어간다는 게 실감 났다.

 

― 기자라는 게 원래 험난한(?) 직업인데다, 더욱이 종군기자라. 남편께서는 묵묵히 지지를 해줬습니까.

 

“그럼요. 묵묵히 정도가 아니라 전폭적으로요. 기자 때도 그렇고 지금도 제가 하는 일이라면 기꺼이 지지를 해줍니다. 지난 총선 때도 저 이상으로 선거운동을 열심히 했어요. 사람 만나는 거 좋아하고, 저보다 친화력도 뛰어나서 명함도 참 잘 돌리더라고요.(웃음)”

 

결혼은 1996년도, 36세에 했다. 당시에는 만혼(晩婚)이었다. 슬하엔 대학생 딸 하나를 뒀다.

 

― 출산하고 나서는 좀 다르지 않았나요. 갓난아기를 두고 전쟁터에 간다는 아내를 어느 남편이 지지해주겠습니까.

 

“2003년 바그다드로 다시 갈 땐 딸이 만 네 살이 좀 넘었을 때예요. 그때는 회사에도 알리지 않았지만, 남편에게 얘기 안 했어요. 말해봤자 가지 말라고 하거나, 어쨌든 저에게 부담되는 얘기만 할 게 뻔하니까요.”

 

남편과는 워싱턴에서 만났다. 1993~1994년 니먼펠로(하버드대학 중견언론인 연구과정)에 가서다. 당시 MBC 워싱턴 지사장과 식사하는 자리에 나갔더니, 남편이 함께 있었다고 한다. 이 전 사장은 “남편은 현대 워싱턴 지사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준(準)MBC 직원이라 할 정도로 MBC에 친한 사람이 많았다”면서 “맞선 자리는 아니었지만, 그때 눈이 맞았다”고 했다.

 

― 직업의식은 굉장히 존경스럽습니다만, 그래도 집에 전화는 하시지 그랬어요. 딸이 눈에 안 밟히던가요.

 

“고민을 참 많이 했죠. 앉아서 받아쓰긴 싫고, 그렇다고 현장을 가자니 딸 얼굴이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고. 혹시 내가 죽으면….”

 

이 대목에서 그의 목이 메었다. 눈물도 맺혔는데, 안 들키려는 듯 재빨리 닦아냈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독해져야 되는데.”

 

― 아이 얘기할 때 독해져서 뭐 합니까.

 

“제가 이런 얘기를 원래 잘 안 해요. 너무 떠벌리는 것 같아서요. 하던 얘길 이어가자면, 혹시 내가 죽는다고 해도, 나중에 아이가 엄마를 기억할 때 ‘우리 엄마 참 괜찮았지, 멋있었네’ 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국경을 넘었어요. 덧붙이자면, 제가 태어나서 가장 잘한 일이 아이를 낳은 겁니다. 가장 후회되는 일은, 더 낳지 않은 거예요. 둘째를 안 낳은 게 커리어 때문인데, 지나고 나니까 상당히 후회가 되더라고요. 제가 8개월 때까지 회사에 임신 사실을 숨겼습니다. 겨울에 만삭이어서 가능했는데, 그때 생각하면 너무 미안해요. 아이의 존재를 부정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 뭐였을까요. 무엇을 위해 그렇게까지 치열하게 일했습니까.

 

“글쎄요. 그 당시에는 그냥, 맡은 일을 기왕이면 열심히 하는 게 당연한 거라 여겨서 어떤 의미가 있지는 않았어요. 돌이켜서 그렇게 산 것에 의미를 부여하자면, 이런 거 아니었을까요. 우리 때만 해도, 선배들이 여기자들한테 ‘시집이나 가지, 뭣 하러 여기 와서 고생하고 있어’라는 말을 했어요. 이 말은 한 인간으로 ‘너만 잘살면 된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잖아요. 전(全) 여성에 대한 책임감이라면 너무 비장하지만, ‘나도 잘할 수 있어’에서 나아가 ‘우리도 잘할 수 있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살았다. ‘이진숙’이라는 이름 옆에는 그래서 ‘살아 있는 기자’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녔다.

 

 

 

청춘을 바친 MBC

 

“사장님! 물러나실 용의 없습니까!” 약 10년 후. 상황은 역변(逆變)했다. 이진숙 대전 MBC 사장의 출근길을 막아선 시위대가 외친 말. 그의 이름에는 또 다른 꼬리표가 붙었다. ‘적폐 사장’.

 

악바리 이진숙 기자는 승승장구했다. 본사 요직을 두루 거쳤다. MBC 홍보국장·대변인・기획홍보본부장・보도본부장을 거쳐, 2015년 3월에는 대전 MBC 사장이 됐다. 그런데 그리 명예롭지는 못했다. 취재 현장을 떠난 순간부터 고난은 시작됐다. “우리가 알던 이진숙 기자 맞냐” “정권의 하수인” 혹은 “김재철 사장의 ‘입’이 됐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 ‘종군기자’와 ‘적폐 사장’ 명찰을 차례로 달아준 MBC, 이진숙에게 어떤 곳입니까.

 

“제 직업 인생의 전부죠. 청춘을 다 바친 곳. 나를 만들어준 장소임과 동시에 심한 좌절감을 준 곳.”

 

― 요즘 MBC뉴스 보십니까.

 

“안 본 지 몇 년 된 것 같아요.”

 

― 왜 안 보세요.

 

“뉴스든 뭐든, TV시청 행태는 습관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혹은 퇴근해서 늘 트는 채널이 있죠. 말도 안 되는 허망한 뉴스를 보도한 후로 굳이 안 보게 된 거죠. 또한 시대 자체가 굳이 정해진 시각이 아니라도 24시간 뉴스를 접할 수 있는 시대잖아요.”

 

― 2018년 1월이죠. 사장직에서 물러날 때 MBC에서 ‘퇴출 환영… 공영방송 시민의 품으로’라는 제목의 뉴스를 보도했는데요. 그 방송은 보셨습니까.

 

“그 보도가 이해는 돼요. 2017년 5월 문재인 정권이 들어섰는데 그전부터 이미 탄핵 정국은 시작됐잖아요. 2016년 후반기부터 난리도 아니었어요. 손님과 식사하고 있는데 기자가 찾아와서 ‘사장님, 물러날 생각 없습니까’ 하는가 하면, 출근하려고 하면 엘리베이터 열림 버튼을 계속 눌러서 못 올라가게 했죠. 다음 날 출근할 때 또 그럴 거니까 아예 회사에서 잔 적도 있습니다. MBC에서는 사임을 환영할 만하죠.”

 

 

170일간 노조와 싸워

 

― 그 정도라면, 그냥 내려놓는 게 편하지 않았을까요. 직(職)에 대한 미련이었습니까.

 

“나 개인만 생각하면 그만두고 끝내는 게 낫죠. 그런데 그건 역사적 책임을 방기(放棄)하는 거예요. 제가 본사 노조하고도 싸워서 결국은 이겨냈는데, 노조가 나가라고 한다고 해서 그만두면 그 선례를 남기는 거잖아요. 후임 사장들에게 노조가 나가라고 하면 나갈 수도 있다는 여지를 주면 안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 서럽지 않던가요.

 

“매일 당해서 그런지 눈물도 안 나왔어요. 대전에서 있었던 일은 새 발의 피예요. 본사에서는 더 심한 일도 많았습니다. 2012년 1월부터 7월까지 170일간 파업했을 때예요. 반년간이죠. 홍보국장에서 기획본부장으로 전환하는 시기였는데, 파업 소식을 듣고 출장을 가다가 급거 귀국했어요. 민노총 언론노조의 경우, 직원 70~80%가 노조원이니까 회사가 완전히 마비가 되거든요. 그땐 파업 안 하는 이들 협박부터 시작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모욕적인 일들이 더 많았어요.”

 

발단은 2010년 2월 김재철 사장이 부임하면서다. 당시 노조는 ‘이명박 정권의 낙하산’이라며 김 사장의 출근을 막았고, 사측은 “MBC 사장은 정권이 아닌, MBC 지분 70%를 소유한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가 선임한다”면서 “적법한 절차로 선임한 사장”이라고 반박했다. 이때 ‘사측’의 중심에 이진숙 전 사장이 있었다. 이 전 사장에 대해 노조 측은 “파업기간 동안 김재철 사장을 적극 변호했고, 이후 기획홍보본부장으로 승진해 최초의 MBC 본사 여성 임원이라는 타이틀도 거머쥘 수 있었다”고 했다.

 

― MBC 노조에서는 이진숙 당시 기획홍보본부장이 정권의 하수인이 돼 노조를 탄압했다고 주장했는데요.

 

“그때 노보가 거의 매일 나왔어요. 이 또한 사내 ‘언론’입니다. 사실을 전달해야죠. 처음에는 대응하지 않았는데, 내용이 너무 터무니없는 겁니다. 김재철 사장과 무용수가 내연관계라느니, 정말 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어요. 실제로 이걸 보고 흔들리는 직원도 있었고, 임원들마저 상당히 불안해하는 지경에 이르렀죠.

 

사실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싶어서 회사 특보를 쓰기 시작했어요. 특보를 밤새 써서 노보가 나오기 전에 뿌렸어요. 전쟁으로 치면 폭탄 제거를 한 거죠. 밤새 쓰고 아침에 집에 가 씻고 다시 나오기를 170일 동안 반복했어요. 그런 시간이 6개월 이어지니, 막상 파업하는 사람들도 명분이 없다는 걸 서서히 깨닫게 된 거고요.”

 

 

 

세월호 오보 논란·정수장학회 비밀 회동

 

그즈음해 이 전 사장에게 제기된 논란은 또 있다. 크게 두 가지다. MBC의 세월호 참사 오보 책임 회피와 정수장학회 비밀 회동 논란이다.

 

― 세월호 오보(誤報)와 관련, 그간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셨죠.

 

“제가 입을 열면 ‘책임 회피한다’는 꼴이 돼버리니까 아무 얘기를 안 했어요. 당시 상황을 설명하면 4월 16일, 저는 바그다드에 있었습니다. 시차가 있으니 일어났을 때 이미 배는 다 가라앉아 있더군요. 참담했죠. 귀국했을 때 이미 오보 사태는 일어났던 건데, 엄청난 인명사고인 만큼 시청자들은 시시각각 구조 상황이 궁금했을 겁니다. 언론은 당연히 이를 빨리 알려줘야 할 의무가 있고요. 그때 해수부에서 ‘전원 구조’ 보도자료가 나왔는데 《한국일보》 인터넷 사이트에서 가장 먼저 이를 보도했고, MBC가 뒤이어 속보를 띄운 겁니다. 기자들의 경마식 보도 행태는 지적받아야 하지만, 이 사태는 참 난감합니다. 물론 이상적인 보도였다고는 할 수 없어요. 지금도 어떻게 해야 올바른 것이었을까, 물음표로 남아 있어요.”

 

― 정수장학회 회동 논란도 컸습니다. 최필립 이사장을 만나 정수장학회의 MBC 지분 처리를 주도했다는 내용인데요.

 

“최 이사장이 먼저 ‘MBC 주식의 70%는 방문진이, 30%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데, 결국 권한이 없으니 처분하고 싶다’고 했어요. MBC 측에는 정수장학회 쪽에 이걸 팔라 말라 할 권한도 없어요. 먼저 제안을 해와서 지원할 수 있는 건 하겠다고 한 겁니다.”

 

― 이날 대화록이 《한겨레》에 그대로 보도됐죠. 보도에 따르면 이 전 사장이 지분 매각 후 ‘박근혜 대통령에게 도움을 줘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는데요.

 

“그 기사는 완전히 왜곡된 보도입니다. 주식을 어떻게 처분하는 게 좋을지 논의하는 과정에서 최 이사장이 ‘노조에서 또 반발하겠네’라는 발언을 했습니다. 거기에 저는 ‘그렇죠. 또 박근혜한테 도움 주네 마네 하는 얘기가 나오겠지요’라고 했고요.

 

그런데 《한겨레》 기자가 이걸 쏙 빼고 ‘박근혜에게 도움을…’이라고 말줄임표를 붙인 겁니다. 그 내용을 다른 언론에서는 ‘박근혜에게 도움을 줘야 하는데…’라는 식으로 인용보도를 한 거고요.

 

제가 최 이사장을 만나기 전에 《한겨레》의 한 간부를 만난 일이 있습니다. 그가 저를 친하게 여겼는지 ‘선배, 이번에는 저희가 김재철 사장을 몰아내겠다’고 말했어요. 엄청 놀랐죠. 너무 스스럼없었거든요. 그 이후 이런 일들이 벌어진 겁니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

▲저항세력본부에서.

― MBC에서 이 전 사장 옆에 계속 있어 준 선후배들이 있습니까.

 

“(손을 오므리면서) 딱 한 줌. 진짜 딱 한 줌 남더라고요. 저녁때 특보 쓴다고 앉아 있으면 한두 명이 들러서 어떻게 돼가고 있느냐고 묻기도 하고.”

 

― 그분들 지금도 만나겠죠? 지난날을 어떤 표정으로 돌아보나요.

 

“웃으면서 얘기하지는 못해요. 그러려면 MBC가 정상이 돼야죠. 지금도 저 모양인데, 웃음은 안 나와요.”

 

― 아직 여정이 많이 남았지만, 지금까지 인생의 황금기는 언제였나요.

 

“40대요. 20대는 너무 정신없이 지나갔고, 30대는 주거환경, 근무환경의 변화가 있었고요. 40대가 가장 안정적이면서도, 왕성하고 힘있게 일했던 시기입니다. 황금기 정도가 아니라 다이아몬드예요. 다시 40대를 앞두고 있다? 넓은 길 한가운데에서 양팔 벌려 맞이할 겁니다.”

 

― 40대면 2003년 이라크전 취재하던 때군요. 그런데 이진숙의 인기는 1991년 걸프전 때가 더 폭발적이지 않았나요.

 

“1991년에는 매체가 별로 없었으니 시청률이 38%까지 나왔어요. 웃긴 얘기 해줄까요. 아무한테도 안 한 얘긴데, 그때 워낙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서 밖에 나갈 때 선글라스를 꼈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어리석고 부끄러워요. 돌아보면 그런 유명세는 아무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큰 의미도 없고. 1990년대에는 열정이 가득했지만, 지식은 얄팍했어요. 2003년 전쟁터 갔을 때는 공부를 더 했을 때라 좀 덜 부끄러운 취재를 하지 않았나 싶어요.”

 

― 생사의 갈림길에 선 사람들을 수없이 목격했죠. 이후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기도 했나요.

 

“달라지죠. 이 나라에서는 죽고 사는 문제가 굉장히 이례적인 거지만, 그곳에서는 죽음이 일상입니다. 팔다리 잘린 사람과 널브러진 시체가 일상의 풍경이에요. 살아 있다는 것의 가치, 보통은 그 소중함을 모르고 살잖아요.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이라는 마음을 가지게 됐어요.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래서 사기 치는 인생을 살 수 없게 됐다고나 할까요.”

 

 

다시 대구시민으로

 

― 대학생 딸은 장래 희망이 뭡니까. 기자를 하겠다고 하지는 않나요.

 

“아직 하고 싶은 게 많을 때라, 이따금씩 바뀌어요. 지금은 마케팅 쪽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기자 한다는 얘기는 한 번도 안 하더라고요. 한다고 하면 응원해야죠. 뭘 하든.”

 

― 이 전 사장의 학창 시절은 어땠습니까.

 

“그땐 그저 평범했던 것 같아요. 경북 성주 월항면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때 대구로 와 약 20년을 살았어요. 그 무렵 아버지가 보시던 《김찬삼의 세계여행》이라는 전집이 있었어요. 그 책을 보며 ‘아, 나도 세계를 다니고 싶다’ 생각했어요. 그게 영문학 전공 선택의 배경이 됐는지도 몰라요. 이후 통역대학원에 갔고 졸업 후 MBC에 입사한 거죠.”

 

― 이번에 다시 주소지를 대구로 옮겼죠. 30년 만에 또 대구시민이 돼보니 어떻습니까.

 

“내려올 때부터 대구에서의 제 역할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대구는 저의 DNA를 만들어준 곳입니다. 제가 성장할 때는 이 지역에 자부심이라는 게 있었어요. 제3의 도시로 손색도 없었고, 오늘날 자유민주주의의 기틀을 만든 지역이기도 하니까요. 그런데 30년 만에 다시 와보니 그 자부심이 많이 사라졌더군요. 경제 규모도 인천에 3위 자리를 내준 지 오래고, 수출량은 광주에 뒤진 지 오래입니다. 실제로 대구에는 오랫동안 대기업이 없죠. 이념적・경제적・문화적 정체성이 사라진 도시가 돼버렸어요.”

 

― 대기업 유치하겠다는 구호는 많이 봤습니다만, 매번 실패했죠.

 

“기업의 목적은 수익창출이죠. 수도권 인프라를 다 포기하고 대구로 갔을 때, 이익이 있어야겠죠. 예컨대 대구 평당 땅값이 100만원이라고 치면 대기업에 ‘10만원으로 해줄 테니, 오라. 그 대신 지역 인재를 50% 이상 채용하라.’ 이런 조건을 제시하면 되지 않겠어요? 그런데 의사결정권자가 ‘100만원짜리 땅을 왜 10만원에 내줘?’ 하니 안 되는 겁니다.”

 

그는 “대구가 30년간 변하지 못한 것은 그동안 사회적으로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사람들이 단체장을 맡아왔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그들끼리 서로 돕고 이끄는 게 있을진 몰라도 혁명하기는 어려운 거죠. 기업을 끌어오는 것도 자기가 아는 이익집단에 조금이라도 손해가 되면 과감히 추진을 못 하는 겁니다. 변화를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사람들과 전혀 다른 생각을 하는 인물이 나와야 합니다. 옆도 뒤도 안 보는 사람이요. 지금 거론되는 인물들을 보면 관료 출신, 배지 출신으로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그는 “리더는 의사결정을 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지는 사람”이라면서 “그런데 이곳에서는 책임질 일을 애초에 만들지 않는다”고 했다.

 

 

대구에서 ‘혁명가’ 꿈꾸다

 

― 변화에는 많은 에너지가 수반됩니다. 막상 대구시민들은 지금 이대로가 효율적이고, 편하다고 여길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워낙 새로운 것에 저항력이 큰 지역이잖아요.

 

“변화에 대한 요구는 분명히 있습니다. 바뀌어야 한다고 느끼면서 결국 같은 사람을 찍는 거거든요. 이런 경우가 있었어요. ‘대구에는 이진숙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인 분도 막상 대외적으로는 조심스러워하더라고요. 대구는 분지(盆地)기도 하고 외부와 교류가 없어서 끼리끼리 문화가 깊게 형성돼 있어요. 그동안 해오던 대로 살아야지, 조금 튀어서 딴 사람을 지지하면 그간 지켜왔던 걸 잃는다는 겁니다. 이런 것들이 쌓여 지금의 대구가 된 거예요. 숨통을 트고 피가 돌게 하려면 이 같은 고리를 한 번은 끊어줘야 해요.”

 

― 기자 출신 정치인의 강점은 뭐라고 보십니까.

 

“취재력과 기획력이죠. 사물의 핵심을 보는 훈련이 돼 있다는 점. 특히 저는 세계 곳곳을 다니며 여러 지도자를 봤잖아요. 성공적인 지도자, 죽음으로 마무리한 지도자 등 다양한 리더상(相)과 그들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도 분석했죠.”

 

― 기자에서 정치인으로 전직(轉職)한 셈인데, 기질적으로 가장 적응이 안 되는 게 뭡니까.

 

“정치인들은 자기 홍보를 굉장히 잘하더군요. 작은 성과도 포장을 해서 ‘이만큼이나 했다’고 말하는 재주가 있던데, 아직 그게 민망합니다. 몸에 맞지 않다는 느낌이에요.”

 

― 그것도 큰 능력이죠.

 

“필요하다면 해야겠죠. 행여 훗날 너무 지나치다 싶으면 언론인으로서 지적해주세요. ‘당신 좀 밥맛이야’라고요.”

 

그의 무대는 늘 전쟁터였지만, 그 위에서 배역은 다 달랐다. 이다음은?

 

― 이진숙 기자라면 오늘 이 인터뷰 제목을 뭐라고 달겠습니까.

 

“종군기자 이진숙, 대구에서 혁명가를 꿈꾸다.”

 

이쯤 되면, 그가 꿈꾸고 있는 다음 행보가 무엇인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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