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10. 02:02ㆍHistory & Human Geography
엄귀비(嚴貴妃)와 양정, 진명, 숙명
김붕래 추천 1조회 255 21.02.01 13:18댓글 6
김붕래
1905년에 ‘양정의숙’이 세워지고, 다음 해인 1906년 ‘진명여학교’와 ‘숙명고등여학교’(처음 명칭은 ‘명신여학교’)가 선보입니다. 이 세 학교는 배재나 이화 같이 외국인 선교사에 의해 개교한 사립학교가 아니고, 엄귀비(순헌황귀비)에 의해서 탄생한, 조선인이 세운 교육기관이란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습니다.
엄귀비(嚴貴妃)는 엄상궁, 엄귀인 경선궁 마마 등 여러 명칭으로 불렸습니다. 1885년 명성황후(민비)가 일인에 시해된 후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막후에서 도왔으며,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을 낳은 후, 1903년에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로 책봉되었습니다. 그리고 영친왕은 후사가 없는 순종황제의 뒤를 이을 황태자가 되었습니다.
엄귀비는 1861년, 8세에 ‘애기 항아’로 입궁하였는데, 자라면서 영민하고 덕이 있어 명성황후 민비를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시위상궁이 되었습니다. 1882년 임오군란의 와중에 명성황후가 장호원으로 피신하고 궁궐이 아수라장이 되었을 때 고종을 성심껏 모셔 임금님의 승은을 입게 됩니다. 피신했다 귀환한 명성황후가 이를 알고 엄 귀인을 쫓아내 한동안 궁중을 떠나 있기도 했습니다. 1895년 명성황후가 일인에 의해 시해되자 고종은 엄귀비를 다시 궁중에 불러들여 명성황후의 빈자리를 대신하게 하였으니 실로 영과 욕이 함께한 어려운 시절을 잘 견뎌낸 결과라 할 만 합니다.
일찍부터 개화사상에 눈 뜨고 신교육의 필요성을 깨친 엄귀비는, 친정조카 엄주익이 운영하는 양정의숙(養正義塾)에 재정을 지원합니다. 경선궁(慶善宮 - 엄구비의 궁호)에 소속된 전남의 함평(咸平)·무안(務安)·광양(光陽), 경기도 이천·풍덕(豊德) 등지의 토지 약 200만 평을 하사했습니다.
처음에는 법률학과와 경제학과 등 전문학원으로 운영되다가 조선교육령에 의거 1913 양정고등보통학교로 개편되어 중등교육을 담당하게 됩니다. 개교 당시는 도렴동 현재 세종문화회관 뒤편에 있다가, 1918년 중구 만리동에 교사를 신축, 이전하면서 학교는 크게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학교 명 양정은 주역(周易)에 나오는 ‘蒙以養正聖功(몽이양정 성공)’이란 구절에서 유래했습니다. 몽매함을 바르게 기름이(소년들을 올바르게 교육함이) 성인의 도를 실천(공부)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양정 하면 마라톤을, 마라톤 하면 손기정 선수를 빼 놓을 수 없습니다. 1988년 교사가 목동으로 옮겨가면서 만리동 구교사는 ‘손기정 기념 체육공원’이 됐습니다.
공원에는 21회 졸업생 손기정 동상, 기념비 등이 조성되어 있고 ‘손기정 월계관 기념수’가 너른 그늘을 드리우고 있습니다. 올림픽 제패 기념으로 베를린에서 받아온 묘목을 모교 정원에 심은 것이니 그 수령 또한 백년에 육박합니다. 당시 3등을 한 남승룡 선수가 했다는 말을 잊을 수 없습니다. 손기정이 부러웠는데 그가 1등을 해서가 아니라, 가슴의 일장기를 가릴 수 있는 월계수를 들고 있던 것이 부럽다고 했습니다. 등 따시고 배부른 우리는 그런 망국의 슬픔을 지금 모르고 삽니다.
손기정 선수는 1936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대회에서 2시간. 29분. 42초로 올림픽 신기록을 수립했는데 이 기록은 1947 51회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서윤복이 2시간 25분 39초의 신기시록을 세우기까지 15년간 아무도 깨트리지 못한 자랑스러운 쾌거입니다. 그 기록이 다시 한국 선수인 서윤복에 의해 갱신되었다는 것도 올림픽 한국의 자랑스러운 기록입니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1위. 남승룡 선수가 3위라는 쾌거를 접한 심훈(<상록수>를 쓴 작가)은 ‘오오 조선의 남아여! 오오, 나는 외치고 싶다! 마이크를 쥐고 전 세계의 인류를 향해서 외치고 싶다! 이제도, 이제도 너희들은 우리를 약한 족속이라고 부를 터이냐!’라고 즉흥시를 써내려가기도 했습니다.
손기정은 13번 대회에 나가 10번 우승을 한 놀라운 기록의 보유자입니다. 1935 메이지신궁체육대회에서는 2시간. 26분. 42초라는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손기정 기념 공원은 서울역 서부 출구(서부역)에서 공덕동 방향에 있습니다. 동양의 덴마크를 꿈꾸며 농촌 계몽으로 한평생을 보낸 유달영 선생도 이 학교 졸업생입니다.
엄 귀비의 동생이면서 한성부 판윤을 지낸 엄준원은 남녀평등과 여성 교육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1905년 정동 사저에서 여성 인재 양성을 위한 사숙(私塾)을 차렸습니다. 그 이듬해 친정 동생의 이런 뜻을 안 엄귀비는 강화도와 부천의 땅을 하사하여 재단을 꾸리고 효자동 창성궁 터(창성동)에 진명여학교를 세우게 합니다. 1906년 4월 21일입니다. 현재 ‘청와대 사랑채’ 근처입니다. 그 앞에 독립운동가 해공 신익희 선생의 생가도 있습니다.
‘부덕(婦德)을 쌓고 학업을 닦아 스스로의 빛으로 온 누리를 밝게 비추어 전진한다.’는 뜻의 進德啓明(진덕계명)에서 ‘진명’이란 교명이 탄생하였습니다. 이화학당 출신으로 황실 통역을 맡아하던 여몌례황(余袂禮黃) 여사가 학감(총교사)이 되어 신식 학교의 면모를 새롭게 했습니다.
1960년대 대학을 다니던 저에게 ‘진명’ 하면 교복과 삼일당(三一堂)이 먼저 떠오릅니다. 진명 학생들은 가슴에 두 줄 백선이 선명한 교복을 입었는데 단정하고 우아했습니다. 양백선(兩白線)이 엄귀비가 세워준 두 번째 황실학교라는 자부심여부는 모르겠으나, 등대가 발하는 빛을 따라 바다를 항해하는 모양의 교표와 잘 어울렸습니다. 황실 내탕금으로 첫 번째 세운 양정은 한 줄, 진명 다음에 세워진 숙명은 세 줄의 백선이 있었으나 유달리 진명의 두 줄짜리 백선은 광복 이후까지 그 전통이 이어졌습니다. 학교 축제도 <백선제>라고 했습니다. 2015년에는 진명 100주년 기념 백선제가 ‘The First and The Best’라는 기치 아래 재학생 졸업생 합동으로 성대히 열리고 진명의 역사와 인물을 자랑하기도 했습니다.
삼일당은 1958년에 지어진 진명여고 강당입니다. 600여n 평에 1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당시로는 구하기 힘든 문화공간이었는데 ‘삼일정신을 계승하자’는 취지로 이승만 대통령이 현판 휘호를 써 주기도 했습니다. 변변한 공연시설이 없던 서울시내 학교에서는 웅변대회 음악제 같은 것을 이 강당을 빌려 하는 등 삼일당은 서울시 전체의 문화공간이기도 했습니다.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나혜석과 사슴의 시인 노천명이 자랑스러운 진명여고 출신입니다.
‘무거운 방장(方帳) 속 첩첩 대문 안에/ 이 나라 부녀들 맹아(盲啞)모양 있을 제/ 우리 님 등불 들고 찾으러 오셨나니/
아, 장하고 장하여라// 장옷 쓰고 교군 속에 숨겨져/ 배우러 나오던 진명의 옛 딸들/
모시어 내 오던 스승들의 수고를 잊을리야 / 한 알의 씨앗은 천으로 만으로 퍼졌어라.’
노천명 여사가 쓴 진명 50주년 축시의 한 부분입니다. 최초의 여성 판사 황윤석. 프랑스 베르사유 도서관에서 <직지심경과> <외규장각의궤>를 찾아 낸 역사학자 박병선(朴炳善·), 성악가 김청자, 시인 문정희, 신은경 앵커 같은 분들이 모두 진명 동산에서 태어났습니다.
숙명여고는 교육의 힘으로 국권을 일으킨다는 애국계몽운동의 이념아래 1906년 5월 22일 양가 규수 5명이 입학한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로 시작되었습니다. 1909년 숙명고등여학교(淑明高等女學校), 1911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1938년 숙명고등여학교로 교명이 거듭 바뀌었습니다. 수송동 80번지, 현재 종로구청과 조계사 중간쯤 붉은 벽돌 교사가 유명했는데 1981년 강남 도곡동으로 이전하면서 도서관 건물을 구교사와 똑같이 재현하여 전통을 살리기도 했습니다. 학교 명칭은 淑德明智 -맑은 덕과 밝은 지혜를 가진 인재 육성에서 따왔습니다.
개교 당시 교장은 이정숙(李貞淑) 정경부인 - 조대비의 친정조카로서 이조판서를 지낸 조영하(趙寧夏) 공의 아내 되는 분이 맡았습니다. 엄귀비가 운영하던 ‘한일부인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한 분입니다. 엄귀비는 황해도 재령군 일대와 전라도 완도군 농지를 하사하여 숙명재단을 꾸리게 했습니다.
양반가 규수가 무단히 문밖출입을 하는 것도 흉이던 시절, 이정숙 여사는 직접 가가호호 방문하여 학생들을 안전히 보호하는 것은 물론 학비와 기숙사비도 학교에서 부담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학생 관리도 양가의 법도를 중시하여, 학생들은 주초에 가마를 타고 등교하여 공부하고 기숙사 생활을 하다가 주말이면 다시 가마를 타고 귀가하는 등 엄격한 양가집의 절제된 생활을 하게 했습니다.
개교한지 몇 해 되지 않아 국권을 상실하자 배운 대로 정의롭게 살고자 했던 숙명인이 식민지시절에 겪어야 했던 수난도 적지 않았습니다. 1911년 명치천황 생일을 축하하는 과일이 학생들에게 내려지자 모두 화장실에 버린 사건으로 3학년 전원, 2학년 14명이 무기정학을 받기도 하고, 3. 1만세 운동에 가담하였다하여 전교생 200명이 정학처분을 받기도 했습니다. 정인보 선생이 작사한 교가에도 이러한 정신이 잘 나타납니다.
비바람 몇 십 년에 의연히
박동 이끼 낀 벽돌에도 절개가 뵌다.
영란화 송이송이 나랏내 나니
푸른잎 눌 닮았나 천지 같구나(2절)
박동(礴洞)은 수송동의 옛 이름으로 용동궁(龍洞宮)터라고도 불렀습니다. 명종의 장남 순회세자가 이곳에서 책봉을 받았던 곳인데, 세월이 흘러 엄귀인의 소유가 되었던 장소에 숙명여학교를 세운 것입니다. 1950년대 제가 국민학생이던 시절 이곳에는 학교가 참 많았습니다. 현 종로구청은 조선 초 정도전의 집터였는데 수송국민학교가 세워졌고, 수송초등학교를 기준으로 동북쪽에 숙명, 중동,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현재 환일고교), 그리고 두산위브 오피스텔 자리에 제가 다니던 종로국민학교가 있었습니다.
영란화(鈴蘭花)는 은방울꽃, 색시꽃이라고도 하는 숙명의 교화입니다. 개교 초대교장을 지낸 이정숙 여사가 각별히 아끼던 꽃입니다. 1926년 제정한 학교 배지에도 이 꽃이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정숙하고 고결한 품위를 지니고 5월이면 활짝 피어나는 꽃입니다. 이정숙 교장은 숙명 학생들을 ‘영란송이’라고도 불렀습니다. 1950년대 유행하던 유행가에도 영란화가 등장합니다. 별들-이 소근대는 홍콩의 밤거리 / 나는야 꿈을 꾸며 꽃파는 아가씨 / 그 꽃만 사가시면 그리운 영란 꽃-
2017년 5월 10일 문재인 대통령 취임식이 끝나자 김정숙 여사는 서둘러 동창 모임이 있는 숙명여고를 찾았습니다. 동창들이 “옛날 왕비가 세운 우리 학교에 111년 만에 첫 영부인이 나왔다.”고 반겼다는 이야기도 한편의 삽화로 기억될 것입니다.
전설의 무용가 최승희, 소설가 박화성, 박완서 한말숙 여사가 숙명 출신입니다. 박완서 선생의 문장은 참으로 감칠맛이 있습니다.
심심하고 심심해서 왜 사는지 모르겠을 때도 위로받기 위해 시를 읽는다.
등 따습고 배불러 정신이 돼지처럼 무디어져 있을 때.
시의 가시에 찔려 정신이 번쩍 나고 싶어 시를 읽는다.
나이 드는 게 쓸쓸하고, 죽을 생각을 하면 무서워서 시를 읽는다.
꽃피고 낙엽 지는 걸 되풀이해서 봐온 햇수를 생각하고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내년에 뿌릴 꽃씨를 받는 내가 측은해서 시를 읽는다.
- 박완서 . <시를 읽는다>
violet
21.02.01 17:25
자핫골이라고 불린 곳에 진명이 있었고 삼일당의 보수연 행사때는 유일하게 제가 축가를 불렀지요
세월이 흐른후 제가 성악가가 됐을거라 했던 스승님을 뵈었고...명성황후의 그늘에 있던 엄귀비가 새로운 세상을 맞으며...개화사상 신교육에 바친 학교의 설립자들은 실로 위대합니다 양정의 손기정선수는
역사의 산증인으로 후배들의 귀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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