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2. 5. 06:05ㆍWonderful World
쿠차(위구르어: كۇچار, 중국어 간체자: 库车, 정체자: 庫車, 屈支 ,屈茨, 丘玆, 중국어 간체자: 龟兹, 정체자: 龜玆) 또는 구자국(龜玆國)은 오늘날 쿠차 현에 위치하던 도시국가이다.
인도, 페르시아 제국, 박트리아와 실크로드 교역국들의 갈림길이었다.
Tarim Basin in the 3rd century C.E.
역사
한서에 따르면 쿠차는 현재 위구르 자치구의 지역에 존재하며 사막이기 때문에 인구는 항상 희박하여 4만명 정도이며 2만 명이 무기를 지닐 수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쿠차는 원래 토하라인들이 살았으나 인도의 영향을 크게 받아 인도화되었고 이후 대부분의 토하라인들이 인도 북부로 이주하고 나서 튀르크인들이 들어와 튀르크인들이 살게 되었다. 얼마안가 토번에 의해 당나라가 공격당하고 안서도호부는 점령당하고 쿠차는 토번의 영토가 된다. 그리하여 당나라는 실크로드를 통한 서역과의 무역이 불가능해졌다. 쿠차는 실크로드에서 서역북도(西域北道)의 중심도시로써의 역할을 담당했다. 신라의 고승 혜초도 이곳을 지나면서 기록을 남겼다.
민족
인도유럽어족의 일종인 토하라어파를 사용하는 토하라인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돌궐의 휘하에 들어간 후에는 점차 튀르크화되었다.
음악
쿠차 음악(쿠차악)은 불교와 함께 동아시아에 매우 유행하였다. 특히 현악기인 류트는 중국의 비파로 알려지게 되었다. 쿠차의 악기는 고구려와 신라에도 전래되었다.
* 춤, 악기, 문화등이 성행하였고 백거이사 호선녀 시를 노래한 것으로 유명하다.
종교
불교는 1세기말까지는 쿠처에 도입되었다. 그러나 왕국이 불교 특히 시라바카야나 파와 마하야나 파의 중심이된 것은 3세기가 되고 나서였다. 이 때문에 그것은 마하야나 중심의 사막의 남측 호탄 왕국과는 달랐다.
중국의 진서에 따르면 3세기에 쿠차에는 수천개의 불탑과 사원이 있었다. 이때에 쿠차 승려들은 중국으로 여행하기 시작하였다. 4세기에는 불교가 왕국에 더욱 성장하였다. 왕국은 불교도의 수도원을 닮아갔다고 하는데 부처의 석상이 있었고 도시 주변에는 수도원이 많았다. 신라승 혜초는 이곳을 지나가며 왕오천축국전에서 쿠차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Kumarajiva in front of Kizil Caves, Kuqa, Xinjiang, China
‘색즉시공 공즉시생’
쿠마라지바(산스크리트어: कुमारजीव Kumārajīva) 구마라습, 구마라십, 구마라집, 중국어 간체자: 鸠摩罗什, 정체자: 鳩摩羅什, 병음: Jiūmóluóshí 주모뤄스[*]: 344~413[1])은 구자국(龜玆國: 현재의 신장 쿠차에 속함) 출신의 불교 사상가다. 한자 표기는 구마라시바(鳩摩羅時婆), 구마라기바(拘摩羅耆婆), 줄여서 나습(羅什), 습(什), 의역하여 동수(童壽)라고도 한다.
중국 후진(後秦) 시대 장안(長安)에 와서 약 300권의 불교 경전을 한자로 번역한 게 유명하며, 그의 불경 번역은 불교 보급에 공헌했을 뿐 아니라 삼론종(三論宗)・성실종(成実宗)의 기초가 되었다. 최초의 삼장법사(三藏法師)로 불리며, 훗날 현장(玄奘) 등 많은 삼장이 등장하였다. 쿠마라지바는 현장과 함께 2대 대역성(大訳聖)으로 불리며, 또한 진제(真諦), 불공금강(不空金剛)과 함께 4대 역경가(訳経家)로 꼽는다.
쿠마라지바가 번역한 아미타경
약력
인도의 명문 귀족인 아버지 쿠마라야나(Kumārāyana, 鳩摩炎)의 아들로 어머니는 쿠차국 왕의 누이동생인 지바카(Jīva)이며, 쿠차국에서 태어난 그는 7세에 어머니를 따라 출가하여 아버지의 고향인 서역(西域) 카슈미르 야르칸드에서 대승(大乘) · 소승(小乘)을 배우고 고국에 돌아와 열심히 대승을 설파하여 그 명성은 중국 내부에까지 퍼졌다.
384년 쿠차로 쳐들어온 중국 후량(後涼)의 장군 여광(呂光)의 포로가 되었다. 군사(軍師)의 위치에 있으면서 여광을 돕기도 했지만, 여광은 그를 포로로써 취급했고 달리는 말에서 떨어뜨리거나 함께 포로로 끌려온 쿠차의 왕녀를 강제로 아내로 맞게 하는 등의 잔학한 짓도 했다고 한다. 18년 동안 여광과 여찬(呂纂) 밑에서 양주(涼州)에서 살던 쿠마라지바는 서기 401년 후진의 황제 요흥(姚興)에게 국사(國師)로서 영접되었다. 요흥의 뜻에 따라 여성과 혼인, 환속한 그는 이후 경전 번역에 종사하여 35부 300권의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했다.
쿠마라지바의 역문은 유려하여 《법화경》(法華經)이나 《아미타경》(阿彌陀經)의 역문 등은 현대의 법의(法儀)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그의 번역 사업에 의하여 당시 유행하고 있던 《반야경》(般若經) 연구는 더욱 연구가 깊어졌고 또 대지도론(大智度論) 등의 대승론부(大乘論部)도 처음으로 소개되었다.[2] 그가 《반야경》을 포함한 불교 경전들을 불교 본연의 뜻에 맞게 바르게 번역하면서 당시까지 중국에서 유행하던 격의불교(格義佛敎)의 폐단이 비로소 극복되었다.
쿠마라지바는 413년(409년이라고도) 장안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임종 직전 그는 "내가 전한 것(번역한 불경)에 틀린 것이 없다면, 내 몸이 사라진 뒤에라도 내 혀는 타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후 불교의 방식대로 화장되었고, 다 타버린 그의 시신 속에서 혀만은 타지 않고 남아 있었다고 한다(『고승전』권2).
▲ 키질천불동 전경
○ 키질천불동(克孜尔千佛洞 17굴 벽화) :
Xuanzang_statue
<대자은사 입구에 세워진 현장법사 동상>
현장(玄奘, 602년 4월 6일 ~ 664년 3월 7일)은 당나라 초기 고승이자 번역가이며, 흔히 현장삼장(玄奘三藏)으로 불린다. 10세 때 형을 따라 낙양의 정토사에서 불경을 공부했고, 13세 때 승적에 이름을 올려[1] 현장이라는 법명을 얻었다. 그를 부르는 또 다른 명칭은 삼장법사인데, 삼장(三藏)이란 명칭은 경장(經藏) · 율장(律藏) · 논장(論藏)에 능해서 생긴 별칭이다.
현장은 당시의 한문 불교 경전의 내용과 계율에 대한 의문점을 팔리어와 산스크리트어 원전에 의거하여 연구하려고 627년 또는 629년에 인도의 푸슈야브후티로 떠났으며 645년에 귀국하였다. 그는 귀국 후 사망할 때까지 만 19년에 걸쳐 자신이 가지고 돌아온 불교 경전의 한문 번역에 종사하였다. 그 번역은 원문에 충실하며 당시 번역법이나 번역어에 커다란 개혁을 가져왔다. 이 때문에 종래 번역을 구역(舊譯)이라 부르고, 현장 이후 번역을 신역(新譯)이라고 부른다. 현장은 중국 불교의 법상종 · 구사종(俱舍宗)의 개조이다.
또 그는 자신의 인도 여행의 견문기를 《대당서역기》에 통합 정리하여 태종에게 진상하였다. 이 책은 당시 인도나 중앙아시아(서역)를 알기 위한 제1급의 사료다. 또한 문학적으로는 현장의 천축 여행을 모티브로 하여 명나라 시대에 《서유기》라는 소설이 생겼다.
행적
본래 중국의 승려들은 법에 의해 모여 살아야 했는데, 현장 승려는 여행을 했기 때문이다. 장안을 출발하여 인도에 이르는 현장 승려의 행로는 그의 여행기 《대당서역기》에 잘 나타나 있는데, 《만화 십팔사략》에 의하면 불교를 믿는 관리들이 통행증을 내주고 위험한 길을 미리 알려주었다고 한다.
627년 (일설에는 629년) 인도로 출발하여, 쿠차와 투르판 등의 서역을 거쳐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등의 행로를 거쳐 천축의 날란다 사원에 들어가게 된다.
그의 저서는 명나라 때 오승은(吳承恩)에 의해 《서유기》라는 소설로도 각색되었는데, 그의 흔적인 쿠차와 투르판 등에서 뚜렷이 찾아볼 수 있다. 현장법사가 천축으로 불경을 구하러 가는 길에 국문태의 초대를 받아 630년 2월경에 도착하여 1개월간 카라호자에 들러 이 곳에서 법회를 열어 한 달 동안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을 설법했는데, 그때 법회를 열었던 건물은 복원이 되어 있다. 카라호자의 왕 국문태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고, 노잣돈으로 많은 선물을 받았는데, 그 후 10여 년 유학을 끝내고 불경을 가지고 다시 카라호자에 들러 당나라로 귀환을 하려고 했으나, 그때는 이미 현장법사의 모국인 당나라에 멸망한 뒤였고 사람들도 다 떠난 뒤였다고 한다. 할 수 없
이 현장은 카라호자에 들러지 않고 바로 당나라로 귀환하게 된다.
저서
《대당서역기》: 총21권이며, 그의 17년간(629-645)의 구법 행적을 정리한 것으로 그가 정리하여 그의 사후 646년에 완성되었다. 대당서역기는 현장이 직간접 경험 한 138개국 풍토와 전설, 관습 등 정리한 방대한 서적이다. 이것은 고대 및 중세 초 중앙아시아와 서남아시아의 역사나 교류사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문헌기록이 미흡한 인도 고대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일차 사료로 유용하게 이용하고 있다. 그리고 현장은 5천축 80개국 중 75개국이나 역방하면서 사실적인 기록을 남겨놓음으로써 할거로 점철된 인도역사를 통일적으로 파악하는 데 더 없이 소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 10권
서유기에서 묘사된 현장
서역으로 불경을 가지러 떠나는 삼장법사 일행(서유기)
《서유기》에서 현장은 삼장법사로 묘사한다. 불경 구하러 천축으로 가던 도중 옥황상제에게 싸움을 건 죄로 산 밑에 500년째 깔려있던 손오공의 형벌을 면제해주고 손오공을 통제하기 위해 손오공에게 금고아를 머리에 씌운다.
그 이후 손오공을 데리고 다니면서 천축으로 향하던 도중 저팔계와 사오정을 만나 일행에 포함시켰다. 이렇게 삼장,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은 불경을 구하러 천축으로 여행을 떠나는데 여행 도중 여러 요괴를 만나지만 손오공의 활약으로 위기를 모면한다. 그런데 일방적인 것은 거의 전부의 요괴는 모두 손오공이 무찌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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