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육사(李陸史)와 청포도(靑葡萄)

2024. 7. 1. 09:06Lessons

 

청포도 고향   박건

https://www.youtube.com/watch?v=MEEqXrKMfx0

 

 

1904년 5월 18일 경상북도 예안군 의동면 원촌동(現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원촌마을) 881번지에서 퇴계 이황의 13대손인 아버지 이가호(李家鎬, 1878 ~ 1941.4.26.)와 어머니 김해 허씨 허길(許吉, 1876 ~ 1942. 4. 29)[18] 사이의 6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영천군 화북면 오동리(梧洞里) 사람 안용락(安庸洛)의 딸 안일양(安一陽, 1906.11.7. ~ 1983 )과 결혼하였다.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시인. 본관은 진성(眞城), 호는 육사(陸史), 본명은 이원록(李源祿) 또는 이원삼(李源三), 이활(李活)이며 후에 이육사로 이름을 개명했다. 윤동주, 한용운과 더불어 일제강점기의 저항 시인으로 유명하다.

퇴계 이황의 14대손이다. 

독립유공자 이광호(李洸鎬)와 독립유공자 이영호(李寧鎬)는 그의 9촌 삼종숙(三從叔)이다.

 

 


이육사의 딸인 이옥비 여사의 증언에 따르면, 1934년 육사와 정치군사간부학교 1기생 동기인 처남 안병철(安炳喆)이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잡혀들어간 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한 자백으로 여러 사람이 체포되어 죽거나 다쳤다. 이 일 때문에 이육사는 크게 분노해 안병철의 뺨을 때린 후 장인과 처삼촌에게 두루마리 6장이나 되는 편지를 보내 더러운 피의 일족(부인 안일양을 지칭)인 사람을 더는 받아들일 수 없으니 데려가라 전했다 한다. 심지어 그 일 이후 무려 7년 동안이나 본가에 들러도 부모님께 인사만 드리고 잠은 여관에서 잤다고 한다.

어린 시절 대한제국 시기 장릉(章陵) 참봉을 지낸 조부 이중직(李中稙, 1847 ~ 1916. 1. 17)에게서 소학을 배우는 등, 한학을 공부하다가 조부가 별세하던 1916년 보문의숙(이후 도산공립보통학교로 개칭)에서 수학하기 시작하였다. 이 경험으로 그는 훗날의 창작 활동에서 한학을 배운 흔적이 보인다.  졸업 후 1920년 가족들이 모두 대구부 남산정(現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662번지로 이주하여 정착했다. 그리고 19살 때 영천군의 사립 백학학원(白鶴學院)의 교원으로 9개월간 근무하였고 1924년 4월 일본 도쿄에 유학하여 킨죠(錦城) 예비학교를 1년간 다니다가 중퇴하였다. 1925년 8월 중국 베이징으로 유학하여 중국대학(中國大學) 상과에 입학하였으나 2학년 때 중퇴하였다.

1927년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1년 7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그 때의 수인번호인 264에서 따서 호를 '육사'라고 지었다.

출소 후 1929년 5월부터 중외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1년간 근무했다. 1930년 1월 3일 이활이라는 이름으로 첫 시 <말>을 조선일보에 발표한다. 이때 후에 교보생명을 창업하게 되는 신용호에게도 영향을 미쳐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고, 나아가 교육보험사업에 설립하는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1931년 8월에는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전직하였으나 1932년 3월 퇴사하였다. 같은 해 4월 만주국 펑톈으로 가서 의열단 핵심단원 윤세주를 만나 의열단 입단을 권유받고 곧 난징에 있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1기로 입교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폭탄·탄약·뇌관 등의 제조법과 투척법 그리고 피신법·변장법·무기운반법 등을 배웠으며 권총 사격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전한다.

1933년 4월 졸업 후 7월경 귀국하여, 육사라는 필명으로 시 《황혼(黃昏)》을 《신조선(新朝鮮)》에 발표했다. 신문사·잡지사를 전전하면서 시작 외에 논문·시나리오까지 손을 댔고, 루쉰의 소설 《고향(故鄕)》을 번역하였다. 그러나 1934년 3월, 의열단 및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출신자라는 이유로 경성부 본정경찰서 검거된 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며 7월에야 기소유예로 풀려날 수 있었다.
 
 

1934년 6월 20일, 의열단 관련자로 투옥되었을 때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1937년 윤곤강(尹崑崗)·김광균(金光均) 등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子午線)》을 발간, 그 무렵 유명한 《청포도(靑葡萄)》를 비롯하여 《교목(喬木)》 《절정(絶頂)》 《광야(曠野)》 등을 발표했다.

1943년 베이징으로 건너갔다가 어머니와 큰형의 소상을 위해 5월에 귀국했다가 이 해 6월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 이듬해 1944년 1월 16일(음력 1943년 12월 21일) 중화민국 허베이성 베이핑시 주재 일본 제국 총영사관 교도소에서 옥사하였다( 향년 39세)
 
 
둘째동생 이원창과 함께 의열단에서 활동했던 이병희(독립운동가)가 그의 유해를 수습하여 서울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했고, 1960년 안동시에 이장됐다.
1968년에는 안동시에 그의 시비가 건립됐다. 2004년에 이육사 문학관이 세워졌고, 안동시에서는 안동 강변도로를 "이육사로"로 개칭했다. 강변 도로를 타고 안동댐으로 가면 수몰지구 민속촌 입구에 시인의 대표 시인 광야 시비가 세워져 있으며, 도산면 서부리와 도산서원을 지나 온혜리 도산면사무소 교차로에서 토계리 방향으로 들어가면 원천리에 이육사 문학관과 청포도 시비가 세워져 있다.

 

이육사 생가터 와   청포도 시비

 


 

청포도(靑葡萄)/이육사(李陸史)

 

 

내 고장 칠월(七月)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절이주절이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경북 포항시 남구 동해면 면사무소 이육사 시비, 시제는 '청포도'>

 

이 (청포도) 시의 배경은 경북 포항시 동해면 도구리로서,

영일만과 동해의 수평선이 한눈에 들어오는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다.  
 
당시 여기에는 일본인 미쓰아가 경영하는 대규모 포도밭(삼륜포도농장 60만평)과 동양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포도주 생산 공장(삼륜포도주)이 들어서 있었다.  
 
육사는 1940년 여름 항일 운동과 구금 생활에 상한 고달픈 몸으로 이곳을 찾아 왔다.
이곳의 애국 청년 김영호(당시 35세.작고), 정의호(당시 37세.작고), 이석진(당시 40세.작고)씨 등과 만나기 위함이었다.  
 
또 1942년 포항시 기계면의 이영우 집에서 요양했으며, 경주 동남산자락의 옥룡암에서 두어달 요양할 때도 심당 김대정선생과 이식우(전 경주고 교장) 등과 같이 포항의 바닷가와 도구의 포도밭을 찾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장년의 육사는 우국 청년들과 함게 탐스런 포도송이들이 주렁주렁 달린 포도 숲 속에서 어쩌면 밀담을 나누기보다는 먼저 시상에 젖어 들었는지도 모른다.  
 
포도송이처럼 짓푸른 영일만, 졸고 있는 듯 떠가는 돛단배, 우국 청년의 가슴을 메우는 기다림, 시인의 마음에는 잔잔한 시의 물살이 살랑대고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육사는 몰래 포항에 잠입해 청년들을 만난 뒤 역시 몰래 떠난 1년 뒤 삼륜 포도원과 영일만이 청포도를 탄생시켰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다. 
 
포항시에서는 두개의 이육사 청포도 시비를 세웠는데 
 
최초 1999년 12월에 호미곶 바닷가에 세웠고,
또 2013년 12월에는 동해면 면사무소내에도 청포도 시비를 세웠다.

 

<경북 포항시 구룡포 해맞이공원 이육사 시비, 시제는 '청포도'>

 

 

 

도산면 원천리 마을 어귀에 자리한 이육사 문학관

생가는 안동댐이 완공되기전 안동시내로 이전.

 

 

 

 

고증을 토대로 복원한 이육사 생가 "육우당"..

 

 

육사의 육 형제와  육 형제가 태어난 생가 육우당

 

 

  • 동생인 이원조는 좌파 문인으로 활약하다 해방 후에 북한 정권에서 고위직을 한다. 물론 박헌영과 더불어 숙청되는데, 여러 이설이 있지만 1955년경에 정치범 수용소에서 옥사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때문에 이육사 역시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이기는 하지만, 해방 이후 북한 정부 수립과는 관련이 없는데도 괜히 동생때문에 언급되기도 한다. 이육사 생전에 작품집이 발간된 적은 없었고, 이원조가 광복 후 1946년에 형의 작품집을 발간한다.

 

이육사(李陸史)

 

  • 이육사(李陸史)는
  •  평생을 초인적인 삶을 살았다. 이미 20대 초반 무렵무터 각종 독립 운동에 연관되어 감옥살이를 했으며, 만주까지 건너가서 독립운동을 했고 조선 독립군이 사용할 무기 반입 계획에 몸소 참여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마흔 남짓한 짧은 인생이었지만 위대하게 불타오른 애국지사의 표상..
  • 일제 강점기를 거쳐 갔던 수많은 문인들 중 가장 적극적으로 애국, 독립운동을 한 인물이다. 39여년의 인생 동안 옥살이만 17번을 했다는 사실이 애국심과 민족의식이 투철한 그의 삶을 대변한다.

 

 

  • 그의 경력이 독립운동에 매진한 것으로(옥살이만 17번) 채워진 덕분인지 그는 윤동주와 함께 '저항 시인'으로서 평가받게 되었으며 실제로 1943년부터는 한글 사용에 대해 탄압을 가해오자 한시만 쓰는 식으로 붓을 꺾지 않으면서도 저항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게다가 두 시인 모두 해방을 목전에 두고 옥사) 하지만 현재 윤동주는 서훈이 3급이고 이육사는 서훈이 4급이다. 이로 인해 많은 이들이 보훈부에 정정을 요구하였으나 보훈부에서는 안 된다는 말만 있어 왔다. 아무래도 윤동주는 문단에서 힘깨나 쓰는 분들과 엮일 일이 없었으므로 거부감이 적었으나, 이육사는 문단에서 숨기고 싶은 일들이 많은 분들과 엮여왔기에 그의 이름이 언급되면 불편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동생부터 남로당계 고위인사라 북한 사회주의 정권과의 연결성을 부정할 수 없는 것도 문제. 현대에야 이런 연좌제적인 사상을 거의 적용하지 않고 대중들도 이육사 시인의 동생에 대해 거의 알지도 못하지만, 여러 요건이 얽혀 영향이 없다고 보기는 어렵다.

 

  • 동생뿐만 아니라 이육사 본인도 사회주의자였다. 1931년 이육사는 김원봉에 대해 중국국민당의 지원을 받음으로써 "중국의 부르주아 계급과 야합"하고, "사상이 애매하고 비계급적"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코민테른의 일국일당주의를 위반하여 "조선인이 중국에서 조선의 혁명 사업을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혁명적 정조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육사가 1933년 국내에서 발표한 '자연과학과 유물변증법'이라는 글도 그의 이념적 성향을 잘 보여준다.  이육사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졸업식 때 지은 연극 '지하실'에서는 조선에 공산제도가 실현되고, 토지는 국유화되고, 노동자와 농민이 지배하는 사회가 실현돼, 마지막으로 '조선혁명 성공 만세'를 외치는 내용이어서 이육사가 독립운동의 방향을 사회주의 혁명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하상일 동의대 교수는 "이육사 연구는 사회주의적 성격에 대해서는 사실상 함구하고 있었다. 반공주의의 감옥에 갇혀버린 우리 현대사의 억압으로 인해 이육사의 민족주의는 보수적 민족주의에 기반한 주자학적 전통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으로 획일화되어 버리고 만 것"이라고 지적했다.

 

 

 

 

 

 

 

안동시 도산면 원촌, 이육사문학관 뒷산에 있는 육사의 묘소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삼키며 유해를 받은 원창은 서울에 도착하여 미아리공동묘지에 안장하였으며

1960년 봄에는  유해가 고향 원촌으로 이장되어 낙동강을 바라보는 곳에서 고이 잠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