楚剛과 풍류의 시인, 애국지사 李陸史

2024. 7. 1. 12:12Lessons

楚剛과 풍류의 시인, 애국지사 

民族詩人 李陸史眞城李公源祿之墓, 

配儒人順興安氏 祔

 

시인이자 독립운동가, 육사(陸史) 이원록(李源祿 1904-- 1944)선생

묘소(墓所) 이장식(移葬式)

  2023년  4월 5일 오전 11시

안동시 도산면 이육사문학관 옆 산에서 봉행(奉行).

 

1960년 묘비명을  쓴 시인 김종걸(1926~2017)은 아래와 같이 비문을 마무리하였다.

 

公은 淸雅하고 謙虛한 선비이면서 熱烈하고 楚剛한 志士요 또한 莊重하고 華麗한 詩人이었으니

비록 그 生涯는 짧고 辛酸하였건만 그 志節과 詩文은 길이길이 겨레의 心琴을 울리고 남음이 있으리라 

 

淸雅하고 謙虛한 선비이자  熱烈하고 楚剛한 志士요 莊重하고 華麗한  빈들(曠野)의 초인(超人) 

이육사(李陸史)- 이원록 (李源祿 ,1904~1944)

민족의 위기 속 솔선수범한 실천적 문학인

 

 

 

암흑기의 별, 그 하나

독자들은 작품 속의 인물과 작가를 곧잘 혼동하며 작가에게 여느 사람한테서 바라는 것과는 다른 기대를 갖기 일쑤다. 유감스럽게도 작가는 신이 아닐 뿐더러 작품 속의 지혜롭고 때로는 영웅적인 주인공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그러나 간혹 정말 독자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올곧은 삶의 자세를 끝까지 견지하는 작가 또한 없지 않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1944년 먼 이국 땅 베이징의 감옥에서 삶을 마친 시인 이육사(李陸史, 1904~1944)다. 그는 일제 말기의 어두운 시대 상황 속에서도 명징한 언어로 꺼지지 않는 독립 의지를 노래하는 한편, 나라를 위해 입이나 머리가 아니라 몸을 던져 싸움으로써, 민족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어떻게 처신할 것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준 실천적 문학인이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 서릿발 칼날진 그 우에 서다 //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절정」 전문

스스로 ‘초인’처럼 살다 간 〈절정〉과 〈광야〉의 시인 이육사

 

 

만주로 망명한 육사의 외숙들이 경영하던 ‘일창한약방(一蒼漢藥房)’은 독립 운동하는 이들의 연락처 구실을 하던 곳이다. 정의부(正義府) · 군정서(軍政署) · 의열단(義烈團) 같은 항일 단체에 소속되어 독립 운동을 하던 육사도 자주 만주를 오가는데, 「절정」은 바로 그 만주를 배경으로 한 시다. 쨍 하고 깨질 것만 같은 북방의 칼날 같은 겨울 추위와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는 막막함 속에서 그가 기다리던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은 누구일까.

 

일제의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국내에 무슨 일이라도 터질라치면 번번이 일경에게 예비 검속을 당하고, 무려 열일곱 차례나 투옥된 시인 이육사. 그 자신이 바로 초인이고, 그 초인의 가슴속에 들끓던 고단한 삶 속의 결연한 의지가 바로 “강철로 된 무지개”는 아니었을까. 그의 삶은 북방의 칼날 같은 추위 속에서 홀로 피어나 고고히 향기를 뿌리는 한 떨기 매화(梅花)를 떠올리게 한다. 그와 가까이 지내던 시인 신석초(申石艸)는 뒷날 “그는 항상 초조한 것 같았고 분주했고 무엇인가 구름을 잡는 것 같은 느낌이었으며 공상적인 데가 있었다.”고 돌아본다.

 

육사는 친가와 외가 쪽 모두 일제에 항거한 엄숙하고도 애국적인 가풍 속에서 자란다. 집에서 할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우다가 조금 늦게 신학문에 접하게 된 그는 1920년 4월 보문의숙에 들어가며, 이어 대구 교남학교에서 배운다. 1925년 육사는 독립 운동 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한 뒤 일본과 중국을 무대로 항일 활동을 펼치기 시작한다. 1926년 잠시 귀국해 『문예운동』 창간호에 시 「전시(前時)」를 발표하기도 하지만, 이 무렵에 발생한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되어 3년형을 언도받고 투옥된다. 1929년에 출옥한 그는 이듬해 중국으로 가서 베이징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한 뒤 의열단 등 여러 독립 운동 단체에 가입해 학업과 항일 운동을 겸하게 된다. 또 중국의 대표적인 작가 루 쉰(魯迅)과 교유하며 문학적 자극을 얻어, 1930년 4월에는 국내의 『대중공론』에 「3익(翼) 12방(房)」이라는 시를 보내 게재한다.

 

육사가 본격적으로 창작에 힘을 기울인 것은 1933년 귀국한 뒤 『신조선』에 시 「황혼」을 발표하면서부터의 일이다. 중국과 일본에서 벌인 투쟁 활동과 구금 체험 끝에 그가 희구하게 된 것은 민족 정기보다는, 민족을 초월한 인류 평화와 부드러운 안식이다.

······ / 저 십이성좌의 반짝이는 별들에게도 / 종소리 저문 삼림 속 그윽한 수녀들에게도 / 시멘트 장판 우 그 많은 수인(囚人)들에게도 / 의지가지 없는 그들의 심장이 얼마나 떨고 있는가 // 고비 사막을 걸어가는 낙타 탄 행상대에게나 / 아프리카 녹음 속 활 쏘는 토인들에게라도 / 황혼아 네 부드러운 품 안에 안기는 동안이라도 / 지구의 반쪽만을 나의 타는 입술에 맡겨 다오 // 내 오월의 골방이 아늑도 하니 / 황혼아 내일도 또 저 푸른 커어튼을 걷게 하겠지 / 암암히 사라지긴 시냇물 소리 같아서 / 한 번 식어지면 다시는 돌아올 줄 모르나보다
「황혼」 일부

유고를 정리해 펴낸 〈육사 시집〉

 

이듬해인 1934년부터 그는 ‘신조선사’ · ‘중외일보사’ · ‘조광’ · ‘인문사’ 등에 다니며 언론계에 종사한다. 아울러 1935년 『개벽』에 「위기에 임한 중국 정계의 전망」 · 「공인 깽그단 중국 청방 비사 소고」 같은 논문을 발표하고, 시와 시조 및 번역과 시나리오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나타낸다. 1937년에는 신석초 · 김광균 · 윤곤강 등과 동인지 『자오선』을 내고 여기에 「노정기(路程記)」 · 「교목(喬木)」 · 「파초」 등의 시를 발표하며, 이어 1939년 『시학』에 「연보(年譜)」, 『문장』에 「청포도」 등을 발표한다.

 

치열한 정치 활동과 지난한 항일 투쟁 속에서도 그는 문학을 통해 소망이나 신념은 호소하되 직설조의 구호를 토로하는 일은 거의 없다. 전통적이고 목가적인 어조와 더러 화려하게 느껴질 정도의 상징과 은유는 쓸지언정, 어릴 적에 익힌 한학과 가풍에서 비롯된 선비 정신, 그리고 베이징 유학 시절에 접한 중국 문학의 영향을 받아 그는 시에서도 지사적인 품위를 잃지 않는다. 따라서 그의 시는 유교적인 선비 정신에서 벗어나지 못한 주관적이고 정신적인 시로 비판받기도 한다. 그러나 어찌 보면 육사의 시는 이런 요소가 뒷받침된 까닭에 직설적 저항시들이 자칫 빠지기 쉬운 치졸함에서 헤어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신석초가 이육사를 처음 만난 것은 1935년 봄의 일이다. 서울 종로구 내수동에 있는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의 고가(古家)를 드나들 무렵이다. 정인보의 서재에는 묵은 한적(漢籍)이 꽉 들어차 있어서, 사람이 자리를 잡으면 책 속에 들어앉은 꼴이 된다. 정인보는 갸름하고 가무스름한 얼굴에 엷은 웃음을 띠고 서재에서 내방객들을 맞는다. “문장은 고금에 맹자(孟子)를 덮어 먹을 게 없단 말이야.” 하고 말문을 연 정인보는 맹자의 문장론과 사상론을 거쳐 보학(譜學)으로 넘어간다. 신석초는 동양 고전을 두루 꿰는 정인보의 해박함과 잔재미나는 말솜씨에 반해 앎의 법열(法悅)로 가슴이 벅차오르곤 한다. 바로 그 서재에서 신석초는 육사를 소개받은 것이다. 티끌 한 점 없이 맑고 깨끗한 둥근 얼굴, 상냥하고 관대하며 친밀감을 주는 눈과 조용한 말씨, 반듯한 매무새, 여기에 영남의 유학(儒學)으로 정신을 단련한 선비적 품격까지 갖춘 육사에게 신석초는 첫 대면 때부터 호감을 가진다.

 

이내 두 사람은 단짝처럼 어울려 다닌다. 한학과 중국 문학이 갖춘 격조와 규범의 영향을 보여주는 육사의 습작시를 읽으며 둘은 서로 감상을 나눈다. 육사가 루 쉰과 궈 모뤄(郭沫若)의 문학에 대해 얘기하면, 신석초는 자신이 빠져 있는 발레리의 시에 대해 얘기한다. 두 사람은 경영난에 허덕이며 사주 혼자 청탁과 편집, 경리까지 도맡아 하던 ‘신조선사’의 사무실에 나가 월간지 『신조선』의 편집일을 무보수로 돕기도 한다. 육사의 초기 대표작인 「황혼」은 이 잡지에 실린다. 신조선사는 정인보가 관여하고 있던 정약용 문집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의 간행을 맡은 곳이기도 하다.

1938년 친구 최용(왼쪽) · 신석초(가운데)와 함께 경주 불국사를 찾은 이육사

 

 

1943년 1월 1일, 서울은 새벽부터 온통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다. 이날은 양력 설이어서 시장이 열리지 않고 가게들도 문을 닫는다. 그러나 정작 신정을 쇠는 집은 없다시피 해서 명절 분위기는 나지 않는다. 설이라지만 이날은 방에서 뒹굴다가 낮잠이나 자면 그만인 ‘왜놈 설’인 것이다. 그런데 이날 아침에 이육사는 명륜동 신석초의 집을 찾는다.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육사는 대뜸 “얼른 나오게. 방에 궁상맞게 처박혀 있지 말고 답설(踏雪)하러 가세.” 하고 신석초를 재촉한다. “애들도 아닌데, 이 추운 날에 눈 밟으러 가자니······.” 신석초는 외출 채비를 하고 마지못해 따라나선다. “중국 사람들은 신정이면 답설 풍습이 있다네. 눈길을 밟으며 새해를 맞는 마음을 새롭게 하는 거지.”

 

두 사람은 청량리에서 홍릉 쪽으로 난 은세계 같은 눈길을 걷는다. 홍릉 임업시험장 나무들의 가지에 열린 눈꽃이 투명한 햇빛을 퉁겨낸다. “가까운 날에 난 북경엘 가려 하네.” 눈꽃에 시선을 꽂고 있던 육사가 무겁게 입을 연다. 신석초는 험난하고 위급해진 정세를 떠올리며 그의 베이징행이 뭔가 중대한 일과 연관되어 있음을 직감한다. 이날 신석초는 육사로부터 중국행을 권유받는다. 그러나 신석초가 망설이자 육사는 그 얘기를 다시 꺼내지 않는다. 몇 달 뒤 베이징에서 돌아온 육사는 1943년 6월 동대문경찰서 고등계 형사에게 체포되어 다시 베이징으로 압송된다. 1944년 1월 16일 오전 5시, 이육사는 마흔 나이로 이국 땅 베이징의 감옥에서 순국한다.(* 향년 39세)

 

이육사의 본디 이름은 원록(源祿)이다. 육사라는 이름은 그가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때 수인 번호가 64(또는 264)여서 그 차음(借音)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그는 1904년 4월 4일 경북 안동군 도산명 원천동에서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13대손인 이가호의 6형제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난다. 육사의 친가와 외가는 모두 창씨 개명과 신사 참배를 거부하는 등 일제에 항거한 집안인데, 그의 투철한 항일 의식은 이런 가풍 속에서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길러진 것이다. 이웃 사람들은 동네 복판에 자리잡은 오래된 기와집인 육사의 생가를 “참판댁”이라고 부른다.

 

육사는 어릴 적부터 형제들과 함께 할아버지로부터 『천자문』 · 『통감(通鑑)』 · 『소학(小學)』 등을 익히는데, 6형제 모두 재예(才藝)가 뛰어났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뒷날 문학 평론가로 이름을 날린 원조(源朝)가 재기 발랄했다. 육사는 형제들에 비해 다소 근엄한 편이었다. 하루는 원조가 글귀를 만들어 형인 육사를 놀려먹는다. 육사는 화가 치밀어 원조 쪽으로 책을 내던진다. 두 사람은 할아버지 앞에서 싸움의 발단을 설명하게 된다. 이 때 원조는 “책 속에는 공자와 뭇 성현이 계시거늘 책을 내던지는 것은 성현을 욕보이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형을 벌 주십시오.” 하고 육사를 궁지에 몰아넣는다. 그러나 이런 일은 아주 드물었고, 평소에 육사 집안 형제들의 우애는 소문이 날 만큼 각별했다.

 

육사의 항일 운동은 1925년부터 시작된다. 대구의 조양회관(朝陽會館)에서 애국 지사들과 함께 신문화 강좌를 연 것이 발단인 셈이다. 이듬해 봄, 그는 이정기(李定基)와 함께 베이징에 가서 지사들과 독립 운동이며 자금 모집 방법 등에 대해 협의하고 돌아온다. 그는 곧 백형 원기(源棋)와 숙제 원일(源一)과 함께 의열단에 가입한다. 1927년 네 형제는 장진홍(張鎭弘) 의사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투척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일경에게 검거된다. 네 형제는 폭탄 투척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달군 쇠꼬챙이로 지지기, 대꼬챙이로 손가락 사이 훑기, 거꾸로 매단 채 코에 고춧가루 탄 물 들이붓기 등 온갖 고문을 당한다.

 

이로 말미암아 가족이 옷을 들여보낼 때는 고문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피걸레 같은 옷을 대신 받아내곤 한다. 이런 와중에도 네 형제는 서로 “나를 고문하라.”고 대들어 일경을 곤혹스럽게 만든다. 그러나 육사를 포함한 네 형제는 이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다고 한다. 2년 6개월 만에 풀려나 요양을 하던 육사는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다시 검속되었다가 풀려난다. 이런 옥고를 거푸 치르면서 육사의 건강은 심하게 훼손된다. 아우 원조는 이런 육사의 건강을 염려해 “형님은 형무소 출입이 너무 빈번하니 형무소에 들어앉아서 무슨 독립 운동을 하느냐.”고 힐난하기도 한다.

 

1932년 이육사는 다시 중국 베이징으로 가서 10월 22일 조선군관학교 국민정부위원회 간부훈련반에 들어간다. 이듬해 4월 제1기생으로 조선군관학교를 졸업한 그는 상하이를 거쳐 신의주 쪽으로 입국한다. 일경의 요시찰 대상인 그가 어떻게 베이징을 제 집처럼 드나들 수 있었는지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겠다. 육사는 여러 종류의 신분 증명서를 갖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고위층이 신분을 보증한 것도 있었다고 한다. 하루는 차 안에서 고등계 형사의 불심 검문을 받게 되는데, 육사가 꺼낸 신분증을 보고는 형사가 깜짝 놀라 거수 경례를 하는 일도 벌어진다. 국경을 넘을 때 그가 이런 신분증을 적절하게 이용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1934년 조선군관학교 출신자 일제 검거 때 그는 일본 헌병에게 잡혀갔다가 7개월 만에 풀려난다. 1936년에는 만주 무단장(牧丹江) 쪽에 머물다가 귀국한 뒤 다시 검거되어 경성형무소에 수감된다.

 

이육사의 시는 웅장하고 활달한 상상력과 남성적이고 지사적인 절조와 품격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초기 시들은 다소 관념과 추상에 빠져 시적 깊이를 얻지 못한 데 반해, 「절정」 · 「교목」 · 「광야」 등의 작품으로 대표되는 후기 시들은 절제된 시어로 일제의 군국주의에 맞서는 강인한 저항 정신을 유감없이 표출한다. 「절정」에 나오는 “매운 계절의 채찍”이나 “서릿발 칼날진” 같은 시구는 식민지 지식인이 당면한 현실의 가혹함을 말해준다. 이처럼 암담하고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시인은 자신의 영혼과 의지를 더욱 가다듬어 “강철로 된 무지개”를 꿈꾸는 선비의 꼿꼿한 정신적 결기를 보여준다.

 

이육사 시가 아우르는 정신의 드높은 경지와 지사다운 절조는 그의 이름 앞에 붙는 ‘민족 시인’, ‘저항 시인’이라는 호칭이 결코 빈말이 아님을 입증한다. 그는 드물게 문학과 삶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일치한 사람이다. 일제 말기에 이 땅의 문인들은 대거 친일 대열에 끼여 제 잇속과 영달을 챙기는 데 급급하며 누추함과 비굴함으로 얼룩진 훼절의 삶을 산다. 이에 비해 고결한 정신과 올곧은 신념을 고스란히 행동으로 옮긴 이육사의 깨끗한 삶은 그가 남긴 시를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이육사는 생애를 통틀어 36편의 시밖에 남기지 않는다. 그것도 대여섯 편의 절창(絶唱)을 빼고는 태작(駄作)에 그친 느낌이어서 안타까움을 더한다. 천수를 누렸다면 그는 한국 문학사에 남을 만한 작품을 더 많이 남겼을 것이다. 그가 숨진 다음해에 우리 민족은 일제의 사슬에서 풀려난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10월 20일, 신석초를 비롯한 문우들에 의해 유고가 정리되어 『육사 시집(陸史詩集)』이 ‘서울출판사’에서 나온다. 1968년에는 고향인 경북 안동의 낙동강 언저리에 이육사 시비(詩碑)가 세워진다. 시비에는 생전의 행적과 시 「광야(曠野)」가 새겨져 있다. 「광야」는 시인이 죽은 뒤 시인의 아우가 수습한 이육사의 절명시(絶命詩)다.

 

까마득한 날에 / 하늘이 처음 열리고 /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 모든 산맥(山脈)들이 /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 차마 이 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 부지런한 계절(季節)이 피어선 지고 /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 지금 눈 내리고 / 매화 향기(梅花香氣) 홀로 아득하니 /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 이 광야(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경북 안동에 세워진 이육사 시비

 

이 시비는 1968년 세워진 최초의 이육사 시비다.

육사의 첫 번째 시비에는 육사의 시,  「광야」... ​

시비는  원래  낙동강변에 세워졌다.

 

 

안동댐이 생기면서 수몰의 위험이 있어 (현재로 위치로) 이건하였다.

광야를 달리던 뜨거운 의지여,

돌아와 조국의 강산에 안기라.

시비 뒷면의  비문 맺음말이다.

육사를 흠모해 격정적인 헌사를 쓴 이는 동탁 조지훈이다.

 

첫 문장도 아주 근사한데 옮기면 이렇다.

曠野를 달리는 駿馬의 意志에는 槽櫪의 嘆息이 없고

한마음 지키기에 生涯를 다 바치는 志士의 千古一轍에는 成敗와 榮辱이 아랑곳없는 법이다.

 

육사의 생가 자리에는 육우당이 있었다는 기념비와 함께 「청포도」 시비가 있다.

시비 뒤쪽으로 보이는 고택이 현재 이옥비 여사(이육사 고명딸)가 거처하는 목재고택이다.

이육사문학관 앞에는 육사 선생 동상과 함께 「절정」 시비가 있다.

안동에서 육사의 대표작인 「광야」, 「청포도」, 「절정」을 시비로 모두 만날 수 있다.

다른 지방 시비론  아래   포항 호미곶의 「청포도」 시비를 소개할 만하다.

포항의 지역 문인들은 이 작품을 육사가 포항에서 썼다고, 혹은 적어도 시상을 얻었다고 믿는다.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의 고택 임청각.

석주 선생의 손주며느리 허은 여사는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의 바람소리가』를 구술한 분이다.

9살 때 어른들을 따라 서간도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를 비롯한 항일투쟁하던 어른들 수발로 갖은 고생을 한 분이다.

허은 여사의 할아버지는 의병장인 범산 허형이고 아버지는 일창 허발이다.

범산 허형은 육사의 할아버지이기도 하고, 일창 허발은 육사에게 군자금을 대준 외삼촌이기도 하다.

 

석주 선생의 며느리는 목재 이만유의 딸인데, 목재 고택에 현재 이옥비 여사가 거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