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 설움, 백년설~

2024. 6. 2. 07:16The Story from Me

 

고려말 문인 문열공 이조년의 21세손  

백년설 白年雪 (본명 이창민, 1915~1980 )은 성주 출신으로

나라 잃은 민족의 설움을 달래준 '민족 가수' 이다.

 

 

본명은 원래 이갑룡(李甲龍)이었지만,

늘 이창민(李昌民, 성주이씨대동보) 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다 결국 1964년에 정식으로 개명했다.

1950년대에 작사가로 활동할 때엔 향노(鄕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었다.

 

 8.15 광복 이전의 작품이 현재 80여 곡 가량 확인되고 있다. 남인수와 같은 시대에 그와 쌍벽을 이루는 인기를 누렸다.

 

1914년 5월 19일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면(현 성주군 성주읍) 예산리에서 아버지 이형순(李瀅淳, 1887. 6. 20 ~ 1948. 5. 19)과 어머니 선산 김씨(1887. 4. 15 ~ 1918. 8. 3) 사이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22년 성주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고, 1928년에 졸업했다. 1929년 성주농업보습학교(現 성주고등학교)에 입학해 1931년에 졸업했다. 이후 경성으로 가서 한양부기학교에서 2년간 공부하다가 은행과 신문사에서 잠시 근무했다고 한다.

1938년에 시험삼아 녹음한 <유랑극단>이 다음해에 발매되었는데, 반응이 좋아서 가수가 되기로 결심을 했다고 한다. 1941년까지 태평 레코오드사 전속으로 있으면서 <두견화 사랑>, <눈물의 수박등>, <복지 만리>, <대지의 항구>, <일자 일루>, <나그네 설움> 등을 불러 당대 최고의 가수가 되었다.

 

1963년 7월에 은퇴공연을 하며 공식적으로 가수 생활을 끝냈다.

1967년부터 1970년까지 경향신문 일본지사장을 맡았다. 

 

1979년, 가족(아내와 자녀들)과  미국으로 이주

1980년 12월 6일에 타계했다.

 

대표곡

 

 2002년에 대한민국 문화훈장 보관장이 추서되었다.

 

 

백년설의 "두견화 사랑"은 장안의 소위 직업여성들로부터 단연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한다.

백년설이 공연을 마치면 모셔 가려고 기다리는 여인들이 줄을 이었고
그가 가는 곳엔 어디나 항상 푸짐한 술상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전설따라 삼천리다.

 

백년설. 심연옥 결혼(1955)



백년설이 태평레코드사 문예부장 박영호를 만나 가수가 된 것은 그에겐 일생일대의 행운과 함께 전환기라고 볼 수 있다.

이재호, 전기현 등 내로라하는 작곡가와 가수들로 태평연주단을 구성해 국내는 물론 멀리 만주 지방까지 순회공연을 다녔다. 백년설이 지방공연에 떴다 하면 어디나 수많은 관객이 몰려 인산인해를 이루는 것만 봐도 그의 인기를 가늠할 수 있었다.

1941년 초 대구 공연 때의 일이다. 대구는 그의 고향인 성주와 가까울 뿐만 아니라 그 무렵이 그의 히트곡 나그네 설움과 번지 없는 주막의 노래가 절정에 달했던 때였다. 그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보기 위해 공연장은 초만원으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공연 도중 객석에 있는
여학생에게 한 눈에 반해
끈질긴 구애 끝에 결혼


백년설은 그 날 무대에서 관객들을 훑어보며 열창하다 한 무리의 검은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에게 시선이 고정되었다. 여러 명 가운데 유난히 눈길을 끄는 학생이 하나 있었다. 그가 지금까지 화려한 가수 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여성들 속에 둘러싸이다시피 했었지만 지금 그의 앞에 나타난 여학생에 비견할 만한 여인은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다. 한눈에 반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리라.

공연이 끝나고 백방으로 수소문 끝에 경북고등여학교의 이한옥 학생이라는 사실을 어렵게 알아낼 수 있었다.

다음 날 상경도 미룬 채 그녀의 뒤를 밟던 중 어렵게 그를 만났지만 그때마다 도망치듯 피하기만 하고 백년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애간장을 태웠다. 당대의 최고 인기가수로서 무대에서는 만인의 심금을 울리고 박수를 받는 그였지만 한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아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자가용이라고는 없던 시절 기동력을 위해 대구시내에 단 3대뿐인 영업용 택시 한 대를 한 달 동안 전세를 내어 그녀의 뒤를 쫓았다. 어느 날 마침내 그녀의 부모님을 찾아가 정중하게 청혼을 했다. 그녀의 집안은 대구에서도 소문난 명문가였다. 그녀의 부모님은 단호하게 거절했지만 결코 좌절하거나 물러서지 않고 한 달여를 그녀의 뒤를 쫓아다니던 어느 날 마침내 그녀를 택시에 태우는데 성공해 데이트할 기회를 얻었다. 그 날 끈질긴 구애 끝에 결혼 동의를 얻어내는 집념을 보여 마침내 뜻을 이뤘다.  1941년 당시, 백년설은 26세, 이한옥은 18세였다. 생전에 이한옥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그녀는 쳐다보기만 해도 황홀하여 눈이 부신 대단한 미인'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슬하에 1남 3녀 두었으나
결핵으로 일찍 사별 후
당대 인기가수 심연옥과 재혼


이한옥은 학창시절에 문학에 관심이 많아 문학서적을 많이 탐독했다. 학창시절부터 써오던 일기를 결혼 후에도 계속 쓴 덕분에 문장력이 뛰어나고 글씨도 잘 썼다고 알려져 있다.  당대의 유명 시인 이육사(李陸史)로부터 선물로 받은 미발표 詩 몇 편과 함께 그 많은 일기장을 친정어머니가 엿장수에게 주었음이 밝혀져 모녀 간에 한동안 갈등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슬하에 가실, 명자, 수경, 세 딸과 아들 일정을 두었으나 1951년 결혼 10년 만에 이한옥은 젊은 나이에 결핵이 악화돼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이 때 딸 셋은 각각 10살, 7살, 5살이었고, 아들 일정은 겨우 3살이었는데 4남매가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상처(喪妻)하고 4년 후, 1955년 당대의 인기가수 심연옥과 재혼하여  부부는 1957년경부터 '여호와의 증인' 종교에 심취했다고 알려졌다.

심연옥과 사이에 딸 혜정과 아들 길영을 낳았고, 백년설은 1963년 서울 광화문 시민회관에서 은퇴공연을 끝으로 가수활동을 접었다.

1978년 미국 로스엔젤레스로 이민을 떠났으며, 투병 2년 후 1980년 12월 6일 65세를 일기로 미국에서 파란 많은 생을 마감했다. 미망인 심연옥은 현재 자녀들과 미국에 살고 있다.(*2021년 10월 4일 미국 죠지아에서 별세, 향년 93세)

백년설이 젊은 시절부터 시작한 냉수마찰은 평생을 계속했고, 유도가 5단으로 단단한 체력이었지만 말년에 얻은 병을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얼마 전 96세로 타계한 작사가 겸 가수 반야월 선생은 생전에 "백 선생은 종교적인 이유로 수혈을 거부하여 너무 일찍 타계했다"고 무척이나 안타까워했다.


 [성주신문] 2012년 12월 26일(수) ~ 발췌

 

 

백년설 노래비

그의 모교, 성주 농업보습학교(현 성주고등학교) 교정

 

성주 성밖숲에 있는 백년설(白年雪, 본명李甲龍) '나그네 설움' 노래비

 

* 심연옥님의 부군, 백년설님은 나그네 설움, 두견화 사랑, 번지없는 주막집 등 을 노래한 민족의 절창으로

 1979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1980년에 타계하였다.  2021년 부인 심연옥님도 타계하였다.

 

 

 

시골에서 무작정 상경한 17세의 소년, 이창민은 증권회사의 외무사원이 돼 서울 거리를 매일 헤메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술자리에서 한 곡조 부른 노래가 인연이 돼 콜롬비아 레코드에서 노래 테스트를 받게 됩니다. 

 

'두견화 사랑` 은 장안 홍등가의 인기를 몽땅 백년설에게로 쏠리게 했다는 노래 입니다.

거리를 떠도는 한낮 무명 청년으로 부터 일약 가요계의 왕자로 등극하게 한~

진달래 사랑~~~

 

두견화(杜絹花)사랑 / 백년설(白年雪)

 

1939년 

작사 천아토(千亞土) / 작곡 전기현(全基現) 

https://www.youtube.com/watch?v=UhOaLUW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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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설의 에피소드

 

 

#1. 1950년대 중반 백년설은 이승만 대통령 생일을 축하하는 장소에 초청받았다.

평소 이 대통령이 그를 좋아하고 아주 신임했기 때문이었다.

소수 측근들만이 참석하는 조촐한 자리에서 그는 뜻밖의 제의를 받았다.

측근 보좌관이 백년설을 국회의원으로 공천하도록 대통령에게 진언한 것이다.

백년설이 정계로 진출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자신은 국회의원으로서 자격이 없을 뿐 아니라 일평생 노래만 부를 것이라며 단호하게 거절했다는.

또 백년설은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도 생일 축하 초청을 받은 일이 있었다.

그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권력의 서슬이 시퍼렇던 그 시절 청와대의 초청을 거절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주변에서는 그가 큰 봉변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별일 없었다.

그는 성격이 대쪽 같았고 한번 결정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권력에 눈치 보며 아부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2. 큰 형인 이판룡씨가 1956년 사망했을 때였다. 백년설은 연락을 받고 급히 고향 성주로 향했으나

상가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문상객과 마을 사람들이 대문 앞을 막으며 ‘노래를 한 곡 먼저 불러주고 가라’는 것이었다.

백년설은 문상을 하고 나서 노래를 부르겠다고 설득했으나 막무가내였다. 화를 내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백년설은 형 상가 앞에서 ‘한잔 술에 한잔 사랑’을 부르고 나서야 상가에 들어갈 수 있었다.

#3. 화류계에서도 백년설의 인기는 대단했다. 지방공연을 마치면 그를 초청하고자하는 기생들이 보낸

인력거가 극장 앞을 가득 메우고 있어 슬쩍 빠져나가 혼자 술을 마셔야 할 정도였다.

목소리만 있으면 주머니에 돈 한 푼 없어도 진수성찬이 항상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김순재 언론인

 

 

 

 

  백년설을 기리는 노래비와 흉상.

맨 왼쪽부터 성밖숲 노래비(1992), 성주고 교정의 흉상과 노래비(2009), 성주이씨 유허지에 세운 노래비(2011).

'민족가수'는 흉상 앞에 세운 추진위원회 빗돌에 새겨진 글귀다.

 

고려말 문인 이조년의 후손  백년설(본명 이창민, 1915~1980 )은 성주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에   '나그네 설움'  '번지 없는 주막' '고향설' 등 수많은  노래를 통하여  민족의 애환을  달래준  '민족가수'다.

 

나그네 설움 - 백년설

1940

조경환 작사, 이재호 작곡

 

https://www.youtube.com/watch?v=FoV01rYd8lE

 

 
별고을 성주(星州)가 낳은 '나그네 설움' 백년설님,
나라 잃은 민족의 설움과 삶과 애환을 달래주신 민족 가수~!
님은 가고 없어도 님이 남겨주신 민족의 노래는
민족의 삶과 애환과 함께 이땅에 영원히 흐를 것입니다.
 
님 가신 하늘 나라
영롱한 별이 빛나는 밤이면 밤마다
고향 별고을 내려보시고
고향 꿈에 포근히 잠드시오소서~!!!

 

님께서 남겨주신 아름다운 선율~

 

님의 발자취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