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 NAMC YS-11기 납북사건(1969.12.11)

2024. 8. 3. 10:24History & Human Geography

 

 

대한항공 YS-11기 납북 사건

대한항공 YS-11기 납북 사건(영어: Korean Air Lines YS-11 hijacking)은

1969년 12월 11일 대한항공의 YS-11 국내선  여객기가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 일대 상공에서  북한의 지령을 받은  헌병 출신 고정간첩  조창희에 의해

북한 함경남도 정평군의 선덕비행장에 강제 착륙당한 사건이다.

 

대한항공 NAMC YS-11기 국내선 여객기 자료사진.

사건의 진행

1969년 12월 11일 오후 12시 23분, 승객 47명과 승무원 4명을 태우고 강릉을 출발하여 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의 YS-11 국내선 쌍발 여객기는  대관령 상공을 지나고 있었다.

 

강릉 비행장을 이륙한 지 10여분 후  강원도 대관령(평창군강릉시) 일대 상공에서 갑자기 객석 맨 앞자리에서 일반 승객인 척 앉아있던 고정 간첩 조창희가 권총을 들고 조종실에 뛰어들었다.

 

비행기는 그때부터 북쪽으로 기수를 틀게 됐다. 기내에서 총격은 없었다. 여객기는 그대로 휴전선을 통과해 오후 1시 18분쯤 북한 함경남도 정평군의 선덕 비행장에 강제 착륙했다.

 

긴급 출동한 북한기 2대가 비행기를 선덕 비행장으로 유도했고, 비행기가 착륙하자마자 여객기를 납치한 범인 조창희가 제일 먼저 내려 미리 대기하고 있던 검은 세단에 타고 모습을 감췄다.

 

사건 발생 후 약 30시간이 흐른 12일 오전. 북한 평양방송은 착륙 지점을 밝히지 않고  KAL YS-11기가 두 조종사의 자진 입북으로 북한에 도착했다고 보도했다.

 

12월 22일 유엔사가 요청한 '군사정전위원회 비서장회의'가 판문점에서 열려 납북된 사람들과 여객기 기체의 송환을 요구했지만 북한은 UN군이 개입할 사안이 아니라며 거부하였다.

 

대한민국은 일본 적십자사 및 국제적십자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북한과의 협상을 성사시키려 하였지만 북한은 이에 응하지 않았고 사건 이후 대한민국 각지에서 북한을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으며 12개국 주요 항공사에서 이 사건에 대해 규탄한다고 밝히기도 하였다.

 

그런데도 북한은 12월 24일 '조종사 환영 시민대회'를 열어 정치 선전 조작극을 벌이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1970년 2월 5일 , 납치 55일 만에 승객을 송환하겠다고 한국 정부에 통보해 왔다.

 

그러나 북한은  이 중 승무원(조종사 2명 등 총 4명)과 승객 8명(범인 조창희 포함)은 송환을 하지 않겠다고 밝혔고, 대한민국 정부는 전원 송환을 요구하며 송환 협상을 벌였다.

 

결국 납북 66일만인  1970년  2월 14일  판문점을 통해서  승객 39명만 송환받고 사건이 종결되었다.

기장(유병하), 부기장(최석만), 승무원 2명(성경희, 정경숙)과 승객 7명 등 11명은 판문점을 통해 남쪽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북한에 억류됐다. 11명 중에는 특히 지식인이 많았다. MBC PD(황원), MBC 기자(김봉주) 등.

 

이 사건 이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국무회의 의결로 '항공기 탑승객에 대한 검문검색 강화', '공항 직원에 대한 사법권 부여', '민간항공기 승무원들의 무기 휴대 허용', '항공기 승객의 익명 및 타인 명의의 사용 금지' 등의 한층 강화된 항공기 보안 대책을 수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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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2월에는 송환되지 못한 승무원 중 한 명이었던 성경희씨가  제3차 이산가족 방북단으로 평양을 방문한 자신의 어머니 이후덕씨와  극적인 모녀 상봉을 이루었다. 북한에서 조선노동당의 지시로 강제로 결혼당해  자녀도 낳아 원치 않게 그곳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임영일(김일성 종합대학 교수)과 결혼 1남 1녀를...

 

딸 성경희(成慶嬉)씨와  어머니 이후덕(李後德)씨 모녀의 만남

출근 후 갑자기 사라진 딸..32년 만에 가족을 만난 납북 승무원

https://www.youtube.com/watch?v=esZaP5nnhxk

 

수사 결과

1970년 2월 15일 중앙정보부와 치안국은 육군 헌병 준위로 제대한 후 북과 접선한 조창희가 '한창기'라는 가명을 사용해 대한민국에서 고정 간첩 활동을 하다가 북한의 지령을 받고 항공기 납치 월북을 계획했으며, 승객으로 비행기 앞쪽 좌석에 앉아있다가 이륙한 지 약 10분 후 조종사를 권총으로 위협해 납북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고 발표했다. 이는 송환된 피랍자들에 대한 조사 결과 밝혀졌다.

 

사건 당시 북한 공작원 조창희는 육군 준장 계급장을 단 제복을 입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당연히 받아야 할 보안 검색을 받지 않은 채 VIP 대우로 탑승했다고 한다. 

 

假名(가명)·마스크쓰고  20일동안계획…구석에숨었다 제일먼저 搭乗(탑승)…왼쪽 맨앞자리에 앉아 趙昌熙(조창희)의정체

경향신문 | 1970.02.16 기사(뉴스)

 

 

대한민국 내무부 치안국은 사건 직후인 1969년 12월 15일 탑승자들의 가정 환경과 과거 행적에 관한 기관의 신상조사 특히 이른바 '용공' 사찰 등을 취합한 후, 북한 방송이 '조종사 유병하가 납북을 주도했다'고 밝힌 것과는 달리 '승객 중 강릉에서 병원을 운영하던 서울대 의대 출신 채헌덕'이 범인이라며 '그가 오랜 기간 치밀한 계획으로 조창희와 부조종사 최석만을 포섭해 여객기를 납북시켰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는 제대로 된 수사가 이뤄지지 않은 채 월남민 출신이고 북에 가족이 있어서 기관에 연행된 적이 있는 공군 군의관 출신 채씨를 주모자로 몰고  다른 2명의 군출신자를 엮어 짜맞추기로 억지 소설을 쓴 엉터리 발표였다.

 

 1970년 2월 15일 발표에서는 주범으로 지목됐었던 채헌덕과 부조종사 최석만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이젠 누명벗어" ═蔡憲德(채헌덕)·崔石滿(최석만)양씨

동아일보 | 1970.02.16 기사(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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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훈 당시 대한항공 사장은 내무부의 초기 수사 발표 다음날인 12월 16일 기자회견을 통해 "내무부장관과 치안국장이 '확증은 없으나 추리에 의한 추정이다. 15일 발표는 수사진행 상황을 비공식적으로 밝힌 것 뿐'이라고 내게 말했다. 최석만 부조종사는 결코 납북사건에 관련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경찰 발표를 반박했고, 이는 2개월 후 송환 피랍자 조사 발표로 확인되었다.

 

間諜(간첩) 趙昶熙(조창희)의 単独犯行(단독범행)

조선일보 | 1970.02.17 기사(뉴스)

 

당시 야당이었던 신민당은 "이 사건이 간첩 조창희의 단독 범행임이 드러남으로써 그동안 당국이 벌였던 수사나 납북 직후의 발표가 얼마나 졸렬했느냐는 것이 증명되었다"며 내무장관과 수사 책임자들의 문책을 요구하였다.

 

최초의 하이재킹 'KAL기 납북 사건' 그리고 11명이 돌아오지 못한 이유

https://www.youtube.com/watch?v=SWdJEw6sydg

 

Dec 5, 2022

#이만갑 #북한 #납북

 

69년 대한항공 YS-11기 납북 사건

그리고 미처 돌아오지 못한 11명의 납북자

이들이 돌아오지 못한 이유는?

 

대한항공 KAL기 납북 사건! 66일간 북한에서 납북자들에게 무슨 일이?

https://www.youtube.com/watch?v=ZGFo2xXBOa0

 

뒤바뀐 합의로 '전원 송환'하지 못했던 YS-11기 납북 사건

열한 명의 승객과 승무원은 아직 생사도 모른 채 북한에 억류

그들을 아직 기다리는 애타는 가족들의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