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7. 1. 12:40ㆍHistory & Human Geography
묘비도 없는 '밀정' 주인공 김시현 묘.. 그는 왜 서훈 못 받았나
[김종훈 기자]
▲ 경북 예천군에 자리한 독립운동가 김시현 선생의 묘. 비석 머릿돌만 덩그러니 놓여있다.
"그런데 그건 왜 묻는가?"
지난 2일 오후, 경상북도 예천군 호명면 직산리에서 만난 노인은 경계의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 알고 여기에 찾아 왔냐"라며 "이름난 독립운동가의 묘는 맞지만 나라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저 너머에 모셔졌다"라고 말을 이었다. 그러면서 노인은 "혼자서는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며 "아무런 표식도 없고 이름도 새겨져 있지 않다"라고 설명했다.
무덤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2016년 개봉해 관객 750만 명을 동원한 영화 <밀정>의 실제 주인공인 독립운동가 김시현 선생의 묘다. 이 작품에서 배우 공유는 김시현 선생을 모델로 한 의열단원 김우진을 연기했다.
영화에서처럼 선생은 1923년 초 독립운동사상 최대 규모의 무기밀반입 거사를 준비한다. 그러나 목숨을 걸고 무기를 반입해 국내에 들어왔지만 거사를 진행하기도 전에 체포된다. 밀정 때문이었다. 그 과정에서 검거된 선생은 10년형을 선고받았다. <밀정>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지만, 선생의 독립운동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1929년 출소한 선생은 곧바로 중국 만주로 망명해 그곳에서 독립군양성소 설립을 추진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중국 관헌에 체포돼 고초를 겪는다. 이후 중국 본토로 이동해 약산 김원봉을 다시 만나 의열단원으로서 재결합한다. 1932년 의열단이 난징에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설립하자 선생은 베이징에서 학생을 모집하며 배신자를 처단하는 활동을 이어갔다. 그의 손에 이끌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학한 이가 '광야'와 '청포도'의 주인공 시인 이육사다. 두 사람은 모두 안동 출신이다.
후배들을 양성하고 밀정을 처단하는 과정에서 선생은 다시 한 번 일제에 체포돼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나가사키형무소에 수감된다. 1939년에야 출옥한 선생은 이듬해인 1940년 다시 베이징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전개한다. 하지만 1941년, 선생은 다시 체포돼 일본영사관 구치감에서 1년간 미결수로 생활해야 했다. 이후 병보석으로 겨우 풀려난 선생은 다시 베이징으로 탈출했고 항일민족전선군을 조직하고 노력하다 1944년 베이징 헌병대에 다시 체포돼 수감생활을 이어가야만 했다. 그리고 1945년 해방과 동시에 자유의 몸이 됐다. 당시 그의 나이는 이미 환갑을 훌쩍 넘긴 63세였다.
▲ 미서훈 독립운동가 김시현 선생
선생은 해방 직후 재일 및 재중 동포들을 위한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면서 조선독립운동사 편찬 발기인으로도 활동했다. 의열단 동지이자 일본의 심장 도쿄에 폭탄을 던졌던 김지섭 지사의 사회장 장의집행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1947년 선생은 민족자주연맹과 좌우합작위원회에 각각 중앙위원과 확대추가위원으로 가입하기도 했다. 1950년 제2대 민의원 선거에 고향 안동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출마, 당선됐다.
그리고 1952년 6월 25일이 됐다. 임시수도 부산에서 '6·25 2주년 기념 및 북진촉구 시민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오전 11시께 이승만 대통령의 연설이 중간쯤에 이르렀을 무렵 단상 귀빈석에 앉아 있던 양복 차림의 한 노인이 갑자기 연단을 향해 뛰어나가며 이 대통령의 등을 향해 권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은 발사되지 않았다. 노인은 현장에서 체포됐다. 그는 대구 출신 의열단원 유시태였다. 다음날인 6월 26일 당시 이범석 내무장관은 유씨의 배후인물로 의열단 출신 국회의원 김시현을 체포했다. 당시 선생의 나이는 칠순에 달했다.
1952년 제2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1952년 1월 절대 다수의 반대로 부결되자 이승만은 백골단 등 폭력조직과 관제 데모대를 동원해 연일 시위를 벌였다. 같은해 7월에는 국회의원을 연금시키고 테러를 벌이면서 이미 부결된 대통령직선제를 골자로 한 '발췌개헌안'을 끝내 통과시켰다. 앞서 1948년 10월에 결성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도 1949년 6월 6일 이 대통령에 의해 반민특위 특별경찰대가 강제 해산당하면서 사실상 기능을 상실한 뒤 같은해 10월에 완전히 해체됐다.
당시 선생은 "민족을 버리고 간 놈이 무슨 대통령이냐, 역적"이라면서 "처단해야 한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노구의 의열단원은 결국 이 일을 결행했던 것. 하지만 이 일로 인해 선생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다시 감옥에 갇힌다. 그리고 8년 뒤인 1960년 4.19혁명을 거친 뒤에야 석방됐다. 선생의 나이 78세에 있었던 일이다.
▲ 독립운동가 권애라 김시현 부부
선생은 1966년 서울 불광동 자택에서 향년 84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그러나 그의 말년은 가난의 연속이었다. 1964년 6월 <동아일보>에 '가난에 허덕이는 독립투사'라는 제목으로 실린 선생의 기사 중 일부다.
"옥고 30년, 팔순의 김시현옹이 전셋돈을 마련하지 못해 쫓겨나게 생겼다. 그는 무상배급 밀가루로 연명하고 있다. 불광동 산비탈 단칸방에 전세 들어 살고 있으나 이달 말 그 셋방마저 내놓게 되었다. 기거가 부자유해 누워서 지낸다는 김옹은 '아직 정부의 별다른 혜택을 받은 건 없으나 오는 8월쯤 원호대상에 든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그날만 기다리고 있다."
스스로를 원호대상에 들 것이라 기대했던 선생은 2021년 현재까지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일생을 조국의 독립과 민주화를 위해 싸운 인물이건만 이승만 대통령 저격미수 사건의 관련자라는 이유로 번번이 서훈 심사에서 탈락하고 있다. 상훈법 제8조에 "사형, 무기 또는 1년 이상의 징역이나 금고의 형을 선고받고 그 형이 확정된 경우에는 서훈이 취소된다"라고 명시돼 있기 때문이다.
이후 선생의 후손이 수차례 보훈처에 서훈을 요청했지만, 선생에 대한 심사는 단 한 번도 통과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전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관장이자 책 <김시현>을 쓴 안동대 김희곤 명예교수는 6일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현재의 상훈법이 바뀌지 않는 이상 선생에 대한 서훈은 불가능한 일"이라면서 "나도 여러 차례 이의를 제기했지만 혹여 보훈처 심사를 통과한다 해도 행안부 신원조회에서 걸려 바로 취소될 수밖에 없다. 민주화 유공자가 될 수 있는 방법도 모색해 봐야 한다"면서 아쉬움을 표했다.
2017년 선생의 묘를 찾아 '묘비가 없다'는 사실을 온라인 상에 알린 홍순두 충북교육청 장학관도 <오마이뉴스>에 선생의 묘소에 비석과 알림판 등을 세우는 문제에 대해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지 못한 상태니 정부나 단체로부터 경제적인 지원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며 "후손들이 비석과 표지판 등을 자체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니 어려움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더 많은 분들이 선생에 대해 알고 찾아와야 현실을 바꿀 수 있지 않겠냐"라고 설명했다.
<오마이뉴스> 확인 결과 해당 군청은 선생이 서훈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선생이 떠난 지 7년 뒤인 1973년 부인 권애라 지사는 사망했다. 권 지사는 1919년 3월 1일 유치원 교사로 근무하며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권 지사는 이화학당 후배 유관순과 함께 수감생활을 했다. 출소 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간 그는 1922년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서 김시현 선생을 만나 불꽃같은 연애를 한 뒤 결혼한다. 선생은 아내 권애라를 평생토록 '동지'라고 불렀다. 마지막 가는 길에도 "권 동지, 미안하오. 내가 조국독립을 위해 몸바쳐 투쟁했는데 반쪽 독립밖에 이룩하지 못했소. 남은 생을 조국통일 사업에 이바지해주오"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다.
권애라 지사는 1990년에야 서훈됐고 1995년 10월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 464번 무덤에 안장됐다.
오마이뉴스(시민기자),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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