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왜 이리도 깊고 아픈 것이냐

2025. 1. 30. 05:24Korean Arts

 

사랑은 왜 이리도 깊고 아픈 것이냐

박목월-이별의 노래

 

오후 五시 三분. 갑자기 내 시계가 그 시각에 멎어버렸다.

-<구름에 달 가듯이>

 

인간의 삶이 크고 작은 사건의 뒤엉킴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은 탄생과 죽음일 것이다. 그리고 탄생과 죽음 이 지닌 기쁨과 슬픔의 무게와 버금가는 사건이 사랑일 것이다.

 

연인과 광인과 시인은 동일한 존재라고 한 셰익스피어의 말처럼 사랑 에 빠진 자는 광적이며, 시적인 생의 한때를 경험한다. 사랑에 빠진 자 는 그의 모든 에너지를 사랑의 순간에 바침으로써 평면적 시간을 직립시 키고, 그 속에서 기적처럼 발견되는 최상의 아름다움에 도취한다.

 

이 격렬하고도 열정적인 영혼의 상태는 언어 이전 혹은 언어 이상의 신비를 내장하고 있는 파토스(pathos)의 세계이다.

 

이성적 판단과 내면적 질서를 가차없이 무너뜨리는 이 혼돈은 일상 밖으로 무한히 뻗어 가는 마술적 힘의 존재성을 유감없이 깨닫게 해준 다. 언제나, 누구에게나 사랑이 '지금-여기에-최초로' 발생하는 사건으 로 경험되는 것은 사랑이 지닌 교감의 에너지를 아무도 온전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여기에-최초로'라는 기분은 사랑이 지닌 기쁨과 환희만이 아 니라 사랑이 지닌 고통과 슬픔에도 해당된다. 풍부하게 넘쳐나던 시간은 흘러가고 그것과 비례하여 생겨난 공허와 외로움을 다시 껴안아야 하는 것이 사랑이 내포하고 있는 본질적 속성인지도 모른다. 삶이 죽음이라는 사건을 포함하고 있듯이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별은 '지금-여기에- 최초로' 나에게 주어진 고통이며 아픔이다. 박목월 시인의 <이별의 노 래>는 이와 같은 사랑과 이별의 체험을 바탕으로 쓰인 시이다.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서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한낮이 기울며는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우리라.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대구 피난지에서 작곡가 김성태가 곡을 붙인 것으로 알려진 이 시는 가을이면 가곡의 무대에서 어김없이 불리는 애창곡 가운데 하나이다. 노 래로 불린 박목월의 시로는 이것 이외에 <그리움> <나그네> <달무리> <사월의 노래> 등이 있다.

 

한편 <이별의 노래>는 이 노래가 쓰인 직후에 발간된 시집 <산도화> 에 실려 있지 않으며, 이후 발간된 목월의 다른 시집에도 실려 있지 않 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이 노래를 부르면서도 이것이 목월의 시 라는 사실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 노래가 쓰이게 된 동기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최근(2002년 1월 22일) 이근배 시인이 <중앙 일보>에 <문학동네에 살고 지고...>라는 글을 연재하면서일 것이다. 물 론 그 이전에 임헌영 선생이 <그리운 곳 차마 그리운 곳>에서 이 노래의 배경담을 털어놓은 적이 있긴 하다. 이근배 시인에 의하면 이 노래가 쓰 인 동기는 다음과 같다.

 

대구로 피란 내려가서 있던 53년 봄, 목월은 교회에서 서울의 명 문여대생 H를 만난다. 시인과 시를 좋아하는 문학소녀와의 만남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다음해 환도와 함께 H는 서울로 올라오면서 자 연스럽게 가까워진다. 목월은 H의 태도가 존경을 넘어서 이성의 사 랑으로 싹트는 기미가 있자 후배시인에게 H를 잘 설득할 것을 부탁 한다.

(중략)

그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올 때 목월은 어디론가 잠적하게 된다. H 와 제주에서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은 뒤에 알려지고 그 사랑의 도피생 활이 넉 달째 들어섰을 때 부인 유익순 여사가 제주를 찾아간다. 새 로 지은 목월과 H의 겨울 한복과 생활비로 쓸 봉투를 들고. 끝내 목월은 H와 헤어지고 서울로 돌아온다. 김성태곡으로 널리 애창되는 목월의 시 '이별의 노래'는 그 H를 두고 지은 것이다.

 

 

이근배 시인이 밝히고 있는 사실에 좀더 첨가하자면 H는 다만 시를 좋아하는 문학소녀가 아니라 목월의 제자였다는 얘기와 더불어 목월이 H와 제주도에 머물 때 H의 아버지가 제주도에 와서 목월을 들판에 있는 나무에 묶어 놓고 떠났다는 얘기도 있다. 이때 쓸쓸한 들판과 하늘을 보 며 이 시의 영감을 떠올렸다고도 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목월 스스 로 고백하고 있는 글에 따르면 이와는 사뭇 다르게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가 쓴 산문집 <구름에 달 가듯이>에 실려 있는 글에 따르면 H는 연 한 하늘빛 갑사치마를 입은 '그녀'로 묘사되어 있으며, 중병을 앓고 있 는 여인으로 회고되고 있다. 그리고 그녀에게 말을 높이는 것으로 보아 그녀는 제자 이상의 연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목월은 그녀가 제자라는 사실을 감추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감추고 싶었지만 또 그와 반대로 자 신의 사랑을 고백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자기 평생에 가장 소중한 이름 하나를 감출 줄 모르는, 헤프고 어리 석은 바보도 없을 것이다. 또한 그것이 귀하면 귀할수록 감추려는 것이 보물을 간수하는 태도이다. 대체로 소중한 비밀 한두 가지를 가슴에 간 직해 두지 않고, 허전해서 어떻게 살 수 있을 것인가"라고 이 글에 서 비밀에 대한 자신의 이율배반적인 감정을 고백하고 있다.

 

어느 것이 맞는 얘기일까? 나는 이 글에서 이 연애담의 진위 여부를 가리고자 하지 않겠다. 파파라치 역할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나 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조금씩 다른 얘기들이 이 시를 둘러싸고 있다는 사실이다.

 

비밀스러운 사랑이란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사람들은 늘 비밀을 알 고 싶어하고, 타인의 것이든 자신의 것이든 사랑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 한다. 이미 열렬한 사랑을 경험해본 자에게도 사랑은 여전히 매혹적인 대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간에 떠도는 사랑담은 마치 구전문학처럼 보 태어지고 덜어지고 변형되면서 때로 잊혀지기도 한다. 사실과 추측과 해 석이, 나아가서는 오해와 억측이 뒤섞이면서 서사화되는 것이 사람담인 것이다. 그것을 막을 길은 없다. 비밀스러운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고 있 는 당사자의 얘기조차 보태어지고 덜어지고 변형시키는 과정을 벗어나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건 은밀한 발설이기 때문이다. 명백하게 다 말해 질 수 없는 것이 사랑의 본질이라면, 사람들이 사랑에 지치지 않고 끌리 는 것은 사람들이 외롭기 때문이며, 그 외로움이 다 말해질 수 없는 이 같은 사랑의 본성에 몸을 담그기 때문이다. 사랑이 영원한 환상일 수 있 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사랑을 아는 자가 더 외로운 까닭 또한 여기에 있다.

 

30대 후반에 목월에게 찾아온 사랑을 그는 '엄청난 운명'이었다고 말 한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별은 곧 죽음과 다름 없"다고 말하면 서 이 운명의 마지막 장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나는 기독교 신자라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이 괴롭고 처참한 고뇌 로 차 있을수록 내세는 절박하게 실감되며 다가오는 것이다. 만일 내세를 믿지 않으면, 오늘의 괴로움을 무엇으로 이겨낼 것인가. 그녀는 크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그 희고 가는 두 손을 내게 맡겼다. 나는 그녀의 손을 깊이 깊이 내 가슴 속에 보듬어 안았다.

 

이튿날, 오후 五시 三분. 갑자기 내 시계가 그 시각에 멎어버렸다.

 

사랑에 빠져 있는 자가 시간의 절정을 맛보며 자기의 고독과 삶의 의 미를 온전히 그 안에 헌납한다면 이별한 자는 그 절정으로부터 미끄러져 텅 빈 시간의 껍질과 만나게 된다. 정지한 시간, 더 이상 무가치한 시간, 아무것도 생성될 것 같지 않은 죽음의 시간을 이별한 자는 견뎌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일상으로 귀환하지 못한다. 일상의 단조로 움과 규칙성은 그의 몸살이나 고통과 무관한 것처럼 여겨진다. 아무것에 도 몸담을 수 없는 이 비어 있음의 시간은 지나간 사랑의 추억을 거듭 기 억하며 자기의 슬픔을 스스로 달래야 하는 외롭고도 쓸쓸한 생의 한때이 다. 이는 사랑이 남겨준 또 다른 시간인 것이다.

 

목월의 <이별의 노래>는 그런 시간에 만들어진 노래이다. 이별 뒤에 비워진 쓸쓸한 마음을 그는 "기러기 울어예는 / 하늘 구만리"라고 노래 한다. 기러기떼들이 울며 떠나는 그 광활한 가을 하늘을 홀로 바라보며 그는 이별의 아픔과 그 속에서 밀고 나오는 눈물을 '아아 너도 가고 나 도 가야지'라고 노래한다.

 

"결코 동요하거나 울지 않았다. 엄청난 운명에 직면하면 사람은 누구 나 침착해지는 것이다(눈물은 나머지 날을 채울 수 있는 전부가 아닌 가)"라고 산문에서 고백한 것처럼 이 노래는 그가 나머지 날을 채운 전 부로서의 눈물이다.

 

그는 이 눈물의 힘으로 내세에 그녀의 희고 가는 두 손을 깊이 깊이 가슴 속에 보듬었을지도 모른다. 목월이 남긴 <이별의 노래>를 천천히 음미하는 동안 이 계절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다. 왜 사랑은 이리 도 깊고 아픈 것인가.

 

-엄경희의 행복한 시 읽기 <아침과 저녁 사이 시가 있었다> 중에서

 

https://www.youtube.com/watch?v=Qs5jHPMM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