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바람속 ‘이별의 노래’ ♥木月의 사랑 이야기

2025. 1. 30. 05:21Korean Arts

 

 

 

그리운 밤에 / 박목월

하루는 깊은 밤이었습다.

사무치게도 그리운

임의 이름이 생각난 것은.

당신은 저를 떠나 어디로 향하셨나요.

보름달이 뜨는때면,

당신의 잔향만 어김없이 내게로 다가옵니다.

이른 봄의 밤바람.

그것이 당신의 숨결과 닮았습니다.

임의 호흡이 스쳐간 곳마다

꽃들은 만개하고,

세계가 도화지라면 당신은 물감일테지요.

당신은 지금 어디쯤 계신가요.

아직 차운 공기에 당신은 안녕하신가요.

외로운 별들은 언제나,

나의 임을 시기할터라

그래서 밤이 이토록 어두우나 봅니다.

캄캄한 밤에도 평안하시길.

저의 슬픔만큼

당신의 행복을 빌어봅니다.

어서 돌아오소서.

외로운 몸 홀로 두지 마소서.

청노루 / 박목월 

 

머언 산 청운사(淸雲寺)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紫霞山)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 가는 열두 구비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청밀밭

 

달안개 높이 오르고

청밀밭 산기슭에 밤 비둘기

스스로 가슴에 고인 그리움을

아 아 밤길은 간다

풀잎마다 이슬이 앉고

논귓물이 우는 길을

달빛에 하나 하나

꿈을 날리고 꿈을 날리고

그 떠가는 푸른 비둘기

눈물어린 눈을 향긋한 달무리를

길은 제대로 숨어 버렸다

 

 

♥ 朴木月 시인의 사랑 이야기 ♥

 

1) 박목월의 사랑

 

박목월 시인이 중년에, 여대생 애인과 사랑에 빠져 모든 것을 버리고 종적을 감추었다.

가정과 명예와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 자리도 버리고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홀연히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서울을 떠났다. 얼마 간의 기간이 지나 박목월의 아내는 그가 제주도에 살고 있는 것을 알게 되어 남편을 찾아 나섰다. 두 사람을 마주하게 되자, '힘들고 어렵지 않냐?'면서 돈 봉투와 추운 겨울을 지내라고 두 사람의 겨울옷을 건네주고 서울로 사라졌다. 박목월과 그 여인은 그 모습에 감동하고, 가슴이 너무 아파 그 사랑을 끝내고 헤어지기로 하였다. 박목월이 서울로 가기 전날 밤, 이 시를 지어 사랑하는 여인에게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

 

 

이별의 노래 (박목월 시/김성태 곡)

 

https://www.youtube.com/watch?v=nnQe7SX6ZJ8

 

 

 

사랑과 인생을 걸고 살았지만, 이별을 선택한 박목월의 여인은 박목월 시인이 서울로 가는 배를 타고 제주도를 떠나가는 백사장에서 하루를 보냈다 하며, 그 배와 박목월에게 이 노래를 불러 이별의 인사를 하였다는 설이 있는데... 박목월이 젊은 처녀와 사랑에 미끈덩 빠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 노래가 거기서 만들어진게 아니라는 다음과 같은 설도 있다.

 

박목월의 사랑에 대한 추가 해설

 

시인의 사랑과 아픔-이 노랫말을 쓴 사람은 박목월 시인이다. 6·25 전쟁 중이던 1953년 봄 목월은 자신을 좋아하는 자매를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자매 중에 언니가 목월을 좋아했는데 언니가 결혼을 하자 ㅇ대학교 국문과 학생이던 동생이 목월을 좋아하게 되었다. 전쟁 직후 폐허가 된 서울의 거리에서 이들의 사랑은 시작되었다. 그때 39살이었던 목월에게 자책과 갈등이 없을 리 없었다. 목월은 가까이 지내는 시인을 불러 그 여학생을 설득하도록 부탁을 했다. 문예사 건물 지하에 있는 ‘문예싸롱’ 다방으로 나온 그 여학생은 설득을 하려는 시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선생님,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죄가 아니겠지요.”1954년 가을 이 여학생과 목월은 서울을 떠나 제주도로 갔다. 거기서 동거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해 겨울 목월의 부인이 그들이 살고 있는 제주 집을 찾아왔다. 목월의 부인은 두 사람 앞에 보퉁이 하나와 봉투 하나를 내놓았다.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었을까. 보퉁이에는 목월과 여학생이 입을 한복 한 벌씩이 들어 있었고, 봉투에는 생활비로 쓰라는 돈이 들어 있었다. 여학생은 부인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울었고 목월은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그리고 집이 있는 쪽이 아닌 효자동에서 하숙생활을 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 잦다. / 이른 새벽에 깨어 울곤 했다. // (…) 효자동 종점 근처 가까운 하숙집 / 창에는 / 창에 가득한 뻐꾹새 울음… / 모든 것이 안개다. /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도 / 혹은 사람의 목숨도.” 시 ‘뻐꾹새’는 밤에도 잠을 못 이루고 새벽에도 일찍 깨어 울던 그 시절에 쓴 것이다.

‘이별의 노래’도 이 여학생과의 이별의 심정을 노래한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 높은 하늘 싸늘한 바람 먼 나라 / 그렇게 높이 우리 가슴은 그리움을 키웠는데 / 이제 깊게 빈손으로 돌아가라 하네요 // (…)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 깊어 가겠네요 /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우는 겨울밤도 있겠지요 / 너도 가고 나도 가는 야속한 가을날이 / 그래도 아름다운 건 당신 때문입니다.”-

사연 있어 더 깊고 아름답다-이렇게 쓰여진 ‘이별의 노래’는 6연 24행의 긴 시이다. 그중에서 부분 부분을 발췌해서 새로운 노랫말이 만들어졌는데 노랫말로 바뀐 부분들이 간결하고 아름답다. 이들의 순수하고 낭만적인 사랑과 이별의 아픔, 그 아픔을 해결하는 과정이 이 아름다운 노래를 만들어 냈으리라. 이들의 사랑을 놓고 우리가 윤리적이다 아니다 말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당사자들에게는 큰 상처이고 아픔이었을 사연들이 도리어 노래의 의미를 더 깊고 아름답게 해주고 있다. 예술은 근본적으로 윤리적인 것 이상을 노래할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인지도모른다. http://www.seataxi.co.kr/bbs/view.php?id=notice&page=15&sn1=on&divpage=1&sn=on&ss=off&sc=off&keyword=%C1%B6%BB%F3%C7%F6&select_arrange=reg_date&desc=desc&no=143

 

 

[도종환 칼럼]가을바람속 ‘이별의 노래’


지난 여름은 비도 많이 오고 무더웠지만 열어 놓은 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의 느낌이 가을이 깊어가고 있음을 알게 해 준다. 뒤뜰의 산벚나무, 자두나무 잎은 벌써 졌고 팽나무 잎도 누렇게 시들고 있다. 바람 서늘해지는 가을이 되면 입에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노래가 있다. ‘이별의 노래’이다.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 리 /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이렇게 시작하는 ‘이별의 노래’는 가을바람 속에서 불러야 제 맛이 난다. 이 노래는 곡도 좋지만 노랫말도 참 아름답다. “한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변해갈 수밖에 없는 사랑의 속성에 대해 노래한 구절도 아름답고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 촛불을 밝혀 두고 홀로 울리라.” 이별 이후에도 잊혀지지 않고, 지워지지 않는 슬픔에 대해 노래한 이런 구절도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박목월 시인의 사랑과 아픔-
이 노랫말을 쓴 사람은 박목월 시인이다. 6·25 전쟁 중이던 1953년 봄 목월은 자신을 좋아하는 자매를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자매 중에 언니가 목월을 좋아했는데 언니가 결혼을 하자 ㅇ대학교 국문과 학생이던 동생이 목월을 좋아하게 되었다. 전쟁 직후 폐허가 된 서울의 거리에서 이들의 사랑은 시작되었다. 그때 39살이었던 목월에게 자책과 갈등이 없을 리 없었다. 목월은 가까이 지내는 시인을 불러 그 여학생을 설득하도록 부탁을 했다. 문예사 건물 지하에 있는 ‘문예싸롱’ 다방으로 나온 그 여학생은 설득을 하려는 시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선생님,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죄가 아니겠지요.”

1954년 가을 이 여학생과 목월은 서울을 떠나 제주도로 갔다. 거기서 동거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해 겨울 목월의 부인이 그들이 살고 있는 제주 집을 찾아왔다. 목월의 부인은 두 사람 앞에 보퉁이 하나와 봉투 하나를 내놓았다.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었을까. 보퉁이에는 목월과 여학생이 입을 한복 한 벌씩이 들어 있었고, 봉투에는 생활비로 쓰라는 돈이 들어 있었다. 여학생은 부인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울었고 목월은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그리고 집이 있는 쪽이 아닌 효자동에서 하숙생활을 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 잦다. / 이른 새벽에 깨어 울곤 했다. // (…) 효자동 종점 근처 가까운 하숙집 / 창에는 / 창에 가득한 뻐꾹새 울음… / 모든 것이 안개다. /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도 / 혹은 사람의 목숨도.”

목월의 시 ‘뻐꾹새’는 밤에도 잠을 못 이루고 새벽에도 일찍 깨어 울던 그 시절에 쓴 것이다. ‘이별의 노래’도 이 여학생과의 이별의 심정을 노래한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 높은 하늘 싸늘한 바람 먼 나라 / 그렇게 높이 우리 가슴은 그리움을 키웠는데 / 이제 깊게 빈손으로 돌아가라 하네요 // (…)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 깊어 가겠네요 /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우는 겨울밤도 있겠지요 / 너도 가고 나도 가는 야속한 가을날이 / 그래도 아름다운 건 당신 때문입니다.”

-사연 있어 더 깊고 아름답다-
이렇게 쓰여진 ‘이별의 노래’는 6연 24행의 긴 시이다. 그중에서 부분 부분을 발췌해서 새로운 노랫말이 만들어졌는데 노랫말로 바뀐 부분들이 간결하고 아름답다. 이들의 순수하고 낭만적인 사랑과 이별의 아픔, 그 아픔을 해결하는 과정이 이 아름다운 노래를 만들어 냈으리라. 이들의 사랑을 놓고 우리가 윤리적이다 아니다 말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당사자들에게는 큰 상처이고 아픔이었을 사연들이 도리어 노래의 의미를 더 깊고 아름답게 해주고 있다. 예술은 근본적으로 윤리적인 것 이상을 노래할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인지도 모른다.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목월

"사람은 사랑할 때 누구나 시인이 된다"고 플라톤은 말했고 바이런은 "시인이 되려면 사랑에 빠지거나 불행해져야 한다"고 했다. 왜 인류는 시인을 낳고 시인은 시를 쓰며 사람들은 시를 읽는가라는 물음에 가장 가까운 대답은 "시 속에 사랑이 있으니까"일것이다.

조국도 혁명도 종교도 가난도 배신도 모두 시 속에서는 사랑의 모습으로 꽃피워진다.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시인으로서 사랑에 빠지면 어떤 시를 낳는가를 우리는 박목월에게서 배운다.

목월은 '문장'지에 추천을 받을때 평소 좋아하는 시인 수주(樹州)변영로의 아호인 수자에서 나무목(木)자를 따고 소월(素月)김정식에서 달월(月)자를 따서 지은 것이 본명 영종(泳鍾)을 누르고 그의 이름으로 굳혀져 있다.

경주에서 태어난 그는 대구 계성중학3학년 때 열여섯살 나이로 잡지 '어린이'와 '신가정'에 동요 '통딱딱 통딱딱'이 당선되어 동요시인으로 이름을 내기 시작했고 경주에서 금융조합 서기로 일하던 때 기차여행에서 만난 공주 처녀 유익순이 우연하게 직장 동료의 처제여서 불국사에서 다시 만나는 기연으로 혼담이 싹터 결혼하게 된다.

시인이기 이전에 생활인이고 아홉 식구의 가장이어야 했던 목월이 6.25 전쟁을 전후한 궁핍의 세월을 어떻게 넘어왔는가를 1964년 시'가정'에서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19문 반의 신발이 왔다"고 차마 쏟아내기 어려운 아버지 숨은 얼굴을 드러낸다.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로 이땅의 아이들에게 동심을 키워준 동요시인 박영종, 그리고 청록파의 3가시인으로 가장 많은 명편의 시들을 써냈으며 문학지가 없고 더구나 시전문지가 없어 후배 시인들이 고통을 받을 때 재산가도 엄두를 못내는 월간 시전문지 '심상'을 발행, 세상을 떠난 뒤에도 오늘토록 30년을 이어오도록 큰 몫을 해낸 시인 박목월에게도 아름답고도 아픈 사랑이 있었다.

대구로 피난 내려가서 있던 53년 봄.목월은 교회에서 서울의 명문여대생 H를 만난다. 시인과 시를 좋아하는 문학소녀와의 만남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다음해 환도와 함께 H가 서울로 올라오면서 자연스럽게 가까와진다. 목월은 H의 태도가 존경을 넘어서 이성의 사랑으로 싹트는 기미가 있자 후배시인에게 H를 잘 설득할 것을 부탁한다.

명동문예살롱에서 H는 목월이 보낸 시인에게 "나는 사랑 이상의 것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이런 무상의 사랑은 누구도 막을수 없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막무가내였다.

그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올때 목월은 어디론가 잠적하게 된다. H와 제주에서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은 뒤에 알려지고 그 사랑의 도피생활이 넉달째 들어섰을 때 부인 유익순여사가 제주를 찾아간다. 새로 지은 목월과 H의 겨울 한복과 생활비로 쓸 돈봉투를 들고.

끝내 목월은 H와 헤어지고 서울로 돌아온다. 김성태곡으로 널리 애창되는 목월의 시 '이별의 노래'는 그 H를 두고 지은 것이다.

"한 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서울로 올라온 목월은 바로 아내와 아들,딸이 기다리는 집으로 가지 못하고 효자동에서 두 달 동안 하숙생활을 하다가 귀가한다. "사랑하느냐고/ 지금도 눈물어린 눈이/ 바람에 휩쓸린다"고 목월은 평생토록 그 사랑을 시 속에 심다가 붓을놓고 갔다. 그 하늘 구만리 기러기 울어예는 뜻을 내사 알겠네.

이근배 시인.한국시인협회장

가곡해설> 이별의 노래..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날 밤에 ...홀로 울리라

이별의 노래를 부르면 한 폭의 동양화가 연상된다. 여백의 미를 좋아한 박목월 시인의 눈물이 그 빈자리에 찰랑 거리는 듯 하다. 이 시의 클라이막스는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 두고 홀로 울리라" 하는 대목이다. 여기에 얽힌 시인의 아가패적 비련을 알고 나면 더욱 이 시의 뜻이 애틋하고 아름다워 진다.
박목월 시인의 수필집 '구름에 달 가듯이' 에는 이별의 노래에 얽힌 사연이 실려있다. 주인공의 신분과 이름, 만난 계기나 시기는 고백하지 않았으나 그 여인에 대한 만나서 헤어질 때까지의 이야기가 서술되어 있다.

오월의 어느 날 오후 그의 사무실에서 첫 대면을 하고 눈발이 내리던 거리에서 두 번째 만남을 가졌다. 그리고 그녀를 세 번째 해후한 날은 유달리 눈부시게 햇빛이 비친 맑은 날이었다. 저편에서 걸어오는 한 여인, 소복한 여인은 햇빛을 등으로 받으며 불꽃에 싸여 있었다. 석고처럼 창백한 그녀의 얼굴은 아름다웠다. 중병을 앓고 있던 그녀는 그 날밤 자신의 병실을 지켜주길 박목월 시인에게 청했다. 병실에서 두 사람은 건배를 들었다. 그리고 이듬해 가을 어느날 오후 , 그녀는 세상을 떠났다. 그는 비통한 심정으로 "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하며 이별의 노래를 조용히 읊었다.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날 밤에 촛불을 밝혀 두고 홀로 울리라"라는 표현은 낭만적인 것 같지만 그는 "나는 햐얗게 재가 되어 삭아내린 기분'이라고 당시의 비애를 표현했다.


시인 박목월의 본명은 박영종이다. 1916년 경남고성에서 출생했으나 부친이 전근하면서 경북 월성군 건천읍 모량2리로 이사했다. 그는 박두진, 조지훈과 함께 청록집을 발간했는데 청록파 시인은 이 제목에서 유래한다.
빛나는 재질과 향토적인 서정으로 시의 형식과 내용에서 미학을 추구한 그는 시단에 금자탐을 세우고 1978년 3월 28일 눈을 감았다.


시 '이별의 노래'에 곡이 붙여진 것은 박목월 시인의 그 여인이 임종하고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서이다. 박시인이 대구에서 작곡가 김성태를 만난 날이었다. 당시 김성태씨는 해군정훈악대를 조직해 지휘를 맡고 있었는데 박목월 시인을 만나기 위해 대구에 온 길이었다. 두 사람이 어스름한 저녁 술집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박 시인이 새로 지은 시라면서 '이별의 노래' 가 적힌 쪽지를 김씨에게 내밀었다. 속으로 그 시를 읽는 순간 김성태씨의 가슴에는 뭉클하는 감동이 솟았고 너무나 아름답고 깨끗한 시상에 빨려들어갔다. 작곡가 김성태씨는 그 날 박 시인과 헤어져 여관에 돌아온 즉시 시의 감흥을 멜로디로 옮겼다. 오선지도 없어서 백지에 줄을 긋고 악보를 그렸다. 1952년 11월의 일이었다. 이 곡은 작곡 후 많은 성악가들이 다투어 독창회에서 불렀고, 특히 가을 독창회에서는 빠지지 않는 레파토리가 되었다. 작곡가 김성태 선생은 1910년 11월 서울 광희동에서 태어났다. 조부가 세운 교회에 다니면서 합창단원으로 음악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훗날 연희 전문학교 상과에 진학한 후 홍난파, 현제명, 채동선 등에게서 본격적인 음악수업을 받았다. 그는 연전 졸업 후 도쿄 고등음악학교(현 일본 국립음대) 작곡과에 유학했다. 그는 일본에서 작곡을 전공한 최초의 국내 작곡가이다. 집안이 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들은 음악공부를 반대해 돈을 주지 않았다. 그의 소망을 아는 부인이 부모 몰래 패물을 팔아서 준 돈으로 일본으로 떠났다. 그는 '아내가 아니면 오늘의 내가 없었을 것' 이라고 말하며 아내에게 감사해한다.

참고문헌; 이향숙 저 '가곡의 고향(1988) 한국문원'

박목월 저 '구름에 달 가듯이(1979) 삼중당'



양중해 시인의 '떠나가는 배'는  당시 여대생과의 6개월간에 걸친 사랑의 도피끝에 제주 부두에서의  이별하는 시인의 모습이라는 요지이다.

저 푸른 물결 외치는
거센 바다로 떠나가는 배
내 영원히 잊지 못할
님 실을 저배야
야속해라
날 바닷가에 홀로 버리고
기어이 가고야 마느냐.
(떠나가는 배-원시)

가곡 ‘떠나가는 배’(작사 양중해 작곡 변훈)의 주인공은 1978년 타계한 청록파 시인 박목월이라는 것과, 50년대 중반의 그와 한 여대생의 ‘제주 잠행’ 생활에 대해 처음으로 구체적인 증언이 나왔다.

노랫말을 쓴 양중해(77·시인·전국문화원연합 제주도지회장) 시인은 목월이 50년대 중반 잠시 제주에 머물 때 시와 술을 나눈 절친한 친구 사이.양 시인은 “1953년 휴전 무렵 유부남이던 목월이 젊은 여자와 피란 겸 사랑의 도피를 위해 제주에 왔으나 끝내 이별하게 됐으며,제주부두에서 두 사람의 이별 장면을 시로 옮긴 게 바로 ‘떠나가는 배’”라고 말했다.양 시인은 지난해 7월 제주문화원에서 열린 한 문학강좌에서도 ‘떠나가는 배’에 대해 “목월의 아픈 이별을 담은 시”라고 거론한 적은 있으나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다.


목월이 당시 머물렀던,지금은 사라진 제주시 관덕정 인근 동화여관 가족들에 따르면 목월은 한국전쟁 막바지에 제주에 왔으며,여대생(당시 홍익대 재학)과 함께 6∼7개월간 동화여관에 머물렀다.


목월과 함께 온 여인의 성은 한씨이며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주일마다 근처 서부교회에 나가 예배를 봤고,몸이 아플 때는 목월이 직접 부축하거나 업고 갔다.이 여인은 아주 깔끔해서 빨래가 잦은 편이었고,식사도 여관에서 내주는 음식 대신 직접 지어 목월에게 내왔다.또 아이들을 좋아해 과자와 과일을 자주 나눠줬고 튀김 등을 직접 만들어 줬다고 한다.

여관에서도 시낭송회가 자주 열렸는데 여인은 늘 목월 곁에 앉아 경청하곤 했다.


여관집 아들 이창주(64·당시 중학교 2학년)씨는 “그 여자는 목월에게 꼭 ‘선생님’이라고 불러 선생님과 제자 사이 같았으며,지금의 여느 탤런트보다도 예뻤고 몸도 호리호리했으나 자주 아파 병원 출입이 잦았다.”고 기억했다.또 “목월에게 ‘이름이 왜 목월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어느날 밤 나무에 걸린달이 너무 고와 ‘영종’이라는 이름 대신 ‘목월(木月)’이라는 이름을 쓰게 됐다는 말도 들었다.”고 했다.

이씨는 “목월과 여자가 이별할 무렵 여관에 있던 짐을 도둑맞아 경찰에 신고한 적이 있는데 이 여인은 ‘다른 것은 필요 없고 사진첩만 찾아 달라.’고 애원했으나 범인이 이미 아궁이에 넣어 불태워 버린 후여서 몹시 상심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짐 소동이 있고 얼마 후 목사인 이 여인의 아버지가 서울에서 내려왔고,가지 않겠다는 딸을 이틀 밤낮에 걸쳐 설득한 끝에 사흘째 되는 날 서울로 가기 위해 부두로 갔다.이씨도 양중해·박목월 선생과 함께 부두까지 배웅 나갔으며 여인과 목월 사이에는 아무 말도 없었다. “어깨가 들썩이는 것으로 미뤄 우는 것 같기는 했는데,우리 쪽으로 전혀 고개를 돌리지 않더군요.아마도 정인(情人)에게 우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던 것이겠지요….”


이씨는 “여관에 있는 동안 이런 정 저런 정 많이 들어 그때 무척 울었다.”며 당시 처연히 고개를 떨구며 돌아서던 목월 선생의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말했다.

당시 제주제일중학교 국어교사로 있던 양중해 시인은 집으로 돌아온 즉시 ‘두 정인의 부두에서의 이별’을 시로 옮겼고,같은 학교 음악교사이던 변훈에게 음을 붙이도록 해 가곡 ‘떠나가는 배’는 탄생했다.


그동안 기록(잡지 ‘시인세계’ 등)에 따르면 목월과 이 여대생은 시인과 문학소녀로 만나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하고,결국 제주도로 잠행했다.그때 두 사람은 겨울 한복을 지어 제주로 찾아간 부인의 인품에 목월이 반성하고 그가 서울로 돌아오면서 두 사람의 사랑도 끝이 나며, 이로써 목월에게 ‘이별의 노래’를 남겼다는 내용만 나와 있을 뿐이다.


원문출처 [서울신문] 2004-04-21 '내마음의 노래' 편집